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선사 암각화와 고대 서예

2014.03.14 20:25 입력 2014.03.15 01:44 수정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세계사적 시작과 궤 같이하는 보편성·독자성 갖춰

우리는 지금 키보드 ‘치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불과 20~30년 만에 2000~3000년 역사의 붓글씨 ‘쓰기’ 문명이 뒤집혔다. 개개인이 직접 글자를 만들어 쓰다가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택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 글씨 그 자체로 간주되던 시대에서 기계가 인간을 만들어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변혁은 필연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를 전도시킨다. ‘치기 시대에 왜 쓰기인가’를 화두로 서예를 통해 우리 미학의 궤적 탐사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예의 시작은 말과 그림이다. 서예의 모태가 되는 글자는 말과 그림이 하나 되는 지점에서 그림문자로 탄생했다. 말 안에 애초부터 글자가 잉태되어 있었던 셈인데, 역으로 보면 말은 이미 머리 속에 내장된 문자라는 조형언어를 전제로 발화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글자의 탄생은 인간 자의식의 표출이자 서예의 탄생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미학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서화가 같은 뿌리로 구상과 추상이 한 몸이 되어 살아온 동아시아 한자문화권과 20세기에 들어서야 기존 구상과는 별개로 추상미술이 대두된 서구는 성격적으로 큰 대조를 이룬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부분. ‘은택(恩澤)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까지 떨쳤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일부 기사가 보인다. 역사시대 우리 미학의 기준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제시한 이 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으니 올해가 1600주년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부분. ‘은택(恩澤)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까지 떨쳤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일부 기사가 보인다. 역사시대 우리 미학의 기준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제시한 이 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으니 올해가 1600주년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구상과 추상, 즉 외형과 내면세계가 둘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세계 표출이나 대상의 객관적인 묘사가 필묵으로 글자 쓰기인 서예행위 하나로 다 해결되었다. 대상을 경계 짓고 사물의 윤곽을 묘사하는 것마저도 선이 아니고 획이다. 글자의 짜임새 이전에 필획 그 자체가 태세(太細·굵고 가늚), 장단(長短·길고 짧음), 지속(遲速·느리고 빠름), 농담(濃淡·진하고 묽음) 등 조형언어를 독자적으로 발화한다. 사람마다 다른 이러한 획질은 바로 붓과 먹이라는 도구에서 일차적으로 결정된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오늘날 키보드 ‘치기’의 맹점을 붓글씨 ‘쓰기’가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서화에서 미술로 전이된 20세기 한국미술에서 서예행위나 서예언어의 상실은 오늘 우리 미술의 정체성 상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미 살펴본 대로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의 1차적인 토대는 울주의 반구대 천전리나 고령의 양전동 등지에서 보이는 선사시대 암각화다. 서예미학의 관점에서 그림문자의 전신으로 고래·사슴 따위의 사실적인 그림과 동심원·마름모꼴 등 추상문양이 동시에 각인되어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모두가 다산이나 풍요를 빌며 태양이나 우주자연을 신으로 모신 사람들의 조형언어다.

2차 토대는 고조선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에 이르는 필적들이다. 전국시대를 거쳐 기원전후 한사군 설치에 즈음하여 이미 갑골문 종정문을 넘어 대전·소전으로 완성을 본 전서체 한자나 고예가 전래 수용되었고, 이것이 우리식으로 재해석되고 자기화된 시기다. 이때는 광개토대왕비문(414), 무령왕릉지석(523), 진흥왕순수비명(568) 등 삼국시대 글씨에서 보듯 이미 전서를 넘어 예서나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서체다. 발생 시점으로 보면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광토비’의 고예는 매우 보수적인 서체이지만, 그래서 북방민족의 대륙적이고도 힘찬 기질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미 한족이 중심이 된 남방의 동진에서 4세기 후반의 왕희지가 그렇듯 해서와 행서의 전형까지 세워내면서 운치의 글씨미학을 구가하고 있음과 비교해 볼 때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백제는 남북조 중심의 대륙 서예미학 변화를 가장 잘 받아 소화해낸 나라답게 시종일관 매우 다양하면서도 세련된 글씨를 구사했다. 한편 신라는 고구려 고예의 영향이나 중국 글씨의 직접 수용과 재해석으로 이들과는 또 다른 중도적인 미감을 가진 서예문화를 전개했다. 사상적으로도 이미 이 시기는 고유의 무속신앙 토대 위에 도교·불교·유교가 전래되어 글씨미학을 형성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때다. 특히 불교의 수용과 자기화 과정은 사경(寫經)과 인쇄문화의 융성으로 향후 통일신라 서예와 문자문화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토대는 고려, 조선의 서예나 인쇄문화를 견인했고 한글 창제처럼 세계사적 맥락의 문자문화 전개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쥐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의 3차 토대는 통일신라라 할 수 있다. 고신라의 강경하고 고졸한 미감을 토대로 왕법과 당나라 해서를 하나로 녹여냄으로써 김생체와 같이 원융무애한 화엄불국의 글씨미학을 유감없이 발휘해냈다. 바야흐로 이때를 전후해 비로소 해서의 전형이 제시되면서 동아시아 서예사적 맥락에서 서체 변화의 종결을 이루어냈고 미학적으로도 전형이 제시되었다. 특히 8세기 전후에는 당풍이 ‘해동서성’으로 추앙받는 김생이나 공해(空海)와 같은 일본의 선필(禪筆) 거장을 통해 나라마다 독자적으로 재해석된 때이기도 하다.

또 유불선 삼교회통의 풍류미학이 최치원을 통해 우리 문예미학으로 처음 제시된 때도 이 시점이고, 무구정광대탑다라니경과 같은 목판인쇄술의 보급으로 경전의 대량 유통이 실현되면서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이나 화엄석경처럼 사경 공양 본연으로 돌아가 글자를 쓰는 행위 자체가 종교가 된 때이기도 하다. 이미 이 시대는 이후 전개될 모든 서예 역사나 문자문화의 큰 기둥들이 세워진 때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고려에서는 선교(禪敎) 일치의 불교 서예미학이, 조선에서는 ‘서(書)가 사람이다’라는 심성론적이고 수양론적 측면의 유가 서예미학이 다층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미학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선사와 고대 서예미학의 존재 의의는 당연하게도 세계사적 시작과 궤를 같이하는 보편성과 독자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반구대의 선사 암각화는 동시대 유라시아 대륙과 동궤를 이룬다. 고래·사슴·샤먼 등 표현 대상이 지역마다 같고도 다르지만, 돌과 칼의 획과 면 새김을 토대로 한 조형언어 양식은 대체적으로 같다. 두 지역 사람들은 서로 만난 일이 없으면서도 동궤의 인지능력과 미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역사시대의 우리 미학을 글씨로 가장 웅장하게 열어젖힌 광개토대왕비문은 5세기 동아시아 고대서예 역사를 왕법과의 대척점에서 전개시켰고, 그 1차적 완성자로서 김생의 통일신라 서예의 조형미학은 전형적인 아름다움 속에서도 역동적이고 무쇠 같은 힘으로 동아시아 서예 역사를 주도했다. 이런 맥락에서 서예와 미술은 물론 가무까지도 첨단의 이름으로 융복합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예술이 근원적으로 찾아가야 할 미학이 어디인지는 더욱 자명해진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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