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문 당선작 - 박정은 ‘크레바스에서’

2017.12.31 20:45 입력 2018.01.01 11:36 수정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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