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한반도100년](8)박정희의 핵개발

2001.10.05 19:15

-美대사관 ‘한국 10년내 核개발’본국 보고-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집권 말기인 1970년대 후반 한·미관계는 좋지 않았고 ▲한국은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했으며 ▲그 중심에는 박대통령과 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 박사가 있었으나 ▲이박사가 의문의 죽음(이에 대해서는 미국 개입설이 제기됨)을 당하면서 핵개발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인식에는 공석하씨의 ‘이휘소 평전’과 4공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회고록 등이 힘을 보태고 있다.

이번에 경향신문사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와 지미 카터의 기념관에서 문서를 찾은 것은 양국관계의 한쪽 당사자인 미국의 입장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시대의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이 과연 실체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생생한 통치사료들을 접하면서 얻은 잠정적인 결론은 이렇다.

‘언젠간 돕겠다’ 당근작전도1) 이박사 죽음의 원인과 관련된 미국측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소설 속 이박사 관련부분은 거의가 ‘소설’이었다. 실제로 이박사는 서울 북악스카이웨이에서 피살된 것으로 그려진 소설과는 달리 77년 시카고 근교에서 사망했다.

2) 한국은 당시 분명히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으며 이 때문에 한·미는 심한 갈등을 빚었다. 미국은 한국의 핵보유 노력에 대해 강온 양면전략을 써가며 압박을 가했다. 제럴드 포드 기념관에서 찾아낸 문서들(안보관련 고위당국자회의 결과를 토대로 75년 6월30일 주한 미대사관 등에 보낸 훈령)은 수차례에 걸쳐 심각한 주의(Serious Attention), 광범위한 우려(Widespread Concerns) 등의 표현을 반복해가며 한국에 대한 경고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수출입은행 차관 등이 제공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하며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핵개발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하며 성공 확률이 낮은 모험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설득작전을 병행했음을 이 문서들은 말해준다. 아울러 이들 문서에서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상업적인 이유에서라도 핵관련 시설을 가지려고 하는 점을 이해한다”며 “적당한 때에 이를 돕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등 당근작전을 함께 구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꼬여가는 한·미관계=70년대 후반 박대통령은 미국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는 집무실에서 하지 않았다. 청와대 뜰을 거닐며 은밀히 이야기했다. 도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한대사를 지낸 포터가 78년 4월 CBS TV에 출연, 한때 청와대에 도청기구를 설치했다고 공개했을 정도로 미국은 박정희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재미교포 박동선씨가 미국 상·하원 의원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망명 등으로 악재만 쌓여가던 한·미관계에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운 카터의 대통령 당선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카터는 인권외교의 주창자이기도 했다. 한국에도 열악한 인권상황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집권층은 미국이 이중적 잣대를 들이댄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한신대 김명섭 교수(정치학)는 “미국은 자국에 중요하지 않은 국가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인권탄압을 규탄한 반면, 미국의 중대한 이익이 걸려있는 국가에는 유연한 기준을 제시하며 아무런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냉전종식에 한반도위상 급락한국에 대한 잣대가 바뀔 만큼 당시 미국에 있어서 한국의 중요성은 약화되고 있었다. 미·중관계가 개선되면서 소련은 동북아에서 중국과의 공산주의적 연대를 통해 누렸던 전략적 우세를 상실하게 되고, 한국은 ‘붉은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로서의 가치가 줄어들었다. 북·미관계도 동반개선되어 77년 3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유엔의 북한 외교관들이 미국의 공식 리셉션에 초청받고 79년 4월에는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미국팀이 참가할 정도였다.

카터는 미군 철수문제를 논의할 때도 한국을 소외시켰다. 일본에는 먼데일 부통령을 직접 보내 자신의 철수 결심을 알린 반면, 정작 당사자인 한국 정부에는 일본보다 보름 뒤에 그것도 달랑 편지 한통으로 통보해버렸다. 박정희는 분노했고 한때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한 핵개발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박정희, 핵을 향한 집념=“이박사님, 조국을 건져 주십시오. 이제 의존하던 시대는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해서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감히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박사님의 건강을 엎드려 비옵니다. 77년 3월18일 대통령 박정희 배상”

화선지에 작은 붓으로 곱게 쓴 편지였다. 절대권력자인 박정희가 ‘애원’ ‘엎드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호소한 것이다.

박정희는 72년쯤부터 핵개발에 착수했다. 국내 연구를 병행해가며 관련장비 구매협상을 프랑스 등과 벌여 나갔다. 미국은 이를 막고 나섰다. 포드 행정부는 하비브 국무차관보를 서울에 파견,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한·미 안보동맹을 전면 재검토할 것”이라며 압력을 넣었다.

프랑스에는 직접 테스탱 대통령에게 협상 중단을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가 손을 들었고 박대통령은 핵개발 의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77년 1월 카터 취임 후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하자 박대통령은 다시 핵에 매달린다. 외국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미국에 있는 한국인 두뇌들의 조국애에 호소하게 된다. 그 중 노벨상에 근접했다는 평을 받던 이박사는 특히 절실한 인물이었다. 이박사는 다리 살을 째고 그 속에 유도탄 개발원리가 담긴 비밀메모를 숨겨와 한국에 전해준 것으로 공석하씨 책은 적고 있다. 이런 이박사가 그해 6월 의문의 사고로 숨졌다는 급보에 박대통령은 ‘미국과의 단교’라는 말을 순간적으로 내뱉을 정도로 흥분했다고 한다.

美 대사소환등 초강경조치한·미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박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아예 정치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한림대 김용호 교수(정치학)는 “박정권은 ‘자주국방을 위해 유신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등 국민의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국은 79년 김영삼씨의 의원직 제명을 내세워 글라이스틴 대사를 소환해 버린다. 58년 보안법 파동때 다울링 대사를 부른 이래 21년 만의 일이었다.

이런 불편한 대외관계와 아울러 나라 사정도 급속히 나빠졌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부·마사태(79년)의 발발 직후 좌익 혹은 학생운동권의 선동이 원인이라 생각했으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정부불신, 조세와 물가고에 대한 저항이 사태를 일으켰음을 알았다”고 진술했을 정도로 민심이 등을 돌리면서 유신체제는 결국 종말을 맞는다.

그리고 그해 1월 해변을 거닐며 비서관에게 “81년 봄 핵무기 개발을 완료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박정희의 핵에 대한 집념도 미완인 채로 역사에 묻히게 된다.

〈김용석기자 kimy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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