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하지 못한 과거, 희망은 없다’처절한 정원

2002.03.01 16:37

여기에 ‘콜라보’가 있다. ‘콜라보’는 용서받지 못한다. 어떤 모습으로 변장에 변신을 하고, 때로는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우리에게도 썩 낯설지 않은 변명으로 자신의 잘못을 부인한다고 해도. 프랑스 작가 미셸 깽의 짧은 소설 ‘처절한 정원’(이인숙 옮김)은 웅변한다. 어설픈 화해의 제스처란 또 다른 거짓과 죄악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 목소리는 너무나 단호하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재미있고, 더 쓰라리다. 감상주의, 도덕주의, 수다스러움에 빠지지 않은 후일담이란!

어린 시절 주인공은 존경받는 교사이면서 주말마다 괴상망측한 차림새로 어릿광대 노릇을 하던 아버지를 끔찍하게 미워한다. 아버지의 고독한 원맨쇼에서 사랑에 굶주렸던 채플린의 희극과 희생과 고통으로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비극을 보았던 조숙한 아들은, 마침내 삼촌으로부터 그들의 가족이 통과한 시대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다.

레지스탕스였던 아버지와 삼촌은 역의 변압기를 폭파하고 검거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이로니컬한 것은, 범인인 그들이 범인의 자수를 종용하는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인간적 갈등과 환멸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축복이 있었으니, 온갖 얼간이 어릿광대짓으로 그들을 웃기고 때로 샌드위치와 구운 감자를 떨어뜨려 주는 독일 보초병 베른이었다. 그리고 기막힌 반전, 아버지와 삼촌이 그 참화 속에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은 작가가 20년 동안 탐정소설을 썼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은 웃는다. 아버지는 아폴리네르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우리의 처절한 정원에서/석류는 얼마나 애처로운가”. 그 대목에서 나는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와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렸다. 그래도 석류는 피어 맺힌다. 사람은 살아 있어 웃는다. 사람은 살기 위해 웃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웃지 못한다. 1999년 10월 전범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나타난 어릿광대의 아들은 말한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곧장 소설이 이어진다. 또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모리스 파퐁은 콜라보, 즉 나치 부역자이다. 하지만 무엇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들은? 진흙 구덩이 한가운데를 걷는 듯 무겁고 질퍽한 발걸음이나마 멈추지 않는다고 자위해야 할까?

/김별아·소설가/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