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덕 의원과의 대화 - 이상돈 교수 후기

2011.07.10 22:06
이상돈 | 중앙대 교수·법학

무려 ‘6선‘이지만 홍사덕 의원은 ’중진’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홍 의원님이 흔히 있는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홍 의원님 같은 의원이 열 명만 더 있어도 우리나라 정치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홍 의원님처럼 시대의 흐름을 거슬렀다가 또 다시 그 흐름에 합류하는데 성공한 정치인도 드물다. 홍 의원님의 이력이 바로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85년 들어서 우리 경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경제가 도약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해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전두환 정권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YS와 DJ가 미는 신민당은 제1야당이 되어 정국을 주도했다. 홍 의원은 그때 당 대변인으로 인기가 상종가였다. 삼양동 달동네에 위치한 이민우 총재의 자택을 매일 아침 찾는 젊은 대변인의 모습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민주화 조치를 선행하면 내각제를 수용할 수 있다던 ‘이민우 구상’은 양김의 반대로 좌초했고, 신민당은 와해되고 말았다. 양김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던 순간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의원내각제 제안을 거두고 5공 헌법의 ‘호헌’(護憲)을 선언했고, 얼마 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5공화국이 무너진 것이다.

25년 전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생생한 것은 나 역시 우리나라엔 대통령제 보다 의원내각제가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7년 기준으로 볼 때 모범적인 대통령제를 하는 나라는 미국의 거의 유일했다. 나 뿐 아니라 당시엔 제법 많은 학자들이 “대통령제는 미국에 특유한 경험”이라고 한 칼 뢰벤스타인의 진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중남미에서도 민주적 대통령제가 다시 자리잡았고, 공산체제에서 탈피한 동유럽 국가들도 대통령제를 택했으니 우리가 배웠던 지식도 이제는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홍 의원은 대화 도중에 ‘국민이 귀신’이라는 등 ‘국민’을 몇 차례 언급했다. 국민의 뜻에 따라 여러 고비를 넘어서 오늘에 이른 6선 의원다운 언급이 아닐 수 없다. 직선제도 어떤 논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국민의 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하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사안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왜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홍 의원이 출마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다.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이회창이었고, 당 사무총장은 이상득 의원이었다.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이명박 후보와 손학규 후보가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 당선하는 등 기염을 토했지만 선거 후에 이회창 총재는 당 사무총장을 김영일 의원으로 교체했다. 2002년 12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낙선했고, 이른바 ‘차떼기’가 드러나서 김영일 의원 등은 구속되고 만다. 거기에다 탄핵역풍이 불어서 한나라당은 존폐 위기에 몰리지만 박근혜 대표 덕분에 2004년 총선에서 기사회생하는 데 성공한다. 2002년의 두 차례 선거와 탄핵 폭풍의 한복판에 있었던 홍 의원은 이제 박근혜 전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고 ‘역사는 숨을 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든가.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