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발바닥 감각이 떨어지면 잘 넘어지게 돼요. 감각이 더 떨어지는 쪽 발을 더 꾹 눌러보세요.”
지난 8월 25일 충남 홍성군 홍동면 마을활력소 건물, 물리치료사 민트씨(활동명)의 시범을 따라 동네 어르신 5명이 발바닥으로 고무공을 누른다. 발끝에 수건을 걸어 몸쪽으로 잡아당기고,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의자를 잡고 스쿼트도 한다. 쪼그려 앉아 밭일을 하느라 하체가 좋지 못한 노인을 위한 스트레칭 수업이다. ‘이 몸으로 평생 밭농사 논농사 다 지었다’는 장의분 할머니(82)가 스트레칭을 마치고 “시원하다”며 다리를 쭉 뻗어 보였다.
민트씨가 근무하는 홍성 우리동네의원은 ‘홍성우리마을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료협동조합)’의 첫번째 사업소다. 의료협동조합은 지역 주민과 의료인이 주체가 돼 지역공동체의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조’ 조직이다. 병원이 없는 홍동면에 ‘병원’이 생긴 데는 공중보건의로 복무하며 주민들과 인연을 맺은 이훈호 원장이 이곳에 남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원장과 주민들은 준비 과정에는 독서와 다큐멘터리 시청으로 스터디를 함께 하며 의료협동조합에 대한 개념과 인식을 공유했다. 병원을 어디에 열지, 의료협동조합 조직에 주민들이 어떻게 참여할지도 토론을 거쳐 정했다. 4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5년 5월 325명이 출자한 의료협동조합이 꾸려졌고, 우리동네의원도 8월 개원했다. 본격적으로 병원 개원을 준비할 때는 실내 인테리어 공사에 조합원들이 직접 팔을 걷어 붙였다.
개원 6년을 넘기면서 우리동네의원은 든든한 마을 주치의로 정착했다. 간호사가 내원 환자의 이름을 물어보면 섭섭해할 정도로 주민들 사정을 두루 꿰고 있다. 가정의학과 1차 의료기관이라 검사 장비는 부족하지만 대신 주민의 일상을 통해 병인(病因)을 더 잘 찾아낼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마을 어르신 몇 분이 별안간 한꺼번에 고혈압이랑 당뇨 수치가 높아졌어요. 별탈 없이 지내시던 분들이라 이상했는데 가만 보니 마을에 사륜차(노인전동스쿠터)가 유행하던 것이 생각나더군요. 사륜차를 타느라 운동량이 줄어든게 원인이었어요. 처방이야 별다를 게 없겠지만, 환자들의 일상을 잘 알고 있으니 적절히 조언할 수 있죠.”(이훈호 원장)
의료협동조합은 진료이상으로 건강관리도 중시한다. 여름 고추 수확철에는 소식지를 돌려 ‘탈수를 조심하라’고 당부하거나 운동량이 줄어드는 겨울 농한기에는 마을길 걷기모임을 한다. ‘스스로를 살피고 서로를 보살피는 건강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자면 사후 진료는 물론 평소 건강유지도 필수다. 최문철 사무국장은 “마을에 의사가 있는 것도 좋지만 주변에 건강에 관심이 많은 이웃이 많은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병원을 만들 때 이 원장이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주민들이 후원하는 방법 대신 복잡하더라도 의료협동조합을 택한 까닭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로 의료협동조합은 노인 돌봄에 부쩍 신경쓰고 있다. 홍동면 주민 3393명 중 39.7%(1346명)이 65세 이상(올해 9월 말 기준)이다. 의료협동조합은 지난 7월부터 동네 어르신에게 한달에 두 번 식자재를 배달하는 ‘꾸러미 배달부’ 사업을 시작했다. 식자재를 공급하면서 코로나로 외출이 뜸해진 어르신들의 정신 건강을 살피려는 목적이다. 꾸러미 배달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놓고 기다리는 어르신도 있을만큼 반응이 좋다.
의료협동조합은 6년을 넘기면서 조합원이 560여명으로 불어났고, 4명으로 시작한 직원도 9명이 됐다. 의료차트는 2800명을 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실험중’이다. 가장 큰 고민은 수익과 지속 가능성이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 환자를 진료를 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수익을 낼 구조가 아니다. 직원 9명 중 5명의 임금은 정부의 사회적기업 지원 사업으로 해결하는데, 지원 시한이 만료된 이후의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의료협동조합을 ‘사막화’하는 농어촌 의료 문제의 대안으로 꼽기도 조심스럽다. 경기도 안성에서 1994년 처음 등장한 의료협동조합은 현재 전국에 25개(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조합연합회 소속)가 있지만, ‘협동조합의 메카’로 통하는 홍동면처럼 지역공동체가 활성화돼 있지 않으면 추진이 쉽지 않다. 여기에 대도시에서의 수익을 포기하고 지역에 남을 의지가 있는 의사를 만나는 인연까지 보태져야 한다. 최 사무국장은 “의료협동조합이 좋은 사례가 되는 지역들이 있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가 잘 하면 이런 병원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