필경 60년, 혼의 울림

2015.09.22 21:17 입력 2015.09.22 21:19 수정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진로에는 없던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다. 불문학도였던 나는 책상에서 외국어와 씨름하며 공책이나 종이쪽지에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곤 했다.

어느 날, 어떤 충동에 이끌려 시(詩) 같은 것을 썼다. 마침 대학문학상이 공모 중이어서 투고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그것을 계기로 문예지의 청탁을 받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고백하자면, 그날까지 나는 세상에 문예지라는 것이 있는 줄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글을 써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일찌감치 점지되어 있었던 것인지, 대학문학상이 매개가 되어 나는 문예지라는 미지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 거기에서 한국문학이라는 살아 꿈틀거리는 세상을 만났고, 압도당했다. 그 한가운데에 김윤식이라는 거목이 자리잡고 있었다.

[함정임의 세상풍경] 필경 60년, 혼의 울림

대학 졸업과 동시에 문예지와 인문학 출판사의 에디터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편집하고 기획했다.

그중 단일 저자로 가장 많은 책을 편집한 대상이 김윤식 선생의 저작들이었다. <임화연구>(1989)에서 시작해 <개정증보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까지 10년간이었다.

그사이 나는 선생의 문학기행서 <환각을 찾아서>(세계사)와 <천지 가는 길>(솔)과 선생의 회갑을 기념해 시, 소설, 작품, 작가, 비평, 예술기행의 여섯 항목으로 정리한 <김윤식 선집>(전 6권, 솔) 출간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기 나는 한국문학, 특히 소설을 향한 선생의 열정과 고민, 고통과 희열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메뚜기나 여치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른 무엇보다 ‘문학을 업(業)으로 살아가게 된 것’을 감사했다. 그리고 단 한번도 소설가를 꿈꾸지 않았던 내가 소설을 알아보고, 소설 쓰기의 욕망에 사로잡혔던 근거를 찾을 때면 선생의 월평을 처음 읽어가던 그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문학을 대하는 선생의 자세와 삶을 통해 문학 안에서 곧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성실함과 지속성이야말로 시간에 맞서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갔다.

지금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한국현대문학관에 가면 세계문학 사상 초유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읽다 그리고 쓰다-김윤식 저서 특별전’(9·11~12·11). 60년을 하루같이, 같은 시간, 책상에 앉아 혼신의 힘으로 읽고 쓴 글쓰기의 산 역사가 거기 펼쳐지고 있다. 소책자 형식으로 제작된 도록 ‘읽다 그리고 쓰다’를 펼치면 ‘필경(筆耕) 60년, 200여종의 책, 200자 원고지 10만장’에서 울려나오는 혼(魂)의 울림이 아로새겨져 있다. 한 자 한 자 읽다가 아득하여 목이 멨다. 어느 날 홀연히 남산에 가야겠다.

“나의 길동무여,/ 소금기둥이 되기 전에 떠나라./ 언젠가 군이 그릴 그림들을/ 내가 보지 못할지라도 섭섭해 마라./ 군의 그림은 군만의 것./ 그게 그림의 존재 방식인 것을./ 자, 이제 지체 없이 떠나라./ 나의 손오공이여, 문수보살이여./ 혼자서 가라./ 더 멀리 더 넓게.”(김윤식, ‘읽다 그리고 쓰다’, 강, 2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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