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 펴낸 박준 시인 “후회든 상처든 강렬한 기억이든 마음에 담아뒀다 시를 통해 떠나보내요”

2018.12.28 20:49 입력 2018.12.31 10:56 수정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 115쪽 | 9000원

두 번째 시집을 펴낸 박준 시인을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의 창비 서교빌딩에서 만났다. ‘타인의 슬픔’을 더 많이 바라보게 된 것 같다는 박준은 “내 일 아니야도 아니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함께 울거나 밥을 먹이고 위로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두 번째 시집을 펴낸 박준 시인을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의 창비 서교빌딩에서 만났다. ‘타인의 슬픔’을 더 많이 바라보게 된 것 같다는 박준은 “내 일 아니야도 아니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함께 울거나 밥을 먹이고 위로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시인’과 ‘스타’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집’과 ‘베스트셀러’도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박준 시인(35)은 시적인 성취와 대중적 성취를 모두 이뤄낸 드문 사례다. 2012년 펴낸 첫 번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가 11만부 이상 팔렸고, 2017년 7월 펴낸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난다)이 15만부를 돌파했다. 6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출간 일주일 만에 5만부를 찍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쁘다”고 말하지 않고 “부끄럽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시집을 내고 나면 혼자 벽 보고 있고 싶은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시집과 베스트셀러를 이어 붙인 게 이율배반적인 말이 된 시대예요. 그래서 더 두려운 마음이 있어요. 예전 시집이 잘됐으니까 이번에도 ‘예전 시집만큼 많이 읽혀야 한다’가 아니라 ‘더 문학적으로, 시답게 읽혀야 하는데’ 하는 마음. 거기에서 오는 자성과 두려움, 부끄러움이 있어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24일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서울 마포구의 창비 서교빌딩에서 만난 박준은 그의 시와 무척 닮아있었다. 누군가 울면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묵묵히 지켜보다 뜨거운 밥과 국을 내오는 사람, 과거를 되새기고 타인을 가만히 살피는 ‘웅크린 마음’을 가진 사람, 한없이 에두르다 종내에 진심을 내비치는 사람.

“메시지 제거로 의문이 들게 하는 게 시의 전달방식이라고 생각”
세월호 다룬 작품선 꿈속 만난 이에 밥 차려주고 싶은 마음 담아

# “섣달이면 기흥에서/ 영아가 올라온다고 했습니다…지난달에는 잔업이 많았고/ 지지난달에는 함께 일하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느라/ 서울구경도 오랜만일 것입니다…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좋은 세상-영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주 음식을 만든다. 어슷하게 썬 겨울 무, 쑥과 된장 풀어 끓인 국…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먹이려고 내놓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슬픔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누가 울고 있는데 그 울음을 그치게 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저 같은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우는 걸 지켜보다가 같이 울거나, 밥을 먹이거나 위로하는 것 같아요. 또 우리의 시간은 대부분 사소한 일들의 연속으로 이뤄져요. 지루할 만큼 비루한 일상들이 이어지는데, 작은 일들 중에서 큰일은 밥 먹는 일인 것 같아요. ‘작은 일들의 왕’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책과 삶]6년 만에 두 번째 시집 펴낸 박준 시인 “후회든 상처든 강렬한 기억이든 마음에 담아뒀다 시를 통해 떠나보내요”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숲’)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시인은 시간을 남들보다 느리게 사는 것 같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낮과 밤’)와 같이 과거의 일을 가만히 곱씹다가 내어놓는 구절이 많이 보인다.

“진취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행복한 순간을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제가 잘하는 것은 과거에 행복했던 순간을 아주 잘 기억하는 거예요. 기억은 모래를 쥐고 있는 것처럼 놓치지 않으려고 해도 슬슬 빠져나가 앙상해지는데, 좋은 기억을 늘 선명하게 재생할 수 있다면 행복해지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되새기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정하다. 다정함에 대해 묻자 박준은 ‘후회’라는 말로 화답했다. “저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에요. 불행하게도 삶의 대부분을 후회하며 보내죠. 그런데 그 후회가 작은 것들이에요. 잘못에 대한 게 아니라 ‘누구랑 함께 있을 때 좀 더 예민하게 잘 살폈다면’과 같은 게 많아요. 관계를 온전하고 아름답게 유지해야 한다는 욕망이 큰데 그게 잘 안되면 며칠씩 후회를 하죠. 그렇다면 제가 살길은 후회할 일을 적게 만드는 거예요. 후회든 상처든 강렬한 기억이든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쓰는 행위를 통해 떠나보내는 것 같아요.”

그는 과거의 되새김을 통해 오늘을 살고, 미래를 기다린다. “오래전 나눈 말들이 오늘쯤 도착”하면 그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미래형의 편지를 조심스레 쓴다.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라 마음을 바람에 지나치듯 살짝 부려놓고 가는 문장이에요. 사실 보고 싶은 건 장마가 아니라 장마를 보고 있을 대상이겠죠. 편지의 형식이 일상적 말을 늘어놓다 끝에 사랑해라는 말을 숨겨놓는 거라면, 사랑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고, 메시지를 제거해 의문이 들게 하는 게 시의 전달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밥 먹고 가. 도라지 무쳐놓은 것도 좀 있는데 금방 차려줄게…하여간 내가 조금 전 깜박 선잠이 들었다가 꿈을 꿨는데 안개 자욱한 해변이야…올해는 봄꽃도 늦는다는데 사람 하나 기다리는 일이 뭐 어렵나…뭐? 바로 간다고? 밥 안 먹고?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받아. 나중에 네가 갚으면 되지. 괜히 잃어버리지 말고 지금 주머니에 넣어. 그럼 가. 멀리 안 나간다. 가. 그냥 가지 말고 잘 가.”(‘사월의 잠’)

시집에서 유독 애틋한 시가 있다. “그냥 가지 말고 잘 가”라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 ‘사월의 잠’이란 시다. 눈치채기 어렵지만, 실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시다.

“경기도교육청에서 펴낸 ‘세월호 약전’을 쓰는 일에 참여하면서 피해자 부모와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슬픔이 저에게 왔고, 그것을 끊임없이 슬퍼하는 사람이 된 거죠. 그런데 직접적 화법으로는 도저히 못 쓰겠고, 안 쓰자니 내가 못 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에둘러서 쓰는 거죠. 세월호를 소재로 쓴 시들이 많지만, 작가들이 힘들어해요. 자칫 소재로 접근할까봐 검열하게 되고요. 작가가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다른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에서 느낀 슬픔을 그는 꿈속에 만난 이에게 밥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려냈다. 시집엔 이외에도 구제역 참사로 희생된 소, 갱도에서 죽은 광부 등 사회적 아픔들이 드러나지만, 고통이 전면에 등장하는 법이 없다. 꾹꾹 눌러놓은 슬픔을 에둘러 조심스레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박준의 애도 방식이다.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 들여야 할 것을 잘 알지 못하는 탓에 반쯤 낡았고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새해를 맞았습니다”(‘오늘’)

박준의 첫 시집과 산문집을 펴낸 김민정 시인(난다 대표)은 박준 시인이 2년 전 두 번째 시집 원고를 보여줬을 때 “준아, 너 망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2년이 지나 내놓은 시집은 그래서 달라졌을까. 박준은 “시가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지겠냐”며 “누나(김민정 시인)가 말한 건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는 ‘망하면 안돼’라는 마음이었다면 이젠 ‘망해도 돼’ ‘망하는 게 뭔데’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스스로 이만하면 됐어라고 내 시를 인정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첫 시집을 냈을 때도 세상에 빨리 결과물을 내놓고 싶다는 생각에 조급했던 것 같아요. 김민정 시인과 허수경 시인이 '1년 정도 묵혀야 돼'라고 해서 2011년 내려던 시집을 1년 묵혔다가 냈죠. 그때도 시를 많이 고친 게 아니라 문학에 대한 기본적 태도를 수정했던 것 같아요. 문학은 짠 선보이고 누구와 겨루는 게 아니라 나 혼자 하고 나 혼자 끝내는 거란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선배들에게 문학적 태도를 배운 것 같아요."

이제 따끈한 새 시집을 막 펴낸 박준에게 새해를 맞는 심정을 물었다.

“시집을 내고 처음 쓰는 시가 가장 어려워요.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시일 것이기 때문이죠. 아직 첫 시를 쓰지 않았지만 작가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직결되는 것 같아요. 잘 살아야지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텐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요. 내년엔 시에 대해서 영점 조정하고 수정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나가야 할 것 같아요. 사실은 지금 숙제 다 끝내고 놀고 싶은 마음이에요. 평소 쓰지 않던 방식으로 시를 쓰고 안 해본 것들을 하는 것이 저의 놀이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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