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소녀, 돌봐준 ‘숲’의 대변인이 되다

2023.07.28 14:46 입력 2023.07.29 00:20 수정

열두살에 고아가 된 한 소녀

아일랜드 켈트족 공동체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

켈트족 지식을 과학적으로 규명

세계적 식물학자·환경운동가로 성장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

자전적 삶 담은 회고록

북미 아한대수림의 이미지. 픽사베이

북미 아한대수림의 이미지. 픽사베이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 지음·장상미 옮김|갈라파고스|316쪽|1만7500원

이 책을 설명하는 길은 여러가지다. 열두 살의 나이에 고아가 돼 정서적·물리적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던 소녀가 자연과 공동체의 돌봄을 받고 기적적으로 회복해 트라우마를 딛고 자신의 잠재력을 무한히 발산하는 성장기다. 아일랜드 켈트족의 문화와 지식을 전수받은 ‘마지막 후계자’가 고대로부터 전수된 오래된 지식을 현대과학과 의학으로 규명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과학서이자, 식물과 숲이 가진 의학적 효능 뿐 아니라 지구 생태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다. 자연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일찌기 알아본 저자가 기후변화에 맞서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대대적 벌목과 환경파괴에 반대하는 싸움을 벌여나가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배경엔 아일랜드 리쉰스 계곡의 자연, 영국이 잉글랜드를 500년간 점령했던 아픈 역사, 저자가 이주해 정착하는 캐나다의 웅장하고 거대한 나무와 숲들이 있다.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는 세계적인 식물학자이자 의학생화학자다. <지구의 숲> <아메리카 수목원> 등을 썼으며, 다큐멘터리 <숲의 목소리>의 작가이자 진행자를 맡았다. 2019년 퓰리처상을 수상 소설 <오버스토리>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여성 식물학자의 모델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처럼 저자는 ‘숲의 대변인’이다. “비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인간 세계로 옮기는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일을 해낼 수 있는 흔치 않는 사람”이라고 곤충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평한다.

책은 나무와 숲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에 앞서 저자의 어린시절 내밀한 상처와 슬픔에서 시작한다. 75세인 2019년에야 이 책을 펴냈다. 가슴 깊은 곳 고통을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저자는 영국 귀족 후손인 아버지와 아일랜드 왕족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 탓에 이 결혼은 양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부모가 사망하기 전부터 저자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냉정했고 아버지는 무관심했다. “똑똑한 여자는 좋은 집안에 시집을 못간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으며 아무도 거스르지 않게 숨죽여 지내는 법을 체득한다. 좋은 부모는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열두 살에 사고로 양친을 잃고 그는 당시 고아들을 소용하던 막달레나수용소에 갇힐 위기에 처한다. 그곳은 학대와 죽음으로 유명했다. 수용소에 대한 공포는 인생 내내 지속적 영향을 끼친다.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삼촌이 그의 보호자가 되기로 하면서 수용소 신세를 면한다. 하지만 삼촌은 다이애나를 돌보지 않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몸은 쇠꼬챙이가 되어간다.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가 자신이 진행을 맡은 다큐멘터리 <숲의 목소리>에 출연해 아일랜드 자연을 거닐고 있다. 유튜브 캡처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가 자신이 진행을 맡은 다큐멘터리 <숲의 목소리>에 출연해 아일랜드 자연을 거닐고 있다. 유튜브 캡처

저자를 구한 것은 리쉰스 계곡에 사는 켈트족 공동체였다. 폐쇄적인 지리적 특성으로 500년의 영국 점령기에도 전통인 켈트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던 리쉰스 사람들은 “고아는 모두의 아이”라는 브레혼법(켈트의 전통법)에 따라 저자를 보살피고 고대 켈트족 지식을 전수한다.

그곳에서 저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지식을 얻는다. 하나는 켈트족이 간직한 자연에 대한 지식이었다. 약물 성분이 있는 식물을 구분하고 활용하는 법을 배운다. 이 지식은 그의 학문적 길을 이끌었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가 가진 능력을 믿는 법’이었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배우기가 특히 어려웠다. 나는 14년 동안 자기 비하에 빠져 있었고, 또 몇 달 동안은 나 자신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공포에 시달려온 처지였다.”

보리밭이 저자에게 큰 가르침을 줬다. 트랙터를 빌릴 수 없게 된 팻 아저씨가 수확 시기를 놓치게 생긴 보리밭을 보며 한숨을 쉬자 저자는 자신의 손을 보태겠다고 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수확을 마친 다음 저자는 말한다. “모든 아이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절대 끝까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길로 자기를 내던지는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첫걸음을 내딛는다면 불가능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고 말이다.” 이날의 깨달음은 이후 저자가 식물학자로서 환경운동가로서 두려움 없이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줬다.

저자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기억력이 놀랍도록 좋았고, 대학을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다. 학문의 세계는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가 됐다. 학업에서 성취를 이어나가면서 저자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산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나아가 타인과 세계를 돌볼 책임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는 대학에서 자연계와 나무에 대한 켈트족의 지식을 과학적으로 풀어내는 연구에 매진한다. 이모할머니로부터 아이리시 모스라고 불리는 콘드루스 크리스푸스가 결핵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들은 이야기를 의학도서관에서 확인한다. 식물학 학회지에는 콘드루스 크리스푸스의 점액질에 항생제 성분이 있으며, 체내 방사성 스트론튬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고 써 있었다. “고대 세계와 과학계의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하지만 학계는 “과학과 신성함을 섞지 말라”고 저자를 비난한다. 학계에 만연한 성차별도 번번히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생물 발광 현상과 DNA 배열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 스미어링 기법을 발견하고, 혈액형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인공 혈액인 무기질혈색소를 개발한다.

숲의 이미지. 언스플래시

숲의 이미지. 언스플래시

게일어로 시얼셰(saoirse)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을 자유, 영혼과 상상력의 자유를 의미한다. 수용소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시얼셰의 소중함을 절감한 저자는 자신의 신념과 타협하지 않았다. 대학 온실에서 연구를 하던 중 온실을 허락 없이 들어오려는 가톨릭 교회 주교를 내쫓기도 한다. 연구 성과를 남성에게 가로채이는 등 성차별이 만연한 학계가 “지겹다”며 자신만의 연구를 위해 캐나다에 집을 짓고 토착 식물을 심으며 숲을 조성한다.

저자는 인간과 식물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고대 양치식물에서 늘푸른나무로 넘어가던 시기를 연구하면서, 당시 지구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가 인간이 생존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며, “초록색 분자기계(식물)는 계속 진화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성능으로 줄기, 몸통, 잎, 꽃을 통해 탄소를 숨 쉴 수 있는 공기로 바꾸어나갔다. 인류가 출현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과 나무는 숨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무와 광합성은 인간의 호흡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인간과 식물이 화학으로, 이산화탄소와 산소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인체에 필수적인 22개 아미노산, 세 가지 필수지방산, 소듐·셀레늄·포티슘 등 미량 원소가 식물계로부터 비롯한다. 저자는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전 지구로 확장해 ‘생물학적 설계’를 말한다.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일찍 예견하고 숲의 파괴와 벌채를 막기 위한 행동을 해왔다. 그는 한 사람이 6년 동안 해마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 주변에 큰 나무가 있다면 함부로 베어지지 않도록 지역 의회에 압박을 가하는 방법 등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준다.

아일랜드 켈트족이 쓰던 오검문자. 나무와 숲에서 따온 문자에 대해 저자는 “숲의 부활을 지향하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켈트족이 쓰던 오검문자. 나무와 숲에서 따온 문자에 대해 저자는 “숲의 부활을 지향하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위키피디아

책의 2부엔 식물과 나무, 숲에서 따온 켈트족의 문자인 오검문자를 소개한다. 소나무, 자작나무, 개암나무 등에서 비롯한 20개의 문자과 얽힌 전설, 식물의 특징과 약효, 과학적 지식 등이 신비롭고도 흥미롭게 담겼다.

안타깝게도 아일랜드엔 원시림과 오래된 나무가 거의 없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500년간 점령하며 고대의 숲을 베어내 선박을 만들고 산업용 뗄감으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캐나다의 원시림에서 아일랜드에서 사라진 가능성을 엿본다.

책은 한때 버림받은 아이가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돌봄을 받고 성장해 자연과 지구 전체를 돌보는 사람으로 성장한 매혹적인 이야기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불안과 자기비하에 시달려오던 저자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자기를 표현할 자유, ‘시얼셰’를 일생에 걸쳐 찾아가고 소중히 지켜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과 삶] 버려진 소녀, 돌봐준 ‘숲’의 대변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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