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 할아버지의 ‘감춰진 그림’ 공연으로 알린 32세 큐레이터

2012.04.09 21:11 입력 2012.04.09 21:12 수정
이로사 기자

지난 7일 오후 5시, 서울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는 특별한 전시가 하나 열렸다. 아니, 전시가 아니라 공연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제목은 ‘천수마트 2층’. 이 공연은 말하자면, 1919년생 조성린 옹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올해 나이 아흔셋인 그는 평생 홀로 어두운 자신의 공간에서만 그림을 그려왔다. 그의 작품이 처음 세상과 만나는 자리인 셈.

‘천수마트 2층’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진행되는 기존의 전시와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관객들은 객석에 빙 둘러앉았고, 암흑 가운데 핀 조명이 들어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해설사가 나타난다. 무대 위에는 폐품을 쓸모있는 작품으로 변모시키는 ‘길종상가’ 박길종이 설치한 특별한 관람 장치들 안에 조성린 작가의 그림이 띄엄띄엄 설치돼 있다. 해설사는 각 작품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점이다. 천수마트는 과연 실재하는가. 조성린 옹은 정말 실재하는 인물인가.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현시원(32)은 말한다.

‘천수마트 2층’ 공연 장면. 작품 해설사가 조성린 옹이 즐겨 그리던 백두산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  현시원 큐레이터 제공

‘천수마트 2층’ 공연 장면. 작품 해설사가 조성린 옹이 즐겨 그리던 백두산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 현시원 큐레이터 제공

“천수마트는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맞은편에 실재하는 상점입니다. 그 위층에 조성린 옹의 ‘서예·화랑’이 있어요.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잘 모르죠. 2008년에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흥미로운 그림들을 발견했어요.”

이후 현시원은 이곳에 가끔 들렀다. 조 옹의 귀가 너무 어두워 대화가 쉽진 않았지만, 지금은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가 됐다. 지난해부터는 수강생이 4명뿐인 그의 서예교실에도 다니고 있다. 현시원은 처음 어둑한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1919년에 태어나 1959~1960년대를 살아온 이의 그림임에도 ‘컨템퍼러리(동시대)’의 느낌이 있었다. “옛날 그림인데 마치 현대로 튀어나온 것 같고, 시간대가 공존하는 느낌”이었다는 것.

조 옹은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어릴 적 서당 훈장에게 서화를 배웠다. 회사원, 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지금 자리에서 20여년째 서예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이 아흔을 넘긴 그의 살림집이자 일터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신문을 펴놓고 돋보기로 해외토픽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며 창밖을 바라본다.

실제로 조성린 옹의 그림은 얼핏 조악해 보이지만, 기존 회화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자유롭다. 공연 해설사는 “원근법 무시, 색깔 무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복을 입고 말타는 이가 있는 그림에 UFO가 나타나고, 소 두 마리를 손에 든 남자가 그려진 같은 구도의 그림 두 장은 자세히 보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는 지나는 말처럼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모 협회로부터 전시를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사기를 당했다는 사연도 함께. 현시원은 그때부터 노화가와 ‘제3의 공간’인 천수마트 2층을 주목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전시’를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박길종은 노화가의 그림만을 위한 장치를 만들었고,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그의 그림은 까만 공간 속에서 잠시나마 빛을 발한다. 어둡고 불편하게 보이는 그림들은 실제 천수마트 2층을 닮아 있다.

공연 ‘천수마트 2층’은 그곳에 존재했던 한 노화가의 시공간을 재현하고 사라졌다. 현시원은 “지금 ‘천수편의점’으로 이름을 바꾼 천수마트는 곧 없어진다. 노화가의 공간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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