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훈 칼럼

‘곤룡의 소매’

2005.06.01 18:24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준비하고 있는 APEC 기획단은 각국 정상들에게 제공할 한국의 전통의상으로 곤룡포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해마다 한번씩 열리는 이 회의 마지막 날에는 각국 정상들이 주최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색이나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도포 모양의 웃옷에 가슴과 등, 양 어깨에 발톱 다섯개가 달린 용을 금실로 수놓은 곤룡포는 중국과 조선의 임금들이 입었던 공식 시무복(視務服)이다.

고대 중국의 황제(黃帝)나 요순 같은 제왕은 자신의 옷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졌다(垂衣裳而天下治)라는 옛말도 있듯이 곤룡포는 단순한 임금의 복장에 그치지 않고 절대군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얼마 전에는 중국 청나라 옹정제(雍正帝)가 입었던 곤룡포가 예상 낙찰가 25만위안(약 3천만원)으로 경매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임금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시대도 아니며 대통령이나 국왕이 평상시에 곤룡포 같은 공식복장을 입고 집무하는 시대도 아니다. 그러나 곤룡포니 옥좌니 하는 용어는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즐겨 쓰여 왔다. 특히 권부에 몸담고 있는 측근들의 비리나 의혹 사건을 비판할 때는 종종 ‘옥좌의 그늘에 숨어’라든가 ‘곤룡포의 소매 뒤에 숨어서’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참모들 의혹사건 잇단 연루-

민주정치가 보편화된 시대에도 ‘옥좌의 그늘’이니 ‘곤룡의 소매’ 같은 케케묵은 용어가 쓰이는 것은 어느 나라든 최고 권력자의 측근은 실정법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적인 존재로 보호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왕적인 대통령이 군림하던 시절에는 대통령 측근의 비리를 캐는 것은 곧바로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도전행위로 간주되기도 했다.

지금은 제왕적인 대통령이 군림하는 시대도 아니며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대통령의 측근이라도 비리사건에 연루되면 검찰에 불려가야 하고 더러는 구속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왼팔이네 오른팔이네 하던 인사들이 검찰에 불려다니거나 옥살이를 하는 것만 봐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말썽이 되고 있는 무슨 프로젝트니 무슨 의혹이니 하는 사건의 뒤편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곤룡의 소매’나 ‘옥좌의 그늘’에서 누리던 왕년의 갑옷이 건재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몇몇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가 정부 부처를 제치고 사실상의 정책결정권을 행사하는데도 아무런 견제장치가 없었고 위원장의 월권에 대해서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슬퍼런 검찰수사나 감사원 감사도 곤룡의 소매 뒤나 옥좌의 그늘까지 미주알 고주알 캐내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뒤늦게 말썽이 커지자 자리를 물러난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위원장이 조사를 받고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인물이 소환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의 감사나 수사가 곤룡의 소매 근처를 피해가며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만 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어제 아침 직원조회에서 “사회 일각에서 우리에 대해 온갖 그릇된 비판을 쏟아낼 때 분통이 터지고 억울한 점도 많다”며 청와대 직원들의 도덕적 우월성과 사명의식을 강조했다고 한다.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청와대 참모들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비서실장으로선 못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 시대는 끝났더라도 최고 권부인 청와대는 항상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노리는 사람들이 쳐놓은 덫이 노리고 있게 마련이다.

-비린내 나는 무리 멀리해야-

권문(權門)에 있을 때는 항상 몸가짐을 엄정하게 하며 조금이라도 비린내 나는 무리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채근담의 가르침은 지금도 살아 있는 경구(警句)다. 비린내 나는 무리를 멀리 해야함은 물론 곤룡의 소매나 옥좌 뒤에는 언제나 비리나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는 점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오죽했으면 집권여당에서까지 청와대 참모진의 인적쇄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겠는가.

〈이광훈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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