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수수께끼로 만든 뻔뻔함, 안 통하면 해코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세계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사실조차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깨진 주전자에 대한 농담을 인용한다. 빌려준 찻주전자에 구멍이 난 걸 발견해 빌려 갔던 이웃에게 추궁하자 그 이웃은 이렇게 뻗댄다. 첫째 자기가 돌려줄 때 찻주전자는 멀쩡했으며, 둘째 찻주전자에는 빌릴 때부터 구멍이 나 있었고, 셋째 자신은 찻주전자를 빌린 사실조차 없다고. 세 가지 모두 찻주전자의 구멍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변명이지만 무의식의 세계가 아닌 우리의 논리적 세계 안에서는 서로 충돌하게 된다.
지난 9월22일 윤석열 대통령이 순방 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48초 회담 후 벌어진 비속어 논란에 대해 내놓는 해명은 이 주전자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잘 알려졌듯 윤 대통령은 바이든과 만난 뒤 행사장을 나서며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는 쪽팔려서 어떡하냐?”라고 들리는 발언을 했으며, MBC를 필두로 주요 언론사들이 해당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통령 측의 대응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면 첫째 대통령실 대외협력단에서 기자단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비보도 요청을 했으며, 둘째 보도가 되자 대통령실 김은혜 홍보수석은 “이 새끼들”은 미국 국회가 아닌 한국 국회의 야당을 지칭한 것이며 “바이든”이라 들리는 부분은 “날리면”이라 해명했다. 즉 미국 국회 승인 가부에 따른 바이든의 쪽팔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야당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셋째 며칠 후 대통령실 브리핑에선 “이 새끼”가 야당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넷째 이 칼럼을 쓰는 현재(9월27일) 대통령실에선 아예 “이 새끼”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자, 우리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까.
처음엔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더니…나중엔 없었던 일로 만들려 한다
‘합리성’은 배제된 채 잘못은 인정할 수 없다는 강박적 무의식의 발현
정부·여당의 ‘지록위마’…기저엔 독선적 권력의 횡포가 도사리고 있다
진실 여부를 다투는 척하며, 국익 훼손을 명분으로 MBC ‘한 놈’만 팬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이참에 언론을 장악해 보겠다는 것은 아닌지…
당연히 정답은 춤을 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 측 해명의 비일관성은 수습의 수습의 수습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잘못한 걸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강박적 무의식의 발현에 차라리 가까워 보인다. 이 무의식적 세계의 논리가 무서운 건,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제든 자신이 옳다는 정해진 결론으로 소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락가락하는 대통령의 해명을 얼마든지 비웃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횡설수설 이면에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독선적 행정권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까지 비웃을 수는 없다. 그의 변명은 무능하지만, 깨진 주전자에 대해 따지는 이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괴롭히기엔 충분히 유능하다. 그리고 현재 그 괴롭힘의 대상은 가장 먼저 보도를 한 MBC다.
여당인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MBC가 2008년 광우병 보도 때처럼 조작선동을 한다고 비난했으며, 같은 당 나경원 전 의원은 MBC는 의도된 왜곡, 조작에 따른 국익 훼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따졌다. 더 나아가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해당 논란에 대해 “대통령 해외 순방 자막 사건”이라 규정했다. 즉 문제는 대통령의 발언이 아니라, 그것을 자막으로 왜곡한 MBC에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주전자 이야기로 환원하면, 아예 주전자 자체가 멀쩡하며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 셈이다.
여당 측의 주장대로 대통령의 해당 발언이 이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지금 다시 들어봐도 “바이든이”처럼 들리지만, 다른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부분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발언의 맥락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의회 동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한 바이든의 발표 후,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동의 안 해주면 (‘바이든이’처럼 들리는 말)는 쪽팔려서 어떡하냐”는 발언이 나왔을 때, MBC 입장에선 그렇게 해석하고 자막을 달 꽤 좋은 근거들이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추후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더 많은 근거들이 나온다면 최종적으로 ‘오보’로 판명될 수는 있지만, ‘자막 조작’이나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 말대로 ‘가짜뉴스’로 명명할 일은 결코 아니다.
탈진실 시대의 가짜뉴스란 객관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이되 틀릴 수 있는 추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가짜뉴스에 정말 가까운 게 있다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통령 측의 해명들이다. MBC 보도는 대통령 발언이라는 하나의 객관적 사실에 대한 나름의 근거 있는 해석으로서 다른 여러 해석과 진실 여부를 두고 경쟁 가능하지만, 대통령 측에선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사실을 연달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해명 중 하나가 사실이라면 나머지는 다 가짜뉴스다. 물론 모든 해명이 그럴 수도 있지만.
대통령은 미국이 아닌 한국 국회 야당을 향해 이 새끼라 했고, 야당을 향해 이 새끼라 한 게 아니며, 이 새끼란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어쨌든 대통령은 잘못한 게 없다는 이 대안 사실(alternative fact)의 세계관은 너무나 조악하고 허술해서, 스스로 대안 사실임을 감추지 못한다. 즉 무언가를, 아마도 숨기고 싶은 사실을 대체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이 가림막 안에 어떤 진실이 있느냐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상당히 구체화된 진실을 구태여 숨길 때, 진실은 안 좋은 의미로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이미 MBC는 대통령 발언에 그런 자막을 달아 해석할 근거를 지니고 있지만, 대통령과 여당은 그보다 좋고 일관된 근거로 반박하는 대신, 수많은 답안 후보를 던진 뒤 해당 발언의 진실 여부를 사람에 따라 긴가민가한 듣기 평가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진실 공방은 합리적 논의가 아닌 미지의 수수께끼 놀음이 되었다. 대통령 측의 비합리적 해명들은 우리의 합리적 세계에서 간단히 거부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합리적 논의라는 게임의 판을 뒤엎었다. 이제 윤 대통령과 여당은 진실 여부를 두고 다투는 척하며, 실은 진실의 불완전함을 무기 삼아 MBC와 야당을 향한 치킨게임을 벌일 수 있다. 아니 이미 시작한 듯하다. 대통령실은 비속어 관련 보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MBC에 보냈으며, 여당은 MBC에 대한 편파조작방송 진상규명 TF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번 윤석열 정권이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그러했듯 MBC를 타깃으로 한 언론 장악에 나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합리적 공론장의 이념이 외설적인 말싸움으로 대체될 때, 이미 양심적 언론인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MBC가 완벽하게 증명된 진실을 보도한 게 아닐지라도, 언론으로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모든 국민의 귀에 똑같이 들리는 그날까진 완벽하게 증명된 게 아니니 조작, 혹은 가짜뉴스라 명명하겠다면 결국 모든 방식의 문제 제기를 입막음하겠다는 뜻이다.
방법이 무엇이든 그 끝에 남는 건 언론 장악이다. 이 지점에서 처음의 깨진 주전자 이야기는 조금 섬뜩한 방식으로 다시 연결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정당함만을 증명하는 정권의 무의식적 세계에선 어떠한 비판도 정당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뻔뻔한 이웃은 그저 주전자의 구멍에 대한 책임으로 실랑이를 벌였지만, 언젠가는 아예 해코지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해코지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짜는 그다음이다. MBC를 비롯한 양심적 언론이 깨진 주전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한 사람이라면, 그가 해코지당한 뒤 깨진 채 나뒹굴 주전자가 바로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