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김선명’에게서 또다른 내 인생을 봤죠”

2002.12.05 16:02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하긴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목 터져라 외칠 필요도, 혹은 외칠 여유도 없는 시절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구호를 외치던 ‘넥타이부대’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누군가의 몸을 휘감았던 태극기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아가씨들의 몸을 곱게 덮어버렸다.

그러나…. 미군장갑차에 깔려 두명의 소녀가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 국민의 지탄은 외면하고 저희들끼리의 공방에만 몰두하고 있는 정치권. 이런 ‘속 터지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예나 지금이나 절망의 크기는 변함이 없다. 세상은 바뀐 듯하지만 어쩌면 전혀 바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영화배우 김중기(35). 그는 한때 누구보다도 먼저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투사였다. 서울대 철학과 85학번 학생인 동시에 ‘88남북청년학생회담’의 남측대표였고, 당시 안기부를 피해 대학가를 전전하던 수배자였으며, 3개월간 투옥된 ‘죄인’이었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게 그는 일종의 ‘전설’이었다.

그런 그가 배우가 됐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도 바꿀 수 없는 신념’을 가진, 스스로와 아주 닮은 사람으로 변했다. 얼마전 촬영을 끝낸 영화 ‘선택’(감독 홍기선, 제작 영필름·신씨네, 개봉 내년 3월)에서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신념 하나 때문에 반평짜리 감옥에서 45년의 세월을 보내야했던 사람, 막상 1995년 감옥에서 나왔을 땐 가족들이 모두 외면해 독방에서 보다 더 심한 고독에 떨었던 사람, 그리고 결국 99년 북한으로 떠났던 사람. 김중기는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에게서 자신의 또다른 인생을 보았다.

“시나리오는 지난 추석 전에 받았습니다. ‘학생운동하다가 결국 저런 영화출연하는군’. 이런 식으로 제 이력이 배우생활에서 ‘꼬리표’가 될까봐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김선명)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못하겠다’라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아마도 그건 사상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인간에게 가해진 억압’에 대한 저항이었죠. 외부의 압력으로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 그 인간의 의지가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김중기는 ‘선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운동권 출신 김중기가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도 어찌보면 ‘운명’이었다. 감옥에서 나오고 조직운동에 몸담고 군대에 갔다오면서, 그는 넓고 길게 보고 싶었다. ‘영화도 길게 보면 운동의 일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때는 ‘운동’에 정신이 팔려 유일하게 극장에서 본 영화가 ‘간디’ 한편뿐이었다. 그런 그는 비디오로 영화 대여섯편을 보다가 ‘연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아, 영화 한편이 사람의 가슴을 이렇게 흔들어 놓는구나”.

그리고 무작정 대학로를 왔다갔다 하며 극단에서 연기공부를 시작했다. 친구, 아니 ‘동지’들은 “너 왜 그래? 신념이 흔들린 거야?”라는 질책 대신 “네가 무슨 배우냐, 배우는 아무나 하냐”며 오히려 농담을 던졌다. 그랬다. 배우가 되고 배우로 살아가는 것은 감히 ‘투쟁’과는 비교할 순 없지만 투쟁만큼 어려웠다. 영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96년)에서 운동권학생인 중기 역을 시작으로 최근 개봉된 ‘둘 하나 섹스’까지 여섯편에 출연했건만 그는 주목받지 못하고 충무로의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선택’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선택’은 제작비 10억원의 저예산영화. 시나리오가 좋은 평가를 받아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일찌감치 3억7천만원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나머지 제작비와 제작사를 구할 수 없어 5년간 허공에 떠돌던 작품이다. 주연배우도 처음에는 조재현이 맡기로 했지만 기약없는 제작탓에 주연배우가 김중기로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우연만은 아닌 과정이었다. 김중기는 촬영이 끝난 이후 이렇게 중얼거렸단다. “아, 내가 김선명의 역할을 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구나”.

김중기는 ‘선택’으로 “사람들에게 작은 행복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양조위나 로버트 드니로 같이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선보이고 싶단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사람, 이젠 배우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찬 사람. 하는 일은 변했지만 가슴에 담아둔 ‘그 무엇’은 변하지 않은 김중기. 가슴에 담아둔 신념을 지키고자 전향을 거부했던 장기수 김선명. 이 두 사람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그렇게 다르면서도 닮아있었다.

그에게 대뜸 물었다. “그런데 말이죠. 정말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세요?”. “글쎄요. 무엇 하나도 단기적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한편의 영화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박미정기자 broad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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