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전, 시대를 엮다…오스미 가즈오 지음·임경택 옮김 | 사계절 | 616쪽 | 1만7800원
사전은 한 문화가 축적한 지식의 곳간이자 그 지식을 사회 곳곳으로 실어나르는 지식의 파이프다. 18세기 프랑스에서 20여년 동안 180여명의 필자들이 참여해 완성한 ‘백과전서’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적함으로써 이성과 철학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믿음을 프랑스 전역에 퍼뜨렸다. 이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불씨로 작용했다. 오스미 가즈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의 <사전, 시대를 엮다>는 일본 고대부터 근대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사를 사전이라는 프리즘으로 조명하면서 일본 문화의 지적 역동성의 역사를 살핀다.
일본 최초의 백과사전은 935년 무렵 편찬된 <왜명유취초>(倭名類聚抄)다. 당시 귀족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한자어를 모아 그 뜻을 일본어로 풀이한 백과사전이다. 항목들은 교통, 도구, 동물, 식물 등으로 분류돼 있다. 항목별 설명을 보면 헤이안 시대(794~1185년) 일본 귀족사회의 생활상을 조망할 수 있다.
1445년에 편찬된 <애낭초>는 일상생활에 대한 지식을 담은 백과사전 성격의 책이다. 이전까지의 사전들이 ‘찾아보는 사전’이었다면 이는 ‘읽는 사전’에 가까웠다. 예컨대 ‘한(漢)은 고조를 시작으로 한다’는 <애낭초>의 한 항목은 한 고조 유방의 출신 지역, 유방과 항우의 싸움을 통한 한의 성립, 왕망에 의한 한의 멸망까지를 간결하게 기술했다. 실용적 도구를 넘어 읽을거리의 성격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백과사전 편찬은 헤이안 시대를 넘어 에도 시대까지 이어진다. 주목할 지점은 19세기 이후 일본의 사전 편찬이다. 일본 근대화는 거의 압도적으로 번역을 통해 달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이후 일본 사전의 역사는 ‘번역을 통한 근대’의 흔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의 근대는 난학(네덜란드학)에서 시작됐다. 1774년 에도 출신 의사 스기타 겐파쿠가 네덜란드 해부학책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해 간행한 <해체신서>(解體新書)는 일본 난학 발전에 획기적 역할을 했다. <해체신서>가 간행된 지 약 40년이 지난 후 난학은 일본 전역에 유행했는데, 도쿠가와 막부는 1811년 서구 지식과 학문의 깊이를 여실히 드러낸 서양 백과사전 번역사업에 착수한다. 그 책은 프랑스 신학자 노엘 쇼멜이 프랑스어로 쓴 쇼멜 백과사전의 네덜란드어판이다. 일본어판 제목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후생신편>(厚生新編)으로 정해졌다.
번역작업은 원활하지 않았다. 최초 번역작업을 총괄한 이는 네덜란드 통역사 집안에서 자란 바바 사다요시였으나 1821년 36세에 사망해 당시 대표적 난학자들이 후속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한 집안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에 이르는 3대가 번역작업에 참여할 만큼 번역은 더디게 진행됐다. 바바의 뒤를 이어 번역 책임을 맡은 난학자가 서양 서적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일본 지도를 건네주었다가 비밀 누설죄로 투옥돼 옥중에서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난학자에 대한 막부의 감시가 심해져 완성된 번역 원고도 오랫동안 책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후생신편>은 1937년 비로소 출판됐지만, 번역된 지 100년이 지난 이 백과사전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난학에 쏠려 있던 번역의 물꼬를 미국, 영국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1873년 시작된 <체임버스 백과사전> 번역작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체임버스 백과사전>은 스코틀랜드 출신 로버트 체임버스와 그의 형 윌리엄 체임버스가 독일 출판업자 브로크하우스가 간행한 백과사전에 영향을 받아 펴낸 것으로, 실용성을 중시했다.
<후생신편>이 난학자들의 역량을 집결한 결과물이라면, <체임버스 백과사전>의 일본어판인 <백과전서>의 번역을 주도한 것은 영어 지식을 갖춘 소장 학자들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백과사전 번역을 통한 서양 문명 흡수를 위해 이 <백과전서> 발행에 총력을 기울였다. <백과전서>는 1873년 화학편을 시작으로 1884년까지 전 90편으로 간행됐다. <백과전서>는 “계몽적인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부국강병과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이전까지의 백과사전 출간이 외국 백과사전의 번역이었다면, 1908년 제1권이 출간된 <일본백과대사전>은 번역을 통해 축적된 일본의 문화적 역량이 자체적으로 지식을 집대성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성과다.
젊은 출판인 사이토 세이스케는 영일사전의 성공을 토대로 일영사전을 출간할 계획이었으나 1892년 도쿄 대화재로 자료와 원고를 모두 잃어버리자 오히려 더 규모를 키워 소장학자·편집자들이 함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원고 집필에는 메이지 시대 일본 학계의 역량이 총동원됐다. 제1권에만 245명의 학자가 참여했다. 외국 것을 번역한 백과사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처음부터 “(서양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및 기타 동양 제국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룬다는 편집방침도 세웠다.
<일본백과대사전>은 외국 백과사전 번역과는 차원이 다른 작업이어서 1908년 8월 마침내 1권이 출간됐을 때 일본 전역은 흥분에 휩싸였다. “작은 활자로 빼곡하게 메운 3단 구성의 판면은 신시대 독자들에게 세계의 모든 지식을 모았다는 실감을 안겨주었으며, 정교한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근대적인 학문의 세계를 접하는 기쁨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해 11월 열린 축하연에는 2000명이 넘는 일본의 명사들이 모였다.
사이토 세이스케는 <일본백과대사전>을 전 6권으로 간행할 생각이었으나 작업이 진행되면서 규모는 점점 늘어났다. 그만큼 재정 압박이 가중돼 1912년 그의 출판사 산세이도는 결국 도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몇몇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출간 작업이 지속돼 1919년 마침내 10권으로 완성됐다. 저자는 <일본백과대사전>을 “20세기 초 일본 문화의 발전에서 말 그대로 쾌거라고 할 만한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저자는 “현재 일본 대형서점의 사서·사전 진열대에는 수많은 백과사전이 각각의 특색을 뽐내며 놓여 있다.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지만, 현대 일본의 백과사전이 지닌 이 요란함의 배경에는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은 오랜 역사가 있다”고 말한다. 자국의 지적 역량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 같기도 하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전 출판사들은 사전 편집팀을 해체하고 10년 가까이 개정 없이 증쇄만 거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