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에게 살해 당한 여성이 3호 건널목에 나타났다

2023.07.22 08:00

역 건널목에 출몰하는 ‘머리 긴 여자’

알고보니 1년 전 죽은 호스티스

기자가 받은 전화는 그 여성이?

정재계, 법조, 언론 부조리 얽힌 ‘사회파 추리소설

<건널목의 유령>은 1994년 일본 도쿄 시모기타자와역 3호 건널목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을 그렸다. 이 건널목은 현재는 지하화됐다. 사진은 ‘문예춘추’에서 낸 일본판 표지다.

<건널목의 유령>은 1994년 일본 도쿄 시모기타자와역 3호 건널목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을 그렸다. 이 건널목은 현재는 지하화됐다. 사진은 ‘문예춘추’에서 낸 일본판 표지다.

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박춘상 옮김|황금가지|354쪽|1만7000원 

1994년 늦가을 어느 날 특급열차 기관사 사와키는 시모키타자와역 3호 건널목 부근 선로 가로등 불빛 아래서 한들거리는 실루엣을 목격하고 급제동한다. 어떤 기이한 소리도,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지 뒤 확인하니 인명사고 흔적도 없다. 하얀 기체 같은 사람 형상 흔적을 본 기억은 뚜렷하다. 혼자만 겪은 게 아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원미상자가 건널목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사건이 반복해서 벌어졌다.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 신원미상자를 찾을 수도 없었다.

마쓰다는 전국지 유군(遊軍) 기자(일정 부서에 속하지 않고 대형 보도 소재가 발생할 때마다 현장에 투입되는 기자)였다. 2년 전 아내가 죽었다. “가정을 내팽개쳐야 할 정도로 바빴던 일에 염증”을 느끼고서 신문사를 나왔다. ‘파괴적인 상실의 아픔’ 때문에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다 여성지 ‘월간 여성의 친구’ 편집장 이자와 제안을 받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각각 신문기자와 잡지 편집자로서 20년 전부터 알고 지내왔다.

‘심야의 수상한 소리’ ‘학교 화장실의 환영’ ‘유원지 안에서 사라진 손님’…. 이자와가 어느 날 독자 투고로 들어온 괴담을 취재하라고 지시한다. 독자의 공포감이나 위기감을 부추기면 잡지 매출이 늘어난다. 투고엔 대학교 철도 동아리에 소속된 학생이 시모키타자와역 승강장에서 촬영한 영상도 포함됐다. 기관사가 목격한 것과 비슷했다. 무언가 뿌연 것이 떠오르더니 증기처럼 흔들리다가 몇초 만에 사라졌다. 다른 독자가 보낸 사진에도 허리 아랫부분이 없는 긴 머리 여자가 뿌옇게 찍혔다. “마치 그 여자만이 허무의 세계에 표백되어 있는 듯했다.” 영상이나 사진에 조작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54세의 전직 기자는 유령 따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줄곧 아내의 영혼을 찾아 헤맸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령취재라는 “한심스러운 일”을 빨리 끝내려 한다. 투고를 하나하나 현장에서 확인한다. “사실의 오인, 지어낸 이야기, 공포심에서 유래한 집단 심리나 출처를 알 수 없는 헛소문”들이었다. 시모키타자와역 3호 건널목 관련 투고는 달랐다. 영혼이 초능력을 발휘해 자기 모습을 필름에 새긴 걸까? 마쓰다는 1년 사이 열차가 자주 정차한 사실도 알아낸다.

<건널목의 유령> 주요 배경인 시모키타자와역. 출처: 구글지도

<건널목의 유령> 주요 배경인 시모키타자와역. 출처: 구글지도

3호 건널목 취재 이후 오전 1시3분이 되면 마쓰다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한번은 받았더니 이상한 기척을 느껴 말을 삼켰다. “청각이 어둠을 포착했다. 수화기 너머에 빛도 소리도 없는 허무의 공간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가냘픈 음성 하나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꺼질 듯 불안정하고 가냘파서 듣는 이의 마음속에 공포와 경계심을 환기하는 기이한 울림이었다. 그것은 젊은 여성이 괴로워하며 신음하는 소리였다.”

마쓰다는 신문기자 시절 친했던 형사 아라이 도움으로 1년 전 3호 건널목에서 젊은 여성이 흉기에 살해당한 사건도 알아낸다. 사건 발생 시각이 1993년 12월6일 오전 1시3분이란 걸 알고 “두 뺨의 솜털이 싹 곤두선 기분”을 느낀다. 아라이가 건네준 사진 속 희생 여성은 독자 투고 사진의 그 여성이었다.

마쓰다는 살인사건과 신원미상 여성을 추적한다. 그 여성은 긴자 고급 클럽을 흉내 낸 갸바쿠라(카바레와 클럽을 합한 업소) 호스티스다. 가게 밖에서 성매매도 했다. 범인은 말단 야쿠자 시마지다. 희생자는 3호 건널목, 범인은 근처 폐가에서 발견됐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대량의 피를 흘린 피해자가 폐가에서 흉기에 찔린 뒤 자력으로 건널목까지 갔다는 점이다. 시체가 걸었던 것일까? 시마지는 현장 체포 때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마쓰다는 3호 건널목 취재 현장에서 ‘머리가 긴 여자’를 목격한다. 오전 1시3분이면 어김없이 집 전화기가 울렸다.

마쓰다는 희생 여성이 일했던 업소들을 다니며 취재를 이어간다. 호스티스들에게 희생 여성이 기분 나쁜 ‘억지웃음’을 자주 지었다는 점 말고는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살인사건 발생 때 남자친구와 해외에 나가 있던, 살해된 여성의 친구이자 호스티스인 오카지마에게서 주요 단서를 찾아낸다. 희생 여성이 일했던 갸바쿠라를 동일본 최대 폭력단인 반도파가 운영했고, 살인자 시마지뿐만 아니라 오카지마의 남자친구 다카다도 반도파 소속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오카지마와 남자친구도 3호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한다. 남자는 즉사하고, 오카지마는 병원에 실려 간다. 대형 건설사로부터 5000만엔의 뇌물을 수수하고도 5만엔 벌금형만 받은 극우정당 중의원이자 족의원(族議員·특정 단체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인 노구치의 이름도 갸바쿠라 취재 도중 등장한다.

다카노 가즈아키가 <제노사이드> 이후 11년 만에 출간한 <건널목의 유령>은 제목 그대로 유령을 다룬다. 영혼을 불러내는 초령(招靈)도 소재로 삼았다. 유령 존재를 믿지 않던 마쓰다는 취재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정상적인 판단력과 합리적인 사고로 인지되는 세계만이 현실이라면, 비합리적인 관념으로만 감지되는 세계는 없는 것인가? 마쓰다는 그곳이야말로 영혼의 거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혼이란 마치 한 편의 이야기나 음악, 혹은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서만 발현되는 무언가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는 ‘귀신 이야기’는 아니다. 다카노의 이번 신작도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정보를 돈으로 바꾸는 블랙 저널리즘, 권력자에 납작 엎드리는 대형 언론사 기자들,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률은 절대로 제정하지 않는 일본 의원들에 대한 비판을 녹였다. 가난하고 이름 없는 여성의 살인사건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검사나 판사도 비판 대상이다.

유령 이야기와 사회 비판 속에서 소설은 해원과 치유로 나아간다. ‘머리 긴 여자’의 ‘억지웃음’과 폐가에서 흉기를 맞고 건널목까지 간 사연이 나오는 대목에선 분노와 함께 먹먹함이 몰려온다.

다카노는 이번 소설에서 기자의 취재기 형식을 많이 녹였다. 다카노는 이 책을 낸 ‘문예춘추’와 인터뷰하면서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읽었다고 했다. <건널목의 유령>은 169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다카노 가즈아키. Photo (C)Yuji Hongo. 황금가지 제공

다카노 가즈아키. Photo (C)Yuji Hongo. 황금가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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