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대학생들이 풀어도 ‘3등급’…공교육 정상화 ‘공허한 외침’

2018.11.18 21:47 입력 2018.11.18 22:28 수정

교사도 풀기 힘든 ‘국어 31번’ 변별력 갖추려다 무리수

‘자격고사화’ 강조해온 평가원장 “교육부와 논의 없어”

‘물불’ 난이도 비판 넘어 어떤 시험 돼야 할지 논의해야

<b>논술도 최선을</b> 경희대학교 수시모집 논술전형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18일 서울 경희대 청운관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논술도 최선을 경희대학교 수시모집 논술전형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18일 서울 경희대 청운관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7일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영어영역 문제를 풀어본 대학생 김민솔씨(23)의 말이다. 국어교육과에 다니는 오동운씨(24)는 국어영역을 풀고 나서 “내가 풀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칠까 싶었다”고 했다. 교육학과 학생 배수연씨(23)도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했다고 해서 수능을 제대로 풀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이날 교육단체 ‘프로젝트 위기’ 주최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포함한 대학생 12명이 수능을 한 과목씩 풀어본 결과 잘해야 ‘3등급’에 해당하는 점수가 나왔다. 이들이 응시하지 않은 영역에서도 같은 성적을 받았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다니는 대학에 합격할 것 같은 이는 2명에 그쳤다. 수능이 끝나면 사라져버릴 지식을 기계적으로 공부했음을 보여준 셈이다.

■ 풀 수 있는 문제 만들자더니

지난해 10월 말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가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으로 선임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2019학년도 수능이 쉽게 출제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공교육 본연의 교육과정에 충실하기 위해 수능을 자격고사로 만들어 최소한의 기능만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 밖의 ‘불수능’에 수험생들은 진땀을 뺐다. 가채점을 한 교실마다, 수험생을 둔 가정마다 ‘곡소리’가 났다.

성 원장은 18일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수능은 3년 예고제이기 때문에 (수능 자격고사화는) 장기적으로 가야 한다”며 “평가원은 주어진 조건하에서 시험 출제를 한 것이다.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능 자격고사화’에 대해서는 교육부와 논의한 것이 없다고 했다.

수능 출제는 평가원이 하지만 대입 기조는 교육부가 정한다. 이번 수능은 그동안 교육 당국이 내세워온 ‘공교육 정상화’ 기조와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교육부는 한 번의 시험으로 대학 진학이 결정되는 경향을 누그러뜨리고 교실을 정상화한다며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늘려왔다. 사교육을 부른다는 비판이 많았던 대학별 고사도 쉽게 출제하도록 유도했다. 매년 고교 교과과정 밖에서 대학별 고사를 출제한 대학들은 입학정원을 줄이는 등 징계까지 하고 있다. 그래 놓고 수능에서는 현직 교사도 풀기 힘든 문제를 냈다. 시험지 한 장 분량의 ‘동서양 우주론’을 읽고 ‘만유인력’ ‘질점’ ‘부피요소’에 대한 제시문을 이해해야 하는 국어영역 31번이 대표적이다.

수능 난이도에 ‘정답’은 없다. 시험의 기본 목적은 학업성적에 대한 ‘변별력’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사들도 풀기 힘든 내용이 출제되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적지 않다. 민경석 세종대 교수는 “수능은 기초학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선발자료로 쓰이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난이도는 필요하다”며 “어려운 문항을 내려고 깊이 들어가다보니 고교 교육과정에서 일탈한 문제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수 중심으로 수능을 출제하는 점을 지적하며 “학생들의 학습 수준을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현장 교사들이 주도해 출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b>이제는 논술</b> 2019학년도 대입 수시모집 논술고사를 마친 수험생들이 1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캠퍼스를 나가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제는 논술 2019학년도 대입 수시모집 논술고사를 마친 수험생들이 1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캠퍼스를 나가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어떤 시험’이 될 것인가 말해야

수능이 반복적인 문제풀이와 성적 줄 세우기로 경쟁을 부추긴다는 비판은 늘 나왔다. 대안을 만들려는 교육계의 논의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일정 점수를 기준으로 합격, 불합격을 나누는 ‘자격고사화’다. 미국의 일부 대학들은 대학입학자격시험(SAT)에서 일정 성적을 갖추면 지원 자격을 준다. 이런 식으로 수능을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되는지 확인하는 ‘문턱’으로 활용하자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능을 절대평가로 돌리자는 제안은 이런 주장과 맞닿아있다. 상대평가로 줄 세울 필요가 없어지고, 수능은 교육과정을 잘 이행했는지 평가하는 역할만 맡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학들의 학생 선발 자율권이 커지고, 수능 비중은 크게 줄어든다. 정부가 그동안 학종 등 수시모집을 확대해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종합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대입시험 ‘바칼로레아’도 대안으로 자주 거론된다. 올해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에는 ‘우리는 진실을 포기할 수 있는가’ ‘모든 진리는 결정적인가’ 같은 문제들이 나왔다. 학생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도록 요구한다. 독일, 스위스, 노르웨이, 캐나다 등은 국가 대입시험 외에 스위스 교육재단 국제바칼로레아기구가 주관하는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도 대입시험으로 인정해준다. 일본도 2015년 교육개혁안에 IB 도입을 포함시켰고, 일부 학교들이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국회 정책토론회 등에서 IB를 국내에 도입할 수 있을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대안을 찾는 논의가 많았지만 수능 문제지에선 이런 고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부는 2016년 수능개선위원회를 만든 뒤 여론수렴을 몇 차례나 반복했지만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수능 개편을 1년 미뤘다. 이어 1년간 이뤄진 대입개편 논의와 공론화 과정은 정시·수시 비율 같은 방법론에 치중했다.

물수능이냐, 불수능이냐를 넘어 ‘수능이 어떤 시험이 돼야 하는지’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한다고 교육계에선 지적한다. 조창완 좋은교사운동 교육정책연구소장은 “막대한 돈을 투자해 팀프로젝트 수업을 강조하는 2015개정교육과정을 만들었지만 아이들은 교육과정과 전혀 맞지 않는 수능을 치르고 있다”면서 “대안이 나올 때마다 시기상조라고 한다면 결국 안 하겠다는 뜻과 같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수능만으로 대학 가는 길을 열어두는 한 학생들이 손도 못 대는 문제를 만들어 최상위권과 꼴찌를 나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면서 “수능은 아이들이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있는지 정도만 알아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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