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이필이-蘭의 쪽 뻗은 그리움, 향기…

2007.12.27 09:20

마산에는 한국무용가 이필이(72)가 있다. 그는 3주에 한번씩 서울에 온다. 서울대병원에서 유방암 치료를 받는다. 지난 6월 유방암 4기 선고를 받았다. 4~5년 전 오른쪽 가슴에 멍울이 잡혔지만 ‘춤 가르치느라 너무 무리했나 싶어 며칠 쉬면 낫겠지’ 했다. 그런데 멍울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루도 무용학원을 비울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해 부산의 큰 병원을 찾았다. 암이냐고 물으니 양성종양이니 제거하자고 했다.

[춤과 그들](29)이필이-蘭의 쪽 뻗은 그리움, 향기…

“지난 5월 수술 날짜를 잡았는데, 왠지 다른 병원에 한번 가보고 싶은 기라. 서울대 병원을 찾으니 암이라케요.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수술도 몬하는 기라! 지난 6월부터 항암주사를 맞고 있다 카이. 그동안 여섯번 항암주사를 맞았고 두번은 임상의학용 신약을 투약했어요. 수천만원하는 주사약인데, 내는 임상실험 대상이어서 돈 들이지 않고 치료받고 있는 기라. 암 4기인데도 혹이 줄어들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사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체내 혈액부족으로 항암주사를 제 날짜에 맞지 못하자 암세포가 폐까지 퍼진 것. 신약 덕분에 살아났단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기자와 식사를 하면서 ‘절대 육류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는 육류섭취와 무관하다고 하지만 이필이는 암세포가 활성화될까 두려워 했다. 이필이의 손가락 중 3개의 손톱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니 기자 가슴에 찬 비가 내린다. “항암치료하면서 손끝이 따갑고, 딱딱하게 굳으면서 갈라진다”고 했다.

▲6·25전쟁보다 무서운 춤

이필이는 1935년 4월19일 마산 자산동에서 태어났다. 이찬종과 구막이의 3남4녀 중 셋째. 위로 오빠 한 명과 언니 한 명이었는데, 이필이가 태어나자 부모는 ‘이 아이가 딸로선 필히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의지로 ‘필이’라 지었다. 이름 덕일까. 이필이 밑으로 아들이 태어났다.

집에선 ‘덕순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의 항구도시 마산에서 그의 집은 잘살았다. 어릴 때 기억은 참으로 암담하다.

“대동아전쟁을 겪으며 자랐으니까요. 잠자다가도 사이렌 소리가 나면 머리맡에 준비된 배낭을 메고 우리 집 논과 밭을 가로질러 산속에 파놓은 굴로 피신하곤 했습니다.”

전쟁 중이어선지 이필이는 9세에 취학통지서를 받았다.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완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담임인 여교사 우에하라는 ‘오마루가창’ 음악에 맞춰 율동을 가르쳤는데, 구니모도 히츠이(이필이의 일본이름)가 군계일학이었다. “어미말과 아기말이 정답게 뛰노는 모습을 율동으로 하는데 우에하라 선생님이 ‘넌 무용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다. 무용가가 되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무용’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어요.”

우에하라는 율동시간이나 학교행사 때마다 필이를 불러 세웠다. 해방 후 4학년에 무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필이 집앞의 학교였지만 일본인 자녀만 다녔던 곳이다.

“학예발표회 때마다 제가 안무한 율동을 반 친구들에게 가르쳤어요. 한글도 그때부터 배웠죠. 명절만 되면 동네에서 마당과 대청마루가 넓은 집에서 연주하고 무용공연도 하면서 놀곤 했습니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홑이불로 무대 막을 만들고 엄마 치마저고리를 입고 연극도 했죠. 그때 제가 춤을 안무하고 공연을 진행하는 등 연출자 역할도 했습니다.”

그땐 한국춤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춤추었다. 정식 춤은 성지여학교 1학년 때 시작했다. 6·25전쟁이 터져 마산으로 피란 온 이미라 선생(경향신문 12월21일자 ‘춤과 그들’ 주인공)이 성지여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 최승희의 제자인 이미라는 한눈에 이필이의 재능을 알아봤다. 학생회장으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이필이는 남달리 감정표현이 풍부했다.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김남조(시인)는 필이를 문학도로 키우려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이미라가 이필이 집의 방 하나를 얻어 살면서 운명은 정해졌다. 유교사상에 투철한 필이의 부모는 딸이 춤추는 걸 못마땅해 하던 터. 필이 가족과 친해진 이미라는 필이 부친에게 ‘무용가로 키우고 싶다. 아들보다 낫게 키우겠다’고 설득했다. 반승낙. 문학을 버리고 무용을 택했다. 이필이는 성지여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가는 이미라를 따랐다. 한국 무용가들이 피란 내려가 활동하는 부산이 전쟁 중에도 춤의 메카였다.

“부산에서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피란민들이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저도 춤 배우며 기숙하던 무용학원을 비워야 했어요. 이미라 선생은 서울로 가면서 저에게 자신의 자주색 코트를 벗어주고 ‘마산 가서 기다리면 서울에서 자리잡고 연락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스승의 연락은 없었다.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스승 때문에 무용을 시작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매일 우는 것도 지쳤다. “스승이 서울에서 미장원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상경했죠. 미장원이란 간판만 보이면 죄다 뒤졌어요. 발이 부르트게 다녔지만 찾을 수가 있겠어요?”

마산으로 내려간 이필이는 56년 추산동사무소 2층에 피란 내려 가있던 단국대 분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6개월 후 마산분교가 단국대 부산분교와 합해지자 이필이는 무용학원 운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스승은 계속 연락이 없었다. 5급 공무원시험에 합격, 시립도서관에 취직해 생활하면서도 스승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 (훗날 이미라는 “시대가 어수선했다. 내 삶의 정착에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어린 필이를 늘 머릿속에 생각하면서 책임감과 상실감에 가슴 아팠다. 남한에서의 내 첫 제자가 서울에서 나를 찾아 고생한 사실을 알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춤을 품다

19세. 스승을 찾아 다시 서울로 갔다. 스승은 없었다. 그때 낙원동에 있는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찾아가 춤 공부를 시작했다.

“회현동 쌀집 2층에 방을 얻었습니다. 방세를 내지 않는 대신 주인집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식비는 자수를 놓아 해결했죠. 쌀가게 앞의 생국수집에서 국수 한 그릇 먹는 게 하루 식사의 전부였어요. 돈 없을 때는 회현동에서 낙원동 무용학원까지 걸어다니고!” 수예 솜씨가 좋은 그는 밤새 스카프에 수를 놓아 생계를 이었다. 춤뿐 아니었다. 수예, 노래, 그림까지 다재다능했다.

김천흥 무용연구소에선 전통무용 ‘포구락’을 비롯 창작무용의 기본과 북가락을 배웠다. 북 배울 때의 일. 통나무를 토막내어 조각낸 국방색 군인 담요로 몇 겹씩 싼후 다듬질 하듯 두들기며 북 가락을 연습했다. 그런데 통나무가 이필이의 엄지발가락에 떨어져 발톱이 빠지고 다리가 부어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닌적도 있다고.

“아파도 병원에 못 갔죠. 집에서 춤추는 걸 반대하는데 돈달라고, 그것도 북 배우다 다쳤다고 어떻게 말해요!” 김천흥 무용연구소측에 ‘학생들 가르치고 청소도 할 테니 연구소 강습비를 면제해달라’ 했지만 ‘이필이가 아니어도 청소할 제자는 많다’는 답이었다. 자존심을 꺾고 어렵사리 꺼낸 부탁. 낙원동에서 회현동까지 흐느껴 울며 걸었다. 이필이는 기자에게 당시의 가슴 무너지던 이야기를 하며 50여년이 지났는데도 눈물을 비쳤다.

“무용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죠. 하루종일 춤을 추고 싶어 대학졸업도 하지 않았는데! 거리를 지나가도 ‘무용’ 단어만 나오면 걸음을 멈추었고, 꿈에도 춤만 나오는데, 대학을 가고 싶겠어요?” 그는 결국 대학중퇴 후 37년 만인 93년 창원대 경영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마산 김해랑의 춤을 잇다

결혼은 24살에 마산에서 했다. 무용학원 제자의 엄마가 자신의 남동생을 소개했다. 3살 위인 남편은 잘생겼고 자상했다. 한동안 그랬다.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그는 몇달 연애로 행복했다. 성격차이로 29세에 이혼할 줄 정말 몰랐다. 남편은 신문기자였는데, 마산에서 제일 큰 무용학원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용돈으로 거액을 요구하곤 했다.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필이는 이혼소송 승소로 굴레를 벗어났다. 아들 류희철(49·요식업)은 25세에 낳았다.

“승소하던 날, 남편과 살던 집에서 맨몸으로 나왔습니다. 입었던 옷이 전부였어요. 짐 챙길 시간조차 그 집에 머무는 게 싫었거든요. 그러느라고 어릴 때 사진과 제1회부터 제4회까지의 개인발표회 사진이 없어요.”

남편은 재혼해 아들 하나 낳고 경상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가정적으로는 불행했지만 마산에서 이필이는 스타였다. 57년 무용학원을 개설했고 68년에는 마산에서 한국무용을 전파한 고 김해랑이 병석에 눕자 김해랑 무용연구소를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김해랑 선생께 7달 배웠는데, ‘하루를 배워도 사제지간이다. 너는 내 제자다’ 하시며 저를 아끼셨어요. 김선생도 이미라 선생처럼 최승희 제자여서, 제가 배운 춤과 비슷한 춤풍이셨죠. 그래서 즐겁게 배울 수 있었어요.”

이필이는 김해랑 작고 6개월 전에 그 학원을 인계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또한 고 최현과 이매방(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 권려성(재미무용가)의 춤도 사사했다.

“70년대 초반에는 우리 학원 제자들이 수많은 무용 콩쿠르를 휩쓸었어요. 당시 이대무용 콩쿠르에 군무 부문이 있었는데, 10여명씩 저에게 지도받고 제가 창작한 작품으로 상을 타곤 했어요. 특히 ‘파도’는 1~3등이 없는 특상작이었죠. 의상실도 없을 때여서 제가 디자인하고 의상 염색도 직접 해 입혔다니까요!”

무용학원을 개설하고 69년부터 17년 동안 한국무용협회 경남지부장으로 무용인 단합에도 앞장섰다.

첫 발표회는 마산 시민극장에서 했다. 이필이가 처음 창작한 ‘뱀의 춤’, 이미라가 안무했던 1인2역의 춤 ‘선과 악’ 등이 인기였다. 그는 창작춤 ‘회상’(71년), ‘설화’(72년), ‘번뇌’(78년), ‘사랑’(81년), ‘굴레’(86년), ‘맥’ ‘일란’(이상 87년), ‘난대별곡’ ‘사군자’(이상 2001년) 등을 안무했다. 무용극도 많다. ‘도’(2000년), ‘이성지합’(2002년), ‘성신대제’(2003년), ‘효’(2005년), ‘운림지’(2006년), ‘목련존자’(2007년) 등. 이미라를 비롯해 고 최현, 고 김해랑, 이매방, 권려성 등 당대 최고 무용가들의 춤을 사사했기에 다양한 창작춤이 가능했다. 춤욕심. 나이를 초월해 춤을 배우러 다녔다.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이매방에게 승무 살풀이춤을 전수받았다.

지난 11월에는 수제자 장순향씨가 마련한 공연 ‘명무, 일란 이필이 스승께 헌무-청정무’에서 산조를 추었다. 부채를 들고 춘 ‘부채버전’과 흰 명주 ‘수건버전’ 등 두 종류를 선보였다. 무대에 선 그는 도저히 암투병 중인 무용가가 아니다. 너무 정정한 모습.

“계속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무대에서 춤을 추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건강한가 봅니다. 암세포를 이기고 있으니까요. 제 별명이 ‘토마토’ 거든요. 이필이! 토마토! 거꾸로 해도 똑같잖아요. 아무리 흔들고 거꾸로 해도 저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고통받는 환자가 아니다. 암이 별 건가! 춤 덕분에 무서울 게 없다.

〈유인화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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