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의 도살자' 라트코 믈라디치 종신형 최종 선고

2021.06.09 13:59 입력 2021.06.09 14:24 수정
장은교 기자

1990년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에서 학살을 주도한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79)가 8일(현지시간) 헤이그에 위치한 유엔 산하 구 유고·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잔여업무기구(IRMCT) 최종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믈라디치는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세르비아에선 그를 영웅시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8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보스니아전 학살의 주범인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의 재판 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이터연합뉴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8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보스니아전 학살의 주범인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의 재판 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이터연합뉴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날 대랑학살과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2017년 유죄판결을 받은 믈라디치의 항소를 기각하고 종신형을 확정했다. 믈라디치는 “군인으로서 의무를 수행한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관 5명 중 5명이 유죄의견을 밝혔고, 잠비아 출신의 재판관 한 명만 믈라디치의 편에 섰으나 이유는 공개하지 않았다. 믈라디치뿐 아니라 검찰도 1992년 4만5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다른 사건까지 유죄판결을 내려달라고 항소했지만, 이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믈라디치는 첫 판결 때 재판부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강하게 저항했지만, 이번엔 선고가 낭독되는 한 시간동안 조용했으며 형 확정 후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영국 언론 가디언은 전했다. 믈라디치는 정장을 입고 출석했으며 법정에서 유일하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보스니아에선 여러 시민들이 영상중계를 통해 그의 최종선고를 지켜봤다. 믈라디치는 유럽의 한 지역에서 남은 생을 복역하게 되는데,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등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무력 분쟁을 겪었다. 특히 1992~1995년까지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전쟁은 동방정교회에 뿌리를 둔 세르비아계와 이슬람이 많은 보스니아계, 로마 가톨릭인 크로아티아계가 충돌하면서 피해가 컸다. 보스니아계는 독립을 추진했으나,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군은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했다. 3년 8개월동안의 전쟁에서 약 10만명이 사망하고 200만명 이상이 난민이 됐다. 유고연방 육군 출신인 믈라디치는 1992년 5월 세르비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1425일동안 고립시킨 포위작전에 깊이 개입했고 특히 1995년 소년들을 포함한 무슬림 8000여명을 살해해 2차대전 이후 가장 끔찍한 인종대학살로 기록된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을 주도했다. 잔학한 수법때문에 믈라디치는 ‘발칸의 도살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내전 종식 후 믈라디치는 16년동안 도주생활을 하다가 2011년 친척집에서 붙잡혔다. 보스니아 내전과 관련해 160명 이상이 기소됐고 80여 건의 재판이 진행됐다. 그와 함께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2019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영국에서 복역중이다.

라트코 믈라디치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이 1993년 한 회의에 참석한 뒤 나오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이터연합뉴스

라트코 믈라디치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이 1993년 한 회의에 참석한 뒤 나오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이터연합뉴스

믈라디치를 생포해 기소한 검사 세르게 브람머츠는 “믈라디치는 현대사의 가장 악명 높은 전범 중 하나로 전쟁범죄와 증오, 인간의 고통을 상징한다”며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에게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재판을 지켜본 한 피해자는 BBC에 “국제재판소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이 순간을 보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며 “이제 아이들과 아내를 스레브레니차로 데려가 그곳이 우리의 고향임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 22명을 잃은 또다른 피해자는 “이번 판결은 보스니아계든 세르비아계든 자식을 잃은 고통을 겪은 모든 어머니들의 승리”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이 역사적인 판결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8일(현지시간)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의 선고를 지켜보다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이터연합뉴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8일(현지시간)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의 선고를 지켜보다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이터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이번 판결은 세르비아의 일부 민족주의 단체들이 학살 책임을 부인하고 분쟁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는 상황에서 나왔다”며 “유죄판결을 받은 전범들이 영웅으로 칭송받고 믈라디치와 카라지치의 포스터가 공공장소에 등장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재판을 지켜본 한 수용소 생존자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눈에서 악마를 보았다”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증오와 분열의 이데올로기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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