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아시나요

2016.03.10 20:44
5월8일까지 한윤정 선임기자

국립현대미술관, ‘탄생 100주년 회고전’

변월룡, 러시아명 펜 바를렌(1916~199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이 화가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연해주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 미술학교인 레핀아카데미에 한인 최초로 입학하고 35년간 교수로 재직했던 천재화가이면서도 지금껏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소련 주류사회에 입성했으나 인종차별이 심했고, 조국이라 생각한 북한에서는 숙청됐으며, 남한에서는 존재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문영대씨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층에 걸린 변월룡의 미완성 자화상 앞에 서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문영대씨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층에 걸린 변월룡의 미완성 자화상 앞에 서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변월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장르로는 유화·판화·데생·수채화·포스터를 아우르고, 내용으로는 인물화·풍경화·전쟁화·역사화를 망라했다.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전파하는 선전미술은 물론, 주변 인물과 자신이 교류한 작가 및 예술가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러시아 인민의 생생한 삶의 현장과 한국전쟁 당시 포로교환 장면, 연해주·북한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이번 회고전에는 200여점의 대표작이 걸렸다.

변월룡을 발굴해 국내에 소개한 이는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문영대씨(56)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로 유학을 갔다가 1994년 우연히 국립러시아미술관에 걸린 변월룡의 그림을 본 뒤 22년 만의 결실이다. “그때는 펜 바를렌이 고려인인지도 몰랐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과 아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절대 외국인이 그릴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메모했다가 수소문한 결과 그가 레핀아카데미의 교수였음을 알게 됐다. 역시 화가인 아들 펜 세르게이를 찾아가 유족들이 보관해온 그림을 살펴보면서 변월룡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알게 됐다.

변월룡(1916~1990)

변월룡(1916~1990)

귀국 이후 국내 전시를 추진하면서 2000년 유족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로 갔다. 그러나 만나주지 않았다. 어머니 제르비조바(2006년 사망)가 반대한다는 것이다. 1년 뒤 다시 연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삼고초려 끝에 만났을 때 부인은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반대 사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1940년 레핀아카데미에 입학하고 1951년(35세) 데생과 교수가 된 변월룡은 1953년 6월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된다. 그의 임무는 미술교육을 재건하는 것이다. 당초 3개월 예정이었으나 북한 당국이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이란 직책을 주면서 체류 기간은 1년3개월로 늘어난다. 이 기간에 변월룡은 일제로부터 이식된 서양미술을 배워온 북한 미술교육의 토대를 닦는 일에 헌신한다. 교재·교육방식·커리큘럼을 새로 짰다. 또 미술이론가인 김용준·한상진, 화가 정종여·문학수·배운성, 작가 한설야·이기영, 무용가 최승희, 조류학자 원홍구 등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휴전 당시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 등 역사화와 평양 대동문, 개성 선죽교 등 풍경화도 그렸다. 러시아로 돌아간 이후에도 북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편지를 보내 변월룡에게 재방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방문 신청은 번번이 좌절됐다. 그가 북한 측 영구귀화 제안을 거부한 데다 소련파 축출과 맞물려 숙청됐다는 사실을 1959년에 알게 되면서 깊은 실의에 빠졌다.

제르비조바의 불신은 이런 사연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전시에 기대를 가졌다. 문씨는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변월룡 전을 추진했다. 이번에는 국내의 벽에 부딪쳤다. 당시는 남북관계가 순조로울 때였고, 정부는 광복 60주년 문화행사 전반을 북측과 협의했다. 이때 북한이 그를 ‘민족의 배신자’로 규정하면서 전시는 무산됐다. 문씨는 “이런 상태에서 부인이 이듬해 별세하면서 더욱 변월룡을 포기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용가 최승희, 1954, 118×84㎝, 캔버스·유채

무용가 최승희, 1954, 118×84㎝, 캔버스·유채

그는 2012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컬처그라퍼)이란 평전을 내면서 작가의 존재를 알렸다. 여러 미술관이 전시 제안을 했으나 이 정도 화가라면 국립현대미술관 혹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소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의 첫 순서로 변월룡을 선택했다. 그와 같은 1916년생 작가의 전시는 이중섭(5월), 유영국(10월)으로 이어진다.

문씨는 “변월룡의 작품은 한국근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워준다.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을 배우면서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을 먼저 접한 작가들에 비해 러시아에서 활동한 그는 뿌리격인 리얼리즘 전통에 충실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이렇게 훌륭한 전시가 이뤄져 정말 기쁘다”며 “기왕 많은 그림을 가져왔으니 지방 순회전시를 하면서 변월룡을 충분히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변월룡 전’은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영혼을 담은 초상’ ‘평양기행’ ‘디아스포라의 풍경’ 등 4개 주제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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