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009.11.01 18:07
오도엽 | 시인

박영진의 넋이 자리를 찾다

박영진의 버려진 유골을 수거한 이소선은 민통련 사무실에서 당시 재야운동의 구심 역할을 하던 이창복 선생을 만났다. “이 선생, 영진이 뼛가루를 겨우 찾아왔네요. 세상이 좋아지면 장례를 다시 치르더라도 당장은 태일이 묘 한구석을 파서라도 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 할 수 없으니 방법을 찾아 주세요.”

이소선의 말에 이창복 선생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을 어머니가 할 때까지 모른 체했으니.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시간을 좀 주세요.”

“누가 할 일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민망해 하는 모습에 되레 이소선이 미안해 몸 둘 바를 몰랐다.

곧바로 민통련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노동자의 죽음을 민통련이 모른 체해서야 말이 됩니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가 장례를 치릅시다.”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이소선(앞줄 가운데).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이소선(앞줄 가운데).

박영진 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진달래가 산을 물들이던 날 마석 모란공원에 사람들이 모였다. 안기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모란공원 관리소는 묏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좋다. 주지 마라. 태일이 묘에 합장하면 되지.” 이소선이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 전태일의 묘를 팔 태세로 나섰다. “이 여사님이 잘 아시잖아요.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관리소장은 이소선을 붙들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다. 이리저리 바쁘게 연락하던 관리소장은 박영진이 묻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산속에 뿌려져 바람에 산산이 흩어졌을 박영진의 넋이 드디어 자리를 찾았다. 박영진이 분신 항거한 지 한 달하고 열흘이 지나서였다. 북소리가 울리고 진혼굿이 펼쳐졌다. 이소선의 귀에 박영진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불어터진 입술을 힘겹게 열며 손을 잡아달라던 박영진의 숨 가쁜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살아 속삭이는 것 같았다. 태일이가 항거하고 십수 년이 흘렀 건만 아직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싸워야 하다니…. 이소선은 봉분 위에 쓰러져 쓰다듬었다. “살아서 싸워야지. 살아서 싸워야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왜 가냐!”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던 길에 이소선은 박영진의 유서가 생각났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 옷으로 바꿔 입으며 유서를 목도리와 함께 버린 것이었다. 원통했다. 그걸 버리고 오다니!

“지금도 영진이가 남긴 글을 잃어버린 걸 생각하면 원통하고 그래. 경찰들이 밀어닥치고 하니 하도 정신이 없어 그걸 버린 거야.” 기억과 기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다보면 왜곡이 될 수 있다. 자신이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며 살다보면 그 상상이 실제 그 당시에 자신이 한 일로 기억에 남을 수가 있다. 또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는 부제에서 말하듯 이소선의 여든의 기억이다. 그렇다보니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엄마, 박영진 유골을 찾아온 사람 인터뷰를 했더니, 어머니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라던데.”

“누가 그러든? 그럼 누가 찾아왔단 말이냐? 내가 거짓말 한다고 니가 나를 심문하는 거냐.”

이소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주 세세하고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로 다툰 일이 많다. 때론 굴절되고 때론 사라지고 때론 왜곡되는 기억. 그렇다고 기억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한글조차 배울 여력이 없었던 이소선에게 기억은 그 누구의 기록이나 자서전보다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목 디스크가 심해진 이소선, 무심코 왼팔로 밥그릇을 들다가 뚝 떨어뜨리고 만다. 왼팔에 마비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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