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번역, 해외에 알리는 미국 현대시인 제이크 르빈 “김혜순 시인 같은 독특한 미학, 세계에 없어”

2016.05.31 21:45 입력 2016.05.31 21:59 수정

도발적 상상력·에너지…한국 첫 노벨문학상 여성시인이 받지 않을까

한국 현대시를 영어권에 알리고 있는 미국 시인 제이크 르빈이 한국의 시와 시인, 번역을 이야기하던 중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한국 현대시를 영어권에 알리고 있는 미국 시인 제이크 르빈이 한국의 시와 시인, 번역을 이야기하던 중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한국의 현대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 문단에 알리는 미국의 젊은 시인이 있다. 한국문학번역원과 연세대 등에서 문체론을 강의하고 있는 제이크 르빈(32).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을 가능케 한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문단에서 화제가 될 때, 한국 시단에서는 자발적으로 한국어를 배워 한국 시를 영어로 옮기는 르빈이 회자됐다. 시단 관계자들이 “좋은 번역으로 인해 한국 시의 독자 확장 가능성이 커졌는데, 그 많은 부분이 르빈 덕”이라는 얘기를 할 정도다.

독립출판사 스포크 프레스의 대표이자 시를 쓰고, 한국 현대시를 번역하는 제이크 르빈을 지난 27일 만났다. 그는 “한국의 여성 시인들은 독특한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며 “지금 미국에선 한국 여성들의 주체성과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그는 “향후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여성의 문제를 쓰는 작가가 선택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작품 완전히 이해하고 번역해야

미국 애리조나 투산 태생인 르빈은 부모의 고향인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예술학 석사를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김경주 시인의 작품을 접하고 매료됐다. “그로테스크한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로 한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어”서였다. 4년 전 서울대 박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남의 학원 등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한국 시 번역을 본격 시작했다. 정부 장학금으로 전남대에 1년 체류하며 지역 문학과 사투리를 배우기도 했다. 지금까지 김경주, 김혜순, 김이듬, 김민정 시인 등의 작품을 영역해 미국에서 출간하고, 영미 문예지에 이들의 작품을 소개해오고 있다.

그는 한국의 시가 소설과는 달리 폭발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보면 상실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비극적 여성들이 나온다. 그러나 김이듬이나 김혜순의 시를 보면 그 여성들은 자신의 인생을 단지 비극에서 끝내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홀로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남편을 죽이는 것, 그것이 한국의 시다.”

르빈은 특히 한국의 여성 시인들이 세계 시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젊은 시인들은 김혜순 같은 시를 쓰고 싶어 한다”며 “김혜순 같은 상상력은 미국에, 세계에 없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독특한 미학을 구축해온 김혜순 같은 여성 시인이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예 계간지 ‘문학동네’는 올해 여름호에서 <피어라 돼지>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슬픔치약 거울크림> 등을 쓴 김혜순 시인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그는 “김이듬, 김민정의 시를 읽으면 한국이라는 나라와 남성이라는 감옥에서 분투하는 여성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며 “여성들이 더 살기 힘든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스타일은 이국적이지만 정서는 공감된다”고 말했다.

르빈은 “서사를 전달하는 번역은 이제 문학에서 큰 의미가 없다”며 “문장보다 한 층위 아래에 있는 무의식, 정동, 센세이션, 스타일 등을 옮길 수 있어야 다른 언어로 새로운 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고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번역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경주 시인의 작품에 매료돼 한국 시에 관심을 갖게 된 제이크 르빈이 번역한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시인의 작품에 매료돼 한국 시에 관심을 갖게 된 제이크 르빈이 번역한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새로운 오리엔탈리즘 시작돼

르빈은 미국에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는 배경에 “서양에서 찾지 못한 새롭고 이국적인 감성이 있다”며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K팝과 한국 영화, 한국 기업 브랜드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의 현실이 드라마틱하고 급진적이어서 문학이 오히려 래디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신문 같은 데서 보는 한국은 안전한 나라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사람들도 친근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현실은 우울하고 어두운 문제들이 많다. 대중문화는 현실과 간극이 커서 성형수술한 아이돌들이 나와 귀여운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그나마 현실을 담는 것은 문학이다. 반면 미국은 대중문화가 많은 부분 현실을 담고 있고, 실제 삶과의 간극이 그다지 크지 않다.”

현재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를 번역 중인 그는 내년엔 김경주의 시극 <나비잠>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번역해 미국 뉴욕의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또 김이듬, 김민정, 김행숙 시인의 작품들을 묶어 호주에서 시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각 나라의 문학이 점점 독특성을 잃고 획일화돼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르빈은 “한국에서 될 수 있으면 오래 체류하고 싶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몸이 괴롭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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