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 당선작 -거세된 인간과 진화한 뱀파이어의 생존조건

2009.01.02 17:57
부영우

<렛미인>에 대하여
대중문화평론 부문 / 부영우

[2009 경향 신춘문예]대중문화평론 당선작 -거세된 인간과 진화한 뱀파이어의 생존조건

1 괴물의 탄생

시퍼렇게 그을린 단칸방의 아랫목, 한 이불 속에서 군밤을 까먹었던 겨울밤을 기억하시려나. 단란한 가족 간의 훈훈했던 추억은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하나,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구질구질한 단칸방이 싫어서, ‘나만의 공간’을 소유하려는 것은 나를 비롯한 그 시대 소년들의 영원한 꿈이었지 않은가. 오죽하면 옛날식 화장실에 기어들어가 형의 책상서랍에서 훔쳐온 꽁초담배 따위를 꼬나물었겠는가. 냄새마저 얼어붙어 한―없이 적막했던 그곳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소년시절이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혼자일 수 없었으므로 고독할 이유가 없었고, 고독이 키우는 ‘내 안의 괴물’과 아귀다툼할 필요도 없었던 것.

우리가 체감하는 근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어쨌든, 어린이의 사적공간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낳은 수여물이다. 일터와 집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근대 이전에는 어린이는 물론이고 가족이란 개념조차 확정(確定)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터와 집의 분리는 사적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던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하인들과 주인들 간의 공간이 구분되고 도제(徒弟)로 나갔던 어린이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집의 공간은 분화되기 시작한다. 모두 한 공간에서 기능했던, 침실과 거실, 주방, 서재, 화장실까지. 그 기능에 따라 문이 달린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다. 부부를 비롯해서 어른은 물론이고 이제 어린이에게도 방이 주어진다. 물론 방이 많은 집에서만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각각의 방을 구분하는 벽과 문을 통해 방은 밀실(密室)이 된다. 이 밀실이 소설이라는 양식의 탄생과 부흥을 이끌지 않았는가. 물론, 그 어떤 것에도 반대급부는 있다. 어른들은 저마다 각자의 시간을 갖느라, 아동 또한 밀실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연스레 아동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아주 가끔은, ‘고독’하고, 이 고독을 달래주거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동은 스스로 싸워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처럼 ‘판’이라는 ‘괴물’을 찾아내 시간을 보내거나, <샤이닝>의 대니처럼 자신이 만들어낸 친구와 ‘샤이닝’을 나누거나 하면서. 이러한 여러 갈래의 놀이방법 중에서 어떠한 것을 선택하는 것도 역시 아동의 몫이다.

<폭력의 역사>에서처럼 아동이 악몽을 꾸고 나서 소리쳤을 때 어느 누구도 달려와 주지 않는다면, 아동은 자신이 만들어낸 친구 혹은 괴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 괴물은 끊임없이 변주하며, 어느 순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니기도 한다. 거대한 힘을 가진 괴물은 모든 창조자의 자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을 만들어낸 아동을 거스르기도 한다. <렛미인>의 이엘리를 오스칼이 만들어낸 상상속의 괴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동이 밀실에 혼자 남겨졌을 때의 고독과 공포에 관심을 촉구하는 것.

이엘리를 오스칼의 ‘강박적’ 자의식이 불러낸 망령으로 보는 것과 홀로 존재하는 뱀파이어로 보는 것 중 어느 한쪽 편의 손을 들어야 하는 가치판단은 무의미한 것 같다. 설령 뱀파이어가 현재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북유럽에서 전승되고 있는 일종의 신화적 사고가 분명하고, 신화적 사고라는 것은 허구가 아닌 ‘처음에 일어난 일’로 보고 이성적 사고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대의 일들에 대한 원형적 근거가 되는 것을 보아왔지 않은가. 사실 뱀파이어의 일족인 흡혈귀는 인간 세상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라미아(Lamia), 셈족 전설의 릴리투 등의 전설 속 살인광을 비롯해서, 현대 뱀파이어 신화의 모태가 되었던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와 피의 백작부인 바토리까지. 흡혈귀에 대한 신화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살인마’에 대한 공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포르피린’이라는 질병에 걸리면 빛에 극도로 민감해지고, 치아가 갈색이나 적갈색으로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과거의 의사들은 이 병에 걸린 귀족들에게 아랫사람들의 피를 마시라고 권했다니, ‘흡혈귀’는 “황당무계한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포르피린의 원인 중 하나가 ‘성호르몬의 불균형’인 것에 비추어 보면, <드라큘라>의 중성적인 매력이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이엘리 역시 포르피린에 걸린 환자였다고 가정하면, 하칸의 살인은 병에 걸린 딸에 대한 아버지의 비정상적 사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단지 그녀가 운동능력이 ‘많이’ 뛰어난 소녀였다고 하면, 그녀가 가진 여러 신비로운 요소들이 되레 쉽게 이해가 된다.

어찌됐든 이엘리는 <렛미인> 속에서 뱀파이어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위와 같은 논란은 일단락시켜야겠다. 이엘리는 우선 뱀파이어―어쩌면 포르피린 환자일지도 모를―이고, 동화에서처럼 그녀가 소년 오스칼의 또 다른 자아를 은유한다. 이쯤에서 정리하면 좀 ‘아슬아슬’한가. 그래서 이 영화를 ‘뱀파이어 동화’라 규정하지 않았는가.

[2009 경향 신춘문예]대중문화평론 당선작 -거세된 인간과 진화한 뱀파이어의 생존조건

2 밀실의 공포의 변증법

문이 닫혀있음으로써 방은 밀실이 된다. 이제 방에 남은 것은 창. 창밖의 어둠 속으로 잔뜩 옹송그리며 눈이 내리고 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눈송이는 물방울같이 보글거리다 이내, ‘터져’버릴 것 같다. <렛미인>의 프롤로그다.

오스칼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때 창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우선은 밖을 내다보기 위함. 창은 닫혀있을 때 외부와의 동선을 차단하기는 하나, ‘문’과는 달리 투명하므로 외부로부터의 시선은 차단하지 않는다. 하칸이 오스칼의 옆집으로 이사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창에 종이를 바르면서 시선·빛을 차단하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는 창의 기능은 거울의 역할. 창에 비친 주체는 거울에 비친 주체보다 한층 더 왜곡되어 보인다. 외부환경과 오버랩되면서 주체 자체가 흐릿해지기도 하고, 표정과 몸태마저 명확하지 않게 보인다. 속옷차림으로 창문에 비친 오스칼의 모습은 사뭇 위태로워 보인다.

오스칼의 방은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는 벽지로 꾸며져 있는 밀실이다. 그가 침대에 누워있으면 마치 숲에 고립되어 있는 거인쯤으로 보인다. 반면 이엘리의 방은 도배를 하지 않은 하얀 벽면 그대로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주방은 파란색, 식당은 빨간색, 화장실은 하얀색이며 각각의 공간이 생산, 소비, 배설의 공간을 뜻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엘리의 집은 보통의 집과는 다른 기능을 한다. 생산 공간인 주방은 살해도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바뀌며, 배설의 공간인 화장실과 욕조는 이엘리가 쉬기 위한 재생의 공간으로 바뀐다. 어찌 보면 마찬가지로 보이기도 한다. 이엘리에게 살인은 자기 생존을 위한 생산행위이며, 인간의 배설 역시 재생을 위한 것이므로. 이엘리의 방이 오스칼과 신호를 교환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열려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엘리의 유일한 사적공간이자 밀실은 화장실의 욕조로 보아야 한다. 종이에 투과된 빛의 영향이겠지만 붉은 빛이 나는 어둠의 밀실. 이엘리의 공포는 되레 여기서 시작되고 그것은 존재론적인 공포로 보아야 한다. 홀로 다른 존재로 놓여있다는 이질감 말이다.

사적공간인 방은 어느 개인과 타인을 단절시키므로 필연적으로 방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발생시키게 마련이다. 시각적으로는 창이, 청각적으로는 벽이 그 기능을 담당하는데, 하칸이 창 너머로 소변을 보는 사내를 내다보는 장면과 고양이 사내가 테라스에서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장면 등은 창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성적인 것으로 연결하자면 ‘관음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시선은 범죄의 전조(前兆)이며, 결과적으로 내·외부적으로 공포를 발생시키는 시선이다. 외부의 개체는 내부에서 외부로 흐르는 시선―설령 그것이 실재하지 않을 때에도―을 의식해야만 하고, 그것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밀실이 있으므로, 이제 어느 개인도 관측자가 될 수 있고 그 자신이 관측대상이 될 수 있다. 어느새 실재(實在)의 밀실이 내면화되어서, 인간 자체가 하나의 밀실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 때문에 관음적 시선과 공포가 인간을 원초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들어가게 해줘”라는 이엘리의 주문은 벽의 소멸, 나아가 사적공간의 소멸을 의미한다. 사적공간의 소멸은 밀실의 내부에 있었던 아동에게는 공포를 덜어주는 것으로, 오스칼이 자연스레 이엘리에게 끌리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또한 오스칼이 이엘리에게 건넨 ‘루빅스 큐브’와 같은 층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큐브는 공간이 구획되고 위치가 고정된 정글짐과 달리 각 공간 간의 이동이 자유롭다. 어느 한 면을 통일시키겠다는 목적의식만 없다면, 어느 곳으로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한 “정글짐에서 왔다”고 하는 이엘리의 말은 이동이 어려운 뱀파이어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엘리가 큐브의 모든 면을 맞추었다는 것은,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다른 그녀만의 ‘공간소멸능력’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멩거의 스펀지’처럼 끊임없이 자기 공간을 소멸해 나가는 방식으로 무한한 표면적을 획득하지만 부피는 제로인 자유로운 존재! 따라서 참을 수 없이 무겁고도 또한 가벼운 존재!

<렛미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화면구성 중 하나는, 공간이 분화되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반대편의 인물들이 모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체육관에서 하칸이 ‘임무’에 실패하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염산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보자. 소년을 구하기 위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의 동료들은 하칸이 벽을 사이에 두고 숨어있는지 모른다. 또한 요케가 연인의 복수를 위해 이엘리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식탁 밑에 숨어든 오스칼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결국 그 때문에 복수에 실패하게 된다.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자작나무도 서있는 그 몸태만으로 장면을 분할하는 역할을 한다. 공간은 곧 정보이며 정보는 자본으로 귀속된다고 할 때, 공간의 소멸은 자신의 잉여자본에 대한 손실을 의미한다. 즉 타인과의 관계는 자신의 잉여가치를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스칼과 이엘리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호보완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너의 공간을 포기해라. 나의 존재를 줄게?”

3 근대적 가족형태의 재분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 이 세 가지 항목은 가족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다. 가족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인 친자관계(親子關係)는 가족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축이며, 가족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위계가 조직되는 수직적인 축이다. 이처럼 근대의 전형적인 가족형태인 핵가족이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분화한다.

<렛미인>에서 보이는 가족형태는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과 그 형태가 다르다. 오스칼과 그의 어머니, 혹은 이엘리와 하칸 간의 편모·편부 가구를 비롯해서 고양이 사내만의 독거노인가구, 이엘리에게 물린 여자와 그의 연인 간의 노년부부가구, 오스칼의 아버지와 그의 연인 간의 동성부부가구, 오스칼을 괴롭히는 소년과 그의 형 간의 소년가장가구까지. <렛미인>의 세계에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정상적인 구조를 갖춘 형태의 가족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렛미인>의 모든 가족형태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이기적 개체로서의 가족형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 잇기’의 강박이 사라진 가족형태로 볼 수 있다.

‘대 잇기’의 강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한 곳에 머물러 인간과 관계를 맺는 여러 영적인 존재도 그 형태를 달리한다. <샤이닝>에서 잭의 신경증을 불러오는 것은 폐쇄공포가 불러일으키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신경증과 더불어 친자살인의 광기를 일으키게 하는 데에는 호텔에 머물고 있는 지박령(止泊靈)들의 역할이 컸다. 호텔의 영(靈)적인 존재들은 한 공간에 영원히 머무르고 인간에게 작용하면서, 희생자를 자기 그룹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대 잇기’에 성공한다. 한 공간에 머무르는 영적인 존재와 그 공간을 공동으로 향유하는 인간 간에는 피할 수 없는 적대관계가 형성되고, 따라서 그 공간에는 담론과 역사성이 생겨난다. 반면 ‘대 잇기’의 강박이 사라진 <렛미인>의 세계에서는 영적인 존재 또한 대를 잇기 위해 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해 이동하는 영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뱀파이어의 클리셰를 따르면 뱀파이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관과 무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렛미인>의 이엘리는 욕조와 상자라는 빛이 들지 않는 이동수단에 적응함으로써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동하는 뱀파이어에게는 역사와 이데올로기가 생겨날 수 없다. 오스칼과 이엘리가 떠나고 나면, 그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 뱀파이어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아는 인물은 이제 수영장의 생존 어린이와 고양이 사내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이는 어린이라는 점과 사건 당시의 충격으로 객관적인 목격자가 될 수 없다는 점으로, 또한 고양이 사내는 다소 강박증 환자로 보여 과대망상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에서 목격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제 목격자가 없으므로 뱀파이어의 살인은 그 어떤 프로파일링 기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미해결 연쇄살인사건’으로 남게 된다.

<렛미인>이 사회적으로 작용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이것인데, 영화에서 사회적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은 학교에서의 ‘왕따’ 문제, 독거노인문제, 동성애 문제, 살인 사건, 혼혈문제 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지점에도 당사자 이외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없다. 그저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뿐, 사회적으로 파급할 수 있는 힘을 갖지 않는다. 유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잃고 복수를 위해 이엘리를 찾아갔던 사내뿐이다. 이 사내의 복수 역시 실패로 끝나면서 과거의 장르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영웅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모든 영화의 서사가 사회적으로 작용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는 따돌림 당사자의 정신적 공황상태를 ‘표현주의’적인 형태로 혹은 반대적인 의미에서 너무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어서, 관계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인간의 존재론적 공포에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물안개가 깔린 막막한 자작나무 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소년. 눈과 자작나무의 흑백 속에서 스며 나오는 선명하다 못해 선연하기까지 한 피의 줄기. 피와 적막이 공포로서가 아닌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감독의 탁월한 미적감각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공포가 아름다움의 어떤 철학과 맞닿은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 반대로 우리가 관찰자이므로 당사자들의 공포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위에서 내가 주장한 대로 밀실이 공포를 낳았다면, 밀실은 경제적인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공포 또한 어떤 여유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렛미인>의 노동하지 않는, 여유로운 사람들에게서처럼 말이다.

그들은 어쩐 일인지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답지 않게 노동을 하고 있지 않다. 우선 오스칼의 아버지를 보자. 과거의 가족형태, 그것이 핵가족이라고 해도 가정의 경제적 생산주체는 주로 아버지였다. 그것이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더라도 아버지는 최소한의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오스칼의 아버지는 노동과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 자,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아버지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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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세된 아버지와 고양이 사내

프로이트의 ‘실험 양’ 한스를 기억하는가. 프로이트는 한스의 말(馬)에 대한 공포를 두고 자신에 비해 거대한 성기를 가진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같다고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콤플렉스는 비단 한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 다수의 유아들이 그러하다고. 비록 연령도 층위도 상이하지만, 이 이야기를 오스칼에게 적용시켜본다.

오스칼은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매양 무던하게 반응한다. 친구들이 그의 바지를 젖게 해서 반바지 차림으로 눈길을 걸어가는 와중에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친구들에게 맞아 얼굴에 생채기가 났어도 어머니에게는 길에서 넘어졌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가 원래 그렇게 무던한 성격인가 싶기도 하지만, 혼자 남겨졌을 때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을 표출하는 것을 보면 되레 기괴하다. 한밤중, 창문에 자신의 벗은 몸을 비추어보며 괴롭히는 친구의 역할을 대신해보거나, 자작나무 줄기를 칼로 찌르면서 “죽어, 죽어” 소리치거나 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동경이라도 하듯, 그들 그룹을 멀리서 지켜보기도 한다. 어쩌면 오스칼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왕따’를 당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아니라, 또래 집단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오스칼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와 그의 형을 보면서, 자신에게도 든든한 존재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는다. 오스칼에게는 형제가 없으므로 당연히 그 사람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주말에 아버지의 집에서 그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스칼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아버지의 빨간 스웨터를 걸쳐입고 그의 카메라를 만져보며, 그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본다. 그러나 오스칼과 ‘어머니’를 두고 다투어야 할 아버지는 더 이상 ‘거대한 성기’를 지닌 자가 아니었다. 오스칼과 그의 아버지가 장기를 두고 있을 때 집으로 들어온 한 사내를 향한 아버지의 끈적끈적한 눈빛을 보았는가. 추측하건대 이러한 이유로 오스칼의 부모가 별거 내지는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라이벌이 되어야 할 아버지가 이제 어머니를 대상으로는 발기하지 않는 거세된 남자였으니, 오스칼에게는 그의 오이디푸스적 콤플렉스를 투사할 공간이 없다. 나는 이 지점이 수용자로 하여금 여러 갈래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오스칼에게 오이디푸스의 구조에서 그의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라고 보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의 라이벌은 아버지의 연인인 그 맨발의 사내인 것.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강박이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결국은 성적인 ‘이끌림’마저도 그렇게 흐르는 것은 아닌지. “사내를 죽이고 아버지와 자려해서는 안 된다”는 ‘이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물론 12세에 불과한 아이의 성적 코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렇다. 원작의 성적 코드를 지우려 했다고는 하나, 되레 그런 요소들이 에둘러 감추어져 있어서, 단순한 아이들의 사랑 놀음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많다. “아름다운 동화를 가지고 무슨 변태적 상상력!”이냐고 공격할 것이 분명하므로 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아이의 미래의 성적 취향이 아닌 그 자신의 성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년, 소녀들이 그렇다는 말! 12세라는 나이. 이제 열 두 개의 간지의 한 주기를 지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나이가 아닌가. 두 개의 성을 동시에 소유한 양성인이다. 양성은 또한 선과 악을 동시에 의미한다.

가령 수영장 장면에서. 오스칼은 자신을 괴롭히는 그룹의 곱슬머리 소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 소년 또한 이제 괴롭혀야 할 친구와 음악에 맞추어 에어로빅을 한다.

물론 이것을 곱슬머리 소년의 가학적인 취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엘리가 가장 거칠게 복수한 대상이 곱슬머리 소년인 것을 보면 다른 소년들에 비해 이 소년에게 느끼는 배신감의 강도가 가장 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오스칼이 오히려 여성적인 외양으로 등장하고 이엘리의 경우 남성적인 외양으로 보이는 것은 오스칼과 이엘리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성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떠난 가정에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마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박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나면, 더 이상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가장 강력해야 할 존재인 아버지가 이미 거세되어서 힘을 잃었다고 한다면. 거세된 아버지에 대한 영화인 <하류>에서 아들은 거세된 아버지와 결합하는 다소 파괴적인 방식으로, <메종드히미코>에서는 거세된 개체로서의 아버지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아들과 거세된 아버지 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바 있다. 오스칼의 경우,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뱀파이어 소녀를 향한 부성적 사랑-사탕을 먹고 구토하는 이엘리를 안아주는 장면-으로 대신하고, 또한 이러한 사랑은 오스칼의 도플갱어처럼 보이는 하칸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보기엔 다소 기이한 모습들. 많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하칸을 오스칼의 미래로 본다면, 이엘리와 오스칼이 함께 떠나는 ‘헤피엔딩’이 가장 커다란 슬픔을 암시하게 된다. 사랑하는 뱀파이어를 위해 자신의 목을 내미는 최후의 순간. 하칸이 소년으로 한정하여 살인을 하는 것도 오스칼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른보다 살해하기 용이하다면 소년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소녀를 죽이면 간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아이들을 골라 죽이는 것은 여러 범죄자들이 그랬듯 특이한 성적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양이 사내의 경우. 이 영화의 구조는 링 컴포지션의 반복된 구조 이외에 다른 층위의 동심원 구조를 갖고 있다. 오스칼의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 하칸처럼 이엘리의 심복이 되는 것이라면, 그보다 먼, 혹은 다른 차원의 미래는 고양이 사내처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자리에서 이엘리를 밀어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뱀파이어의 클리셰를 다시 끄집어내어 박쥐의 모습으로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뱀파이어를 상상해보라. 사내가 키우는 고양이들이 뱀파이어에게 물려 뱀파이어의 성질을 가진 여자를 무는 것은,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고양이와는 천적관계임을 증명한다. -박쥐는 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포유류이긴 하지만- 여기서, 사내의 고양이를 기르는 편집증을 일으키는 것이 유년의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프로이트 식의 ‘단순무식’한 논리로 적용시켜보자. 그렇다면 고양이 사내가 어린 시절에 뱀파이어와 관련해서 아픈 기억이 있었다는 뜻? 오스칼과 같이?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서사를 편집증 환자인 고양이 사내의 ‘신경증 치료 서사’로 보는데, 이렇게 보면 좀 지나친가? 뭐, 안될 것도 없지 않은가.

5 인간의 조건과 뱀파이어의 조건

프로이트와 라캉 식으로 인간의 조건을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에서 찾는다면, 아직 상상계에 머물러 ‘괴물적 존재’와도 같았던 아동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려해서는 안 된다”라는 근본적 금지의 체계를 내면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상징계, 즉 인간의 질서에 편입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뱀파이어에게도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금기가 있을 것이다.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뱀파이어에 관한 클리셰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고, 빛을 보면 죽게 되며 마늘 냄새와 은 십자가를 싫어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렛미인>의 뱀파이어인 이엘리는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과 빛을 피해 낮엔 관속(욕조)에서 잠을 자야 한다, 라는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소녀 뱀파이어 특유의 조건을 새롭게 부여받는다.

이엘리가 뱀파이어로서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은 뱀파이어 동료가 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12세의 소녀라는 신체적인 약점과 관련해서 전제된다. 이엘리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과 ‘관계 맺기’를 한 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피를 구해 오도록 한다.

인간과의 ‘관계맺음’은 자신이 직접 살인해서 피를 구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하다. 즉, 12세의 소녀 뱀파이어 이엘리의 생존조건은 인간과 관계맺음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법칙은 하칸이 살인에 실패해서 피가 들어있는 통을 이엘리에게 가져오지 못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제 비로소 이엘리는 자신의 생존규칙을 깨고 직접 살인에 나선다. 자기 자리의 이탈은 피를 마시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공포이자, 삶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생존투쟁인 셈이다. 이엘리가 스스로 거리로 나서게 됨으로써 역으로 오스칼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진전을 보인다. 즉, 뱀파이어의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오스칼과의 ‘관계맺음’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오스칼이 이엘리에게 “우리 사귀자”라고 말했을 때, “변하는 것이 없으면 사귀자”라고 대답하는 것에서, 뱀파이어로서의 자신의 생존조건 안에서의 관계맺음에 한에서 둘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엘리가 자신의 생존을 위함이라는 다소 기만적인 형태로 인간과 ‘관계맺음’하고자 했다면, 하칸 이후의 새로운 메피스토펠레스를 구하고자 했다면, 힘없는 소년이 아닌 피를 구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성인과 ‘관계맺음’하는 것이 더 유용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오스칼이 성장할 때까지 이엘리는 자신이 직접 살인하고 피를 구해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엘리는 굳이 소년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자 ‘뱀파이어로 사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고독의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뱀파이어와 소녀와 인간 소년과의 ‘동화적 에로스’가 탄생한다.

이엘리는 하칸이 죽고 난 이후에, 그녀의 존재를 아는 유일한 인간이자 그녀와 동질적인 존재인 오스칼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바닥에 떨어진 오스칼의 피를 핥는 가장 치욕적인 방식으로. 그 이후로 오스칼이 그녀를 멀리하자, 그녀는 되레 오스칼에게 관계를 구걸한다. 오스칼이 집으로 찾아 왔을 때 오스칼에게 돈을 주려고 한 장면과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식품인 반지를 보여주는 장면. 이는 오스칼과 이엘리 간의 관계역전을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엘리가 오스칼에게 관계를 구걸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생존을 위해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랜 세월동안 뱀파이어로서 혼자였기 때문에, 혼자인 것이 얼마나 두렵고 불행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칸의 소식이 텔레비전을 통해 들려올 때까지, 하칸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과 그 막막한 공기를 견딜 수 없어하는 이엘리. 따라서 자신과 같이 외톨이인 오스칼을 향해 측은한 감정을 느끼고, 그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엘리는 그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돌연변이 뱀파이어다. 반드시 인간과 관계를 맺어야만 뱀파이어로서의 조건이 갖추어진다. 오스칼 역시 이엘리를 상자 속에 담고 살아감으로 인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이엘리와 오스칼의 삶은 필연적으로 갈래가 다르며 그 때문에 이 서사가 허무와 페이소스를 유발한다.

어찌됐든, 이엘리가 오스칼보다 오래 살아갈 것이 분명하므로. 그리고 어느 때에, 오스칼의 자리를 누군가가 대신할 것이므로.

모든 것은 오스칼의 선택에 달렸다. 그의 갈라진 운명은 <렛미인>에 모두 있다.

하칸처럼 가슴속 괴물을 드러내고 연쇄살인마·소아성애자·정신병자로 살아갈 것인지, 고양이 사내처럼 가슴속 괴물을 밀어내고 편집증 환자처럼 살아갈 것인지, 그 자신이 뱀파이어가 될 것인지를 오스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오스칼이라는 이름자체가 강박적이고도 슬픈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양철북>의 오스칼처럼.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개 같은 내 인생>의 잉마르처럼 살아가는 것이 ‘구질구질’한 우리네 삶을 닮아 있는 것이 아닌지. 비록 그 모습이 아름답진 않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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