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18년에 걸친 경제학 칼럼 전쟁, 최후의 승자는?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2022.06.10 10:50 입력 2022.06.10 19:44 수정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니컬러스 웝숏 지음·이가영 옮김 | 부키 | 552쪽 | 3만원

케인스주의자 폴 새뮤얼슨(1915~2009·왼쪽)과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은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부키 제공

케인스주의자 폴 새뮤얼슨(1915~2009·왼쪽)과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은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부키 제공

독자의 주목도를 높여 매체 가치를 높이고 상업적 이득도 취하려는 미디어 종사자들의 욕망은 때로 한 사회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결과를 낳는다. 뉴스위크는 1961년 소유주가 변경된 이후 “열정과 이상이 결여된 고루한 경영 잡지”를 벗어나 “더 젊고 더 혁신적이고 덜 냉소적이면서 더 공정하고 더 재미있고 덜 가르치려” 드는 미디어가 되기 위한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오즈 엘리엇 뉴스위크 편집국장은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경제학자들이 번갈아 기고하는 칼럼을 구상했다. 진보, 중도, 보수 경제학자가 각기 3주에 한 번씩 글을 쓴다는 아이디어였다. 진보 대표로는 케인스 경제학 교과서의 결정판인 <새뮤얼슨의 경제학>의 저자 폴 새뮤얼슨, 중도는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 헨리 월릭, 보수는 당시 보기 드물던 젊은 보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었다. 얼마 뒤 월릭이 연방준비위원회 이사로 취임하면서 필진에서 빠지자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연재 간격은 격주로 줄었다. 1966년 시작된 칼럼이 18년간 이어질지는 뉴스위크도, 새뮤얼슨과 프리드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뮤얼슨이 고상한 말투를 쓰는 케인스주의의 대사제라면, 프리드먼은 이교도를 한 명이라도 더 개종시키고자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자유 시장주의의 전도사였다.

- 니컬러스 웝숏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둘은 주고받은 칼럼에서 경제를 넘어 정치, 사회, 세계관의 격렬한 충돌을 보여줬다. 이미 명망 높은 학자였던 새뮤얼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여유 있게 도전을 받아넘겼다”. 반면 비교적 덜 알려졌던 프리드먼은 “길거리 싸움꾼처럼 주먹을 날려댔다”. 새뮤얼슨이 거시적인 글을 즐겼다면, 프리드먼은 당대의 사건에 대해 깊숙이 접근했다. “새뮤얼슨이 고상한 말투를 쓰는 케인스주의의 대사제라면, 프리드먼은 이교도를 한 명이라도 더 개종시키고자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자유 시장주의의 전도사였다.” 의견의 창을 들고 서로를 찔러댔던 둘이 이토록 오랫동안 한 지면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두 학자가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경하며 인간적으로 친밀했기 때문이다.

[책과 삶]18년에 걸친 경제학 칼럼 전쟁, 최후의 승자는?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뉴스위크에 1966년부터 연재돼
경제·정치·사회관 등 격렬한 충돌
노벨상까지 수상한 세기의 라이벌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 대결 통해
미국과 유럽 사회의 큰 흐름 살펴

<새뮤얼슨 vs 프리드먼>은 경제학의 거두이자 훗날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둘의 대결을 그린다. 경제학책이지만 경제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20세기 후반 경제학의 주요한 흐름인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미국과 유럽 사회의 큰 흐름을 살핀다.

둘 다 유럽 출신의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했고 대학 동창과 결혼했지만, 표면적 이력을 제외하고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새뮤얼슨은 “실업자가 수백만명에 달하던 1930년대 대공황 상황에서조차 정부가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견”을 고수한 시카고대 경제학자들에 동의할 수 없었다. 명성이 없던 MIT 경제학과에 자리 잡은 새뮤얼슨은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교과서를 써달라”는 학과장의 주문에 <새뮤얼슨의 경제학>을 출간했다. 케인스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한 이 책은 매카시즘의 물결 속에 한때 정치권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이후 수십 년간 개정을 거듭하며 경제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새뮤얼슨이 비교적 순탄하게 학계 주류로 자리 잡은 반면, 프리드먼은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해 고투해야 했다. ‘순진한 미국 시골 청년’이던 프리드먼은 1947년 스위스 몽펠르랭에서 열린 경제학자들의 모임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만난 뒤 개안하는 경험을 했다. 다만 하이에크가 정부의 시장개입을 사실상 터부시한 반면, 프리드먼은 자유시장의 장점을 강조하면서도 가격 기구, 성장 장려책 등은 필요하다고 여겼다.

책은 점잖은 주류였던 새뮤얼슨보다는 거친 도전자였던 프리드먼의 생애를 조금 더 생동감 있게 서술한다. 경제학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며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새뮤얼슨과 달리, 프리드먼은 시장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연계시켜 사고하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드먼의 경제적·정치적 신념은 전통적 공화당의 원칙과도 때로 충돌했다. 애국심, 국가 봉사를 중시한 기존 공화당원과 달리 프리드먼은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리드먼이 징병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는 심지어 정부가 누군가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을 막을 권리가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프리드먼은 닉슨, 레이건 등 보수 대통령의 자문을 맡아 미국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려 했고, 칠레 피노체트 독재 정권과의 연계를 의심받기도 했다. 영국의 대처는 실제로 프리드먼을 초청해 각료들에게 강의하도록 했고 그의 아이디어를 정책에 반영했다. 프리드먼은 통화량 증가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업, 유휴 생산 설비의 증가를 “맹장염 수술을 받고 나면 침대에 누워 쉬는 기간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다만 대처의 영국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를 따른 뒤 실업률이 2배 이상 뛰었고 곳곳에서 소요 사태가 잇달았다. 프리드먼의 아이디어는 현실에서는 실패로 귀결됐다.

한 텀을 거친 부시 부자의 행정부,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는 ‘작은 정부’였다. 프리드먼은 2006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프리드먼이 살아있었더라도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 의사당 난입 같은 폭력을 옹호했을 리는 없지만, ‘정부 권력을 줄여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티파티의 부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이 책의 저자는 평가한다. ‘타임스’ 창간 편집인인 저자는 “코로나바이러스는 큰 정부의 필요성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정부가 어려울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최종 대출 기관이자, 수천만명의 실업자를 빈곤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임을 보여주었다”는 문장으로 장기에 걸친 두 거장의 논쟁이 새뮤얼슨의 판정승으로 귀결됐다는 생각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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