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부문 당선작 | 인아영 ‘유토피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박민정론)’

2018.01.01 20:47 입력 2018.01.01 20:48 수정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자, 이제 내 몸은 이 모든 유토피아들 덕분에 사라졌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1)

1.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나라. 그것을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푸코는 토머스 모어가 그리스어 ‘ou-(없다)’와 ‘toppos(장소)’를 합쳐 만든 이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푸코에게 유토피아란, 다른 공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실제의 장소인 헤테로토피아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지도 위에 위치 지을 수 없는, 그래서 어떠한 이의제기도 할 수 없는, 장소 없는 장소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무력하며 나를 품지 못한다. 유토피아가 존재하면 내가 사라지고, 내가 있으면 유토피아가 없어진다. 다만 유토피아는 거울로 기능하여 나를 비출 수 있다. “거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2)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가상적인 공간,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다.

오늘날 한국 사회라는 공간은 어떨까. 유토피아와 한참은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 공간에서 우리는 온갖 혐오와 폭력이 한데 뒤엉켜 있는 장면을 본다. 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화장실에서 칼에 찔려 죽는 모습을, 상사에게 몰래카메라 범죄와 성폭행을 당한 여자 직원이 오히려 감봉 징계받는 모습을, 평범한 직원이 일방적으로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사무실로 발령받아 근무하는 모습을 본다. 이러한 끔찍한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소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유토피아가 거울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가상의 유토피아를 전유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뒤집고 비트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현실의 민낯을 다각도로 비추는 일이 아닐까. 결국 독자로 하여금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 있는 나’까지 보여주는 일 아닐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최근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온갖 혐오와 폭력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좇아, 우리가 없는 곳에 있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에 있는 우리를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바로 박민정이다.

2. 여성들의 희미한, 혹은 지연되는 연대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2014) 이후 3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박민정의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2017)3)에는 전작과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 이제 온갖 폭력에 휘말리는 여성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예쁘지는 않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인 젊은 여학생과의 연애”만 공략하는 유부남 교수에게 농락당한 여대생(‘생시몽 백작의 사생활’), 남자친구가 “임신한 줄 모르고 아랫배를 걷어찼는데 그만 유산한 여자”(‘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사촌오빠로부터 “너희 엄마, 아빠가 이렇게 해도 된다고 했어”라는 말을 들은 여자아이(‘옛날 옛적 미국에서’)는 더 이상 혼자 방에 웅크려 있지 않는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에게 새겨진 폭력의 흔적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박민정은 고립된 이들을 바깥으로 끌고 나와 자신과 비슷한 흔적을 가지고 있는 다른 여성을 문득 발견하도록, 그래서 그들과 닿을 수 있도록 이끈다.

‘당신의 나라에서’를 보자. 유학생인 부모를 따라 소비에트 레닌그라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홍유나는 대학교에서 미학을 졸업하고 사진작가 데뷔를 앞두고 있다. 어느 날 그녀에게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연방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윤지나가 메일을 보내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폭력의 기억을 되살린다. 홍유나 부모의 러시아어 과외선생이었던 윤지나는 그들 부부의 친구에게 강간을 당했지만 사과를 받기는커녕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친구의 처벌을 위해 애쓸 수는 없다는 차가운 말을 듣는다. 한편 홍유나 역시 유모로서 자신을 돌보아주던 윤지나의 어머니에게 학대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그곳에 대해 기억나는 바가 거의 없다”(123쪽)고 말하면서도 당시에 아끼던 토끼 인형을 안고 찍은 사진을 소재로 삼은 작업을 기획할 만큼 레닌그라드의 유년 시절에서 받은 어두운 상처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윤지나의 메일을 받은 이후 학대당한 경험을 직면하기로 한 홍유나는 윤지나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라이너스의 악몽에서 깨어났고, 당신의 나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152쪽)

한편 ‘행복의 과학’과 그 프리퀄인 ‘A코에게 보낸 유서’의 여공 박영희는 홍유나에 비해 좀 더 많은 여성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자신을 창고에 가둔 남자에 의해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박영희는 간신히 남자를 때려눕히고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지만 사람들은 “다들 그래도 폭력을 쓴 건 잘못”이라고 말하거나,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언니’ 최영은만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

“이렇게 매미가 울면 매미가 운다고 쓰면 되는 거라고 언니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네가 보고 듣고 느끼는 걸 날마다 적어봐. 백지와 이야기 나누듯이 말이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걸. 언니가 노트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 마지막에는 귓속말로 나직이 속삭여주었다. 뭐든 자세히 기록해두면 불리할 때에도 도움이 돼. (…)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순간 아저씨를 때려눕히지 않으면 내가 먼저 목 졸려 죽을 것 같았다. 언니는 웃으며 말해줬다. 잘했어. 잘했어. 아예 거시기를 발로 차버리지 그랬니. 내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었다.”(‘A코에게 보낸 유서’, 77쪽)

박영희에게 “잘했어. 잘했어.”라고 격려해주는 언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꿈에는 ‘언니’가 준 책에서 본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조선학교 여학생이 나타나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같은 소설에서 박영희와 최은영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하나와 수영의 사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영희가 남겨놓은 일기를 세심하게 읽어낸 편집자 하나는 회사 비밀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창고 같은 사무실에 격리된 상사 수영이 자료를 찾고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을 쉽사리 “희미하지만 굳건한 여성 연대의 장”4)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들 각자에게 새겨진 폭력의 상흔은 서로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겹쳐지거나 합일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나라에서’의 홍유나는 “간헐적으로 도착했고, 주기도 일정하지 않”은 윤지나의 메일에 답장하는 것을 계속 미루며 “읽었음에도 답장하지 않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 숙고”(150쪽)하는 것조차 회피한다.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의 박영희 역시 최영은이 경찰에게 연행된 이후 더는 만나지 못하며 최영은으로 짐작되는 여대생이 수사 도중 성고문 사건을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서도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108쪽) 알지 못한 채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하나와 수영의 관계 역시 수영이 사무실로 복귀하기까지 적극적으로 한 일이 없다는 하나의 깨달음에서 멈추고 만다. “서로 상처 주는 순간이 있어도 친구가 되어야 하는 까닭을 나는 이제 알 것 같아요.”(107쪽) 하나는 이 말이 수영에게 언젠가 가닿기를 바라지만, 소설 속에서 하나가 이 말을 수영에게 직접 전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박민정 소설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다만, 성폭력과 여성혐오라는 비슷한 폭력을 겪은 이들의 연대는 편지나 메일을 통해 희미하게 나타나거나 끝없이 지연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연대를 최종적인 지향점으로 삼고 애써 그 흔적을 찾아내기보다는 박민정 소설이 왜 확실한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지 않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먼저 이렇게 질문해보자. 여성들의 연대가 미뤄지는 동안 이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3. 여성혐오를 서사화하는 한 방식

비슷한 폭력을 겪은 피해 여성들과의 연대가 미뤄지는 동안, 인물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폭력의 구조를 인지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들이 겪는 폭력은 현재의 시점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현재 시점의 인물이 과거에 발생했던 폭력 사건을 깨닫고 곱씹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다시 말해 박민정의 소설 속에서 폭력의 사태는 있는 그대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의해 한 차례 성찰을 거친 채 사유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인물이 주관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폭력 사건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파악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5)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에서 편집자 하나는 ‘행복의 과학’이라는 종교에 빠졌던 일본 소년 기노시타 류가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류의 이야기>의 편집을 맡게 되면서, 자신의 배다른 오빠인 기노시타 미노루가 1991년에 한국인 여성인 박영희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신의 나라에서’의 홍유나 역시 윤지나의 메일을 받으면서 자신이 유년 시절에 보모에게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윤지나가 1990년대 초중반에 자신의 부모님의 친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으며 부모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에서 하나와 홍유나가 폭력을 마주하는 방식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태를 지켜보거나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류, 박영희, 윤지나라는 전달자의 언어에 의해 이미 한 차례 정제된 폭력 사건은 책, 일기, 메일이라는 객관적인 문자 형식을 통해 인물에게 경험된다.

이들의 깨달음이 폭력 사건이 벌어진 지 한참 후에 우연한 계기로 찾아오며 그 이후의 과정이 소설의 서사를 이룬다는 사실은, 박민정 소설의 초점이 ‘누가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라기보다 ‘폭력을 어떻게 의미화하느냐’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십여 년 전에 발생한 폭력 사건을 알게 된 하나와 홍유나가 그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소설을 추동해 나간다. 이때 폭력의 의미화라는 과제를 짊어진 인물이 깨닫는 것은 폭력 사건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자신이 거대하고 촘촘한 폭력의 구조 속에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박민정의 소설에서 부각되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나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부지불식간에 혹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폭력이라는 연쇄적인 구조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앎이다.

“하나는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저 지독한 농담일 뿐이라고 여겨보려 해도, 세상에 공개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죽기 하루 전날까지 일기를 썼을 박영희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공개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가해자의 배다른 동생인 자신이.”(‘A코에게 보낸 유서’, 86쪽)

따라서 박민정의 소설이 겨냥하는 바는, 근래에 여성혐오를 다루는 다른 작가들의 소설이 성실하게 겨냥하고 있는 효과6), 즉 피해자를 위로하거나 가해자를 고발하는 효과에 있지 않다. 물론 이는 그녀의 소설이 위로나 고발의 효과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하려는 것은 박민정 소설이 피해자의 참혹한 심정에 공감하거나 가해자의 죄목을 가려내어 폭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학적 기능에 도달한다는 것이다.7) 그 문학적 기능이란 바로, 폭력의 연쇄적인 구조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떠한 겹겹의 ‘구체적 조건’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 소설적 형상화를 통해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의 ‘구체적 조건’이란 한 개인을 가로지르는 국가, 세대, 계급, 성별이라는 다층적인 사회적 지표들이다.

이는 특히 여성혐오 및 그에서 비롯된 폭력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문제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다. 오늘날 페미니즘 문학의 최전선을 달리고 있는 강화길은 호숫가라는 스산한 공간을 배경으로 남자친구에게 폭력을 당한 여자와 그를 의심했다는 이유로 똑같은 위협에 처하게 된 다른 여자를 겹쳐놓으며(‘호수―다른사람’), 조남주는 198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태어난 여성이라면 성장과정과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차별과 부조리를 그려내는 방식(<82년생 김지영>)으로 여성혐오를 다룬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여러 인물들의 공통적인 서사를 포개놓는 동일화의 문법으로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력을 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폭로한다. 특히 남성에게 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그린 강화길의 ‘다락’의 서사적인 효과를 단적인 예시로 들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들은 “어떤 여자”, “그 여자”, “그녀”라고 호명되며, 이를 통해 소설은 이들 중 누구의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동시에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포개는 효과를 유발한다.8) 이로써 여성들이 각자 사회에서 겪어왔던 폭력과 부조리의 경험들은 하나의 서사로 맺어지고, 공유되고, 환기된다.

그러나 최근에 한 비평가가 지적했듯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담론은 “피해자를 여성으로 고착시키는 논의로 되돌아올 위험”을 내재할 수 있으며, “‘남성연대를 위한 여성의 대상화’ 과정 자체를 끊임없이 입증해내는 단일한 회로”9)로 비칠 가능성을 안는다. 이를 고려한다면, 박민정의 서사 전략은 여러 여성 인물들을 젠더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는 대신 국가, 세대, 계급이라는 다층적인 조건들의 차이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여성의 대상화 혹은 피해자화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소설을 지탱한다. 또한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을 젠더라는 하나의 조건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들이 가진 여러 조건의 차이를 부각하는 방식은 여러 겹의 조건들 속에 살아가는 ‘사회적 개인’10)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동시에, 페미니즘 운동이 젠더 문제에만 함몰될 경우 사회경제적인 차원과 유리될 수 있다는 낸시 프레이저의 지적11)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미뤄지는 동안 이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자.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의 박영희와 최영은, 하나와 수영,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의 홍유나와 윤지나의 연대가 지연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폭력의 연쇄적인 구조 속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갔음을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박영희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언제든지 힘센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할 수 있는 나이 어린 여공이라는 점뿐만이 아니라, 엘리트 대학생인 ‘언니’와 같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편 홍유나가 깨달은 것은 유년 시절 보모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풍요로운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가진 부모를 두지 못한 레닌그라드의 고려인 윤지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박민정 소설에서 여성들이 여성혐오라는 폭력에 시달린다는 공통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연대하는 결말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의 실존을 가로지르는, 그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조건들이다. 박민정은 이러한 차이들을 봉합하지 않고 이들이 쉽사리 발맞추어 걸어가지 못하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우리의 눈앞에 제시하며, 젠더 불평등 프레임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국가, 계급, 세대라는 복잡한 사회적 문제까지 정확하게 짚어낸다.

이러한 겹겹의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소설이, 작품집 <아내들의 학교>에 수록되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세실, 주희’다. 명동의 쥬쥬하우스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주희는 가수 유노윤호가 좋아 한국으로 왔다는 일본인 직원 세실에게 한국어 과외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일요일 오후마다 세실의 한국어 능력 시험 준비를 돕게 된다. 그러나 주희는, 한국 여자들은 성형을 많이 한다는 말을 쉽게 던지고 남자인 친구가 멀리서 주희를 보고 예쁘다고 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세실을 보며 거북한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세실의 할머니가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참전한 소녀군대 ‘히메유리 학도대’ 출신이며 세실이 할머니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희는 무시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더구나 뉴올리언스의 펍에서 남자들이 자신에게 가슴을 보여 달라고 외치는 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왔다는 기억과, 일본이 자행한 전쟁이 겹쳐지면서 주희의 괴로움은 더욱 심해진다.

‘세실, 주희’는 앞서 제시한 박민정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있었던 폭력의 경험이 현재의 시점에서 상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는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세실과의 만남을 통해 주희가 자신을 가로지르고 있는 국가적, 세대적, 성별적 조건을, 즉 자신이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한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1993년에 태어난 여자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1954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여학생들을 인솔해서 명예롭게 자결하신 우리 할머니, 사쿠라코 할머니의 군대 ‘히메유리 학도대’”(187쪽)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세실의 일기를 곱씹을수록 주희에게 선명해지는 것은, 자신이 그러한 말을 마음 편히 듣고 넘길 수 없는 조건, 즉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겪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조건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평화집회를 보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는 세실의 눈빛은 주희의 시선과 만나지 못한다. 소녀상 근처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동상의 의미”를 모르는 세실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다른 조건을 타고난 이들의 연대가 앞으로도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드러낸다.

“주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역사 부정의 수렁에서 벗어나 진실한 화해와 치유의 길로!’ ‘피해 당사자에게, 그리고 그 가족에게,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해결의 길’ 등 빼곡하게 문구를 적어 넣은 피켓이 눈에 띄었다. 그때 세실이 주희의 팔짱을 조금 더 힘주어 꼈다. 지금 무슨 시위 중인가요? 나는 시위대의 주변에 있으면 안 되는데…… 외국인은 좀 민감해서요…… 세실은 주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 댔다. 주희는 세실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세실, 주희’, 193-194쪽)

4. 반어적인 유토피아의 세계

마지막까지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주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지속되는 갈등의 한 자락을 읽는다. 그렇다면 폭력에 연루된 여성들의 단단한 연대를 끝내 그려내지 않는 박민정의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위안부 소녀의 “동상의 의미를 몰랐”던 세실을 바라보며 “당신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주희의 참담함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그러나 여성들의 연대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를 대면하는 인물의 태도일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박민정의 최근 소설을 셋으로 나누어보면 어떨까. 첫 번째로 ‘세실, 주희’에서처럼 한 인물이 끝내 폭력의 구조를 ‘모른’ 채 연대에 다다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실과 주희가 마지막까지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실이 위안부 소녀상의 의미를 ‘몰랐고’, 더 근본적으로는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자신의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일본이 전쟁에서 저지른 잔혹한 폭력에 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세실이 위안부 소녀상 혹은 전쟁의 피해자들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은, 자신을 뉴올리언스 펍에 데려간 친구 J가 그곳에서 찍힌 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과 포개지면서 주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뉴올리언스의 펍에서 찍힌 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갈 줄은 상상도 못했을 J에게 결국 영상에 대해서 털어놓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희는 세실에게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폭력에 대해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세실과 J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남고 만다.

이와 반대되는 지점에 두 번째 유형인 ‘행복의 과학’, ‘A코에게 보낸 유서’와 ‘당신의 나라에서’가 있다.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에서 하나는 우연히 기노시타 류의 책을 편집하게 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폭력 사건의 전말을 ‘알고자’ 한다. 그녀는 “일주일 넘게 빨지 않은 실내복을 입고, 주말 내내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72쪽)까지 기노시타 미노루의 살해 사건을 둘러싼 기록을 찾는 데 열중하고,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회사의 부패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격리되어 있는 수영의 고립된 처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한편 ‘당신의 나라에서’의 홍유나는 레닌그라드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희미한 상처에 마주하기 위해 당시에 찍은 사진을 이용한 작업에 착수하고, 과거 소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는 답장을 윤지나에게 보낸다. 첫 번째 유형의 소설에서 폭력의 구조를 ‘아는’ 인물과 ‘모르는’ 인물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 유형의 소설에서는 그것을 집요하게 ‘알고자’ 하는 여성들이 부각된다.

그러나 박민정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박민정 소설의 탁월함은 폭력의 구조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을 포착한 세 번째 유형의 소설들, 즉 ‘청순한 마음’과 ‘아내들의 학교’에서 빛난다. ‘청순한 마음’에서 모교의 심리 상담센터에서 일하는 상담가 윤수지는 P교수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자 학생의 신경정신과 병력을 유출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런 그녀에게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고3 시절 입시 컨설팅 아카데미의 선생님으로서 자신을 가르쳐주던, 당시 심리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이수지이다. 부모님의 경제적인 지원 아래 국제고에 다니던 윤수지는 당시에 이수지가 “자신을 위해서는 학자금 외엔 한 푼도 쓰지 않는데 늘 허덕여야 하는 것에 진력난”(171쪽) 가난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빈부격차의 원인을 사회적 약자의 부족한 인내심으로 돌리는 논술문을 써내거나 교수가 되려는 꿈을 포기한 아버지를 선생님 앞에서 비웃곤 했다. 윤수지는 학생처장에게 성희롱당하는 등 열악한 대학 구조에서 약자의 처지에 놓인 현재 시점에 와서야 알 수 없는 서술자에 의해 ‘너’라는 이인칭으로 호명되면서, ‘청순한 마음’으로 마냥 동경하던 이수지 선생의 입장을 ‘알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윤수지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요구를 애써 ‘모른 척’하려는 순간이다.

“너는 재떨이로 사용하는 화분을 일별한다. 없던 것이 보인다. 담배꽁초가 섞인 배양토를 뚫고 허연 버섯들이 자라 있다. 세면대 밑에 함부로 두었더니 습기가 찬 모양이었다. 어젯밤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잘 자라 둥근 머리를 내민 버섯을 들여다본다. 표면의 결이 촘촘하다. 화분을 받친 손의 미세한 떨림 때문에 버섯대가 파르르 흔들리는 것 같다. 더러운 것이 증식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몹시 역겨워진다. 동시에 문득 강낭콩이 자라나 떡잎 사이로 본잎을 틔우던 모양이 생각난다. 출근할 때마다 오늘은 얼마나 자랐을까 기대하며 화분을 들여다보곤 했다. 내 손에서 뭔가 자라나고 있다는 생각에 들뜨고 뿌듯했던 그때를 떠올린다. 그것과 이것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너의 머릿속을 스친다. 너는 곧 생각하기를 그만둔다.”(‘청순한 마음’, 181쪽)

거짓 소문 때문에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앞에서 윤수지는 성폭행범이 P교수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와 친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180쪽)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면피에만 집중한다. 여기에서 소설의 눈길은 “재떨이로 사용하는 화분”에서 “담배꽁초가 섞인 배양토를 뚫고 허연 버섯이 자라 있”는 역겨운 모습으로 향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습이 “강낭콩이 자라 떡잎 사이로 본잎을 틔우던 모양”과 다르지 않다는 윤수지의 인식이다. 이는 고등학생 시절 경제적인 기득권을 바탕으로 이수지 선생에게 상처를 주었던 ‘청순한 마음’, 그리고 성폭행 가해자 P교수와 결탁하여 피해 학생의 신경정신과 병력을 유출했다는 의심을 받는 억울함이 복잡하게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겹겹의 조건과 잘잘못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한 윤수지의 태도는 재떨이에서 자란 “허연 버섯”의 이미지와 겹쳐지고, 이로써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면서 떠올렸던 이수지 선생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마르게 된다.

윤수지가 자신을 둘러싼 폭력의 구조에 대해서 ‘알지’ 않겠다는 태도에서 멈추었다면, ‘아내들의 학교’의 설혜는 적극적으로 ‘모르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절망이 심화된다. 동성혼이 합법화된 시점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소설에서 설혜는 중학교 시절부터 “미증유의 아름다움을 가진”(218쪽) 선을 사랑해왔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소설은 동성혼이 합법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레즈비언 커플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으며 단지 그 차별이 더욱 미시적으로 바뀌었을 뿐인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이들에게 가해지는 혐오가 단순히 제도적인 그물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것임을 드러낸다. 특히 ‘아내들의 학교’에서 부각하는 것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동성애가 소비되는 방식이다. <톱 모델 서바이벌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십대 후반의 나이 많은 모델로 참가한 선은 나이 어린 모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내인 설혜와 입양한 아홉 살짜리 아들을 TV에 출연시키고자 한다. 매스컴에 레즈비언 부부로 소비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던 설혜는 “그게 사람들이 나한테 바라는 드라마라고. 이거 안 하면 나 우승 못해.”(240쪽)라고 말하는 선의 절박함에 못 이겨 결국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한다. 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동성애를 ‘파는’ 자본주의의 구조에 제 발로 먹혀 들어가겠다는 설혜의 섬뜩한 태도이다.

“아마 그들은 그렇게 메이킹할 것이다. 그래도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에요. 저희와 같은 가족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부러 눈썹과 입술에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파리한 얼굴로 선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ENG 카메라를 본 아이가 겁을 먹으며 설혜의 뒤로 숨는다. 선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에게 손짓한다. 이리로 와. 아저씨가 예쁘게 찍어주실 거야. 아이가 쭈뼛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설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한다. 잊지 마. 이것이 내가 원한 유토피아였다는 걸.”(‘아내들의 학교’, 241쪽)

설혜가 말한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대학 시절 여학생회에서 “부잣집년”이라는 이유로 설혜를 비난하고 설혜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아우팅한 회장 언니의 입에서 먼저 나왔던 말이다. 회장 언니는 동성혼이 합법화된 이후 설혜에게 “그래,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서 너희들이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 꼭 결혼해라. 네가 원했던 유토피아가 왔으니까”(241쪽)라고 비아냥거리듯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성애를 팔아야 하는 설혜에게 현실은 “이렇게 좋아진 세상”도, “원했던 유토피아”도 아니다. 여기에서 유토피아란 끔찍한 현실에 대한 반어에 다름 아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끔찍한 유토피아를 대하는 설혜의 태도다. 설혜는 “이것이 내가 원한 유토피아”라는 반어적인 다짐을 통해 동성혼을 합법화하면서도 그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하는 사회의 모순과 기어이 한 몸이 되려는 몸짓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푸코의 몸이 “이 모든 유토피아들 덕분에 사라졌다”12)면, 카메라 앞에서 아들과 서서 웃는 설혜의 몸은 반어적인 유토피아와 기어코 한 몸이 된다. 이 반어적 형상화는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세계의 민낯을 효과적으로 폭로한다. 루카치는 소설에서 반어라는 형식이 “이상이 주관적·심리적으로 제약되어 있음”13)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가지는 인물이 총체적인 세계의 조각이라도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제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는 방식으로써만 가능하다. 인물이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어적으로 형상화할수록 소설은 “총체성을 창조하는 진정한 객관성의 유일하게 가능한 선험적 조건”14)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설혜의 반어적인 다짐은 자본주의적 폭력의 심연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개인이 취하는 윤리적 자세라는 문제까지 깊이 건드린다. 자본주의 사회와 설혜의 기이한 결합은 독자에게 비윤리적인 세계 속으로 정말로 먹혀 들어가도 괜찮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5. 기어이 알고자 하는 윤리적 자세

이 지점에서 우리의 눈길은 다시 두 번째 유형의 소설로 돌아오게 된다. ‘아내들의 학교’가 섬뜩하게 보여주는 비윤리적인 세계의 심연에 빠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의 하나가 편집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이 “어지간히 역겨운 정보도 서슴지 않고 찾아볼 수 있는 강한 비위”에 있다고 말하며 지독한 치치올리나의 포르노를 보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남자 선배들도 혀를 내두르며 자리를 뜨고 지나가다 영상을 본 후배가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 하나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다.

이는 하나가 박영희와 기노시타 미노루의 일기를 끝까지 추적해내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물론 이 소설들에서마저 하나와 수영, 그리고 박영희와 최영은이라는 여성들 간의 단단한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박민정은 섣부르게 연대하는 대신 이를 신중하게 지연시키면서 그 자리에 “때론 감당하기 힘들다고 여기면서도 그것들을 똑바로 바라보는”(58쪽) 자세, 즉 기어이 알고자 하는 태도를 놓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폭력의 연쇄적인 구조 속에 꼼짝없이 걸려 있는 자신의 다층적인 조건들에 대해 치열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이다. 자신을 이루는 수많은 조건들을 망각하지 않은 채 끝까지 쳐다보려는 안간힘이다. 박민정의 소설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성별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국가적, 계급적, 세대적 차이를 못 본 체하고 넘어가지 않으려는 자세에서 비롯한다. “차이가 모호해질 때, 대립의 한계가 문제시될 때, 동일성이 있다고 결론 내릴 일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관심을 증폭하고 분석을 정교화”15)해야 한다면, 박민정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것은 연대의 실패라기보다는 더욱 단단한 연결을 위한 밑바탕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론이나 담론의 그물로 길어 올릴 수 없는, 그러나 문학이 훌륭하게 형상화해낼 수 있는 겹겹의 실존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 많은 겹겹의 조건들을 꼼꼼히 따진 뒤 “당신의 나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라는 문장에 힘겹게 도달한 박민정은 우리에게 폭력을 대하는 하나의 윤리적 자세를 제안한다. 홍유나가 레닌그라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듯, 우리도,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철저하게 알아보자고.

>> 각주

1)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1쪽

2)위의 책, 47쪽

3)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박민정의 작품은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문학동네, 2017)에 수록된 ‘행복의 과학’, ‘A코에게 보낸 유서’, ‘당신의 나라에서’, ‘청순한 마음’, ‘아내들의 학교’, 그리고 작품집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세실, 주희’(‘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이다. 본문에 인용하는 경우에는 쪽수만 표기한다.

4)강지희, ‘키클롭스의 외눈과 불협화음의 형식’, 박민정, <아내들의 학교> 297쪽. 이 글 외에도 박민정의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연대에 주목하는 시각들이 눈에 띈다. 이광호, ‘심사평’, <제7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7; 차미령, ‘너머의 퀴어: 2010년대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5)루카치는 소설에서 인물의 경험적인 주관성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극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중단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은 모든 이질적인 조각들을 갈아서 닳게 만들어―물론 비합리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관계를 맺게 하는 동질성의 통합 원리이다. 시간은 인간들의 무분별한 혼란을 정돈하고, 그 혼란에 자체적으로 만개하는 유기체의 외관을 부여한다.” 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 김경식 옮김, 문예출판사, 2007, 149쪽

6)조연정은 여성의 부당한 삶의 조건을 고발하고 공유하는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비롯한 최근 문학들의 효과에 대해서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82년생 김지영>에 그려지는 디테일들은 너무나 평범하지만 그러한 디테일에 대다수의 여성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정말 심각한 문제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점을 재차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정치적 텍스트가 되는 것이 아닌가. (…) 문학의 위축을 염려하는 일보다 나의 신념과 맞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는 일이, 즉 여성의 부당한 삶의 조건을 고발하고 공유하는 일이 더 시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 -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웹진 문장, 2017.8

7)이와 관련하여 박민정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회인인 저에게는 어떤 악행도 차마 이해할 여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설가인 저에게 어떤 악인을 통한 악의 고발은 두려운 것입니다. 소설이 고발에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어떤 인간이든 그를 이해하자는 생각 역시 차마 할 수 없습니다. 고발과 이해는 제게 모두 프로파간다로 여겨집니다.” ‘문학과지성’ 2017년 여름 <이 계절의 소설> 인터뷰(http://moonji.com/monthlynovel/13700)

8)“어느 날, 명아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였다. 그녀는 소원이 하나 있었다. 이런 말을 해보는 거였다. 인생을 포기했다거나, 대충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말. (…)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팠기 때문이다. (…) 이야기를 끝낸 후, 명아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 이야기 같아?”” 강화길, ‘다락’,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119쪽

9)백지연,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22쪽

10)샬럿 윗은 젠더 및 사회적 개체성 개념을 명료화하기 위해, 자기의식을 지닌 자로서의 ‘개인(persons)’과 생물학적으로 인간인 자로서의 ‘인간(human beings)’과 공시적·통시적으로 사회적 위치를 점유한 자로서의 ‘사회적 개인(social individuals)’을 구분한 바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범주들은 각기 다른 규범성을 가지기 때문에, 사회적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과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동등한 차원이라고 볼 수 없다(마리 미콜라, <섹스와 젠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전기가오리, 2017, 67-68쪽).

11)낸시 프레이저, ‘인정을 다시 생각하기’, 케빈 올슨 엮음,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문현아 외 옮김, 그린비, 2016

12)푸코, 앞의 책, 47쪽

13)게오르크 루카치, 앞의 책, 107쪽

14)위의 책, 108쪽

15)Jacques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1, trans. Geofferey Benningt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56쪽, 황정아,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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