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에서 마리니까지…애증의 나라 이탈리아 인문 기행

2018.02.01 17:57 입력 2018.02.01 20:03 수정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제4계급’, 1901, 밀라노 노베첸토 미술관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제4계급’, 1901, 밀라노 노베첸토 미술관

첫 그림은 볼페도의 ‘제 4계급’이다. 서경식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최재혁 옮김/반비)에서 “교회(제1계급) 귀족(제2계급) 부르주아(제3계급)에 학대 당해 왔던 제4계급인 노동자의 각성을 그린 작품이다. 이탈리아 및 유럽 전역의 진보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상징이 된 작품”이라고 썼다. 책을 읽다 좋아하는 회화 중 하나라 눈길이 갔다. 그간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다. 20세기 초반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 이탈리아 현대사를 그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76년 작 ‘1900년’ 포스터 표지에 이 그림이 나온다. 이 영화는 ‘제4계급’ 그림에서 줌 아웃되며 시작한다.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의 젊은 모습이 궁금해 영화를 오래전에 봐서인지 볼페도 그림을 영화 오프닝에 쓴지도 몰랐다. 서경식은 “베르톨루치 감독의 아버지 아틸리오는 반파시즘 운동에 투신하여 연행된 적이 있었”다고 적었다.

영화 ‘1900’ 포스터.

영화 ‘1900’ 포스터.

이탈리아의 거리는 파시즘과 레지스탕스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곳이다. 서경식은 잔혹한 시대를 겪은 사람과 장소, 미술품을 찾아다니며 자신과 인간,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탈리아는 서경식에게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이제 다시는 갈 일은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나오고 30년 서경식은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렇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되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행을 두고‘인간을 향한 마음의 기록’이라고 했다.

다음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을 출간한 반비가 만든 자료다. 서경식 글 발췌·편집본과 도판을 반비로부터 제공받아 싣는다. 서경식이 카라바조, 마리니, 미켈란젤로, 모란디 등 작가에 관해 쓴 글이다.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 159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 159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직경 60센티미터 정도의 원형 방패 모양으로 펼쳐진 캔버스에 묘사된 것은 참수된 메두사의 얼굴이다. 머리카락대신 뱀으로 뒤덮인 머리, 사팔뜨기 느낌마저 드는 초점 안 맞는 눈을 부릅뜨고서, 벌린 입으로는 무언가 뜻도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하다. 절단된 목에서는 선혈이 치솟는다. 말 그대로 참수의 결정적 순간을 그렸다. 급속한 출혈로 인해 이 인물의 시야는 혼탁해질 테고 의식도 곧 흐릿해지리라. 반면에 뇌는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덮친 운명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그 시선이 관람자인 있는 나를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이런 그림이 이전에도 존재했을까.(25)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인 1600년은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사제였던 조르다노 부르노가 이단으로 몰려 7년의 투옥생활 끝에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진 해이기도 하다. 반종교개혁 의 시대, 로마라는 위험한 도시의 공기가 “기질적으로는 반역자였지만, 종교적 신조에서는 열광적인 정통파”였던 이 젊은 화가를 혁명가로 키워낸 셈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그 잔학함과 어리석음까지 놓치지 않고 가차 없이 그려낼 수 있었던 혁명가로.(43)

카라바조, ‘여자 점쟁이’, 1595~1598, 파리 루브르 박물관

카라바조, ‘여자 점쟁이’, 1595~1598, 파리 루브르 박물관

“저런 사람들을 말끔히 정리해버린 것이 나치였어. 독일 국민 대다수도 ‘나치가 거리를 청소해줬다.’라며 그런 난폭한 해결책을 환영했고, 그 결과가 바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지. 한국에서도 군사정권이 나치와 비슷한 일을 펼쳤고…….”

“그러네. 성가시긴 하지만 저런 사람들의 존재가 용인된다는 것만 봐도 이탈리아는 느슨하고 살기에 팍팍하지 않은 사회일지도 몰라.”

“그렇지, 신경 쓰이고 피곤한 것은 피할 수 없는 대가라고나 할까…….”

그날 나와 F와 사이에 오간 대화다.

카라바조의 초기작 중에는 ‘카드 사기꾼’과 ‘여자 점쟁이’라는 그림이 있다. 모두 우의화지만 현실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400년 이상 전에도(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도)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로마 체류 중에 계속 이러한 종류의 ‘피곤함’이 따라다녔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보르게세 공원 근처에 있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영수증을 확인했더니 주문도 하지 않고 먹은 적도 없는 샴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와 F는 얼굴을 맞대고 “치러야 할 대가, 대가……”라고 중얼거렸다.(31)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 1607년 혹은 1609~1610,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 1607년 혹은 1609~1610,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는 전 생애에 걸쳐 약 열두 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 사람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두 눈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왼쪽 눈에는 생명의 잔광이 느껴지지만 오른쪽 눈은 이미 흐릿해져버렸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 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협 없는 그의 묘사가 인간의 잔혹함, 현실 바로 그대로의 잔혹함과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47)

프라 바르톨로메오, ‘놀리 메 탄게레’, 1506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라 바르톨로메오, ‘놀리 메 탄게레’, 1506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한번은 테르미니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니커즈를 신은 소매치기 같은 남자들이 세 번이나 다가와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슈트케이스에 손을 대려고 했다. 멍하게 있으면 가방을 훔쳐갈 기색이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Don’t touch me!”라고 영어로 크게 외치며 그들을 쫓았다. 그렇게 말한 후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나를 만지지 말라)’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와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다. 예수의 무덤에 가본 마리아는 무덤 구덩이를 막아놓은 돌이 옮겨져 있고 유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가 주님의 몸을 가져가버렸다.”라며 그녀가 울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예수가 나타나 “마리아야”라며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가 “선생님!”이라 하며 다가가자 예수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아직 내 아버지 곁으로 가지 못하였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이 ‘놀리 메 탄게레’는 서양 회화에서 되풀이되며 나타나는 주제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이 역에서 만났던, 거스름돈을 챙기려던 노파가 내게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었던 일도 떠올랐다. ‘쿠오바디스’였던 걸까……. 이 유서 깊은 거리에서 교회를 몇 군데 돌면서 온통 종교화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중독이라도 된 듯 소매치기와 사기꾼들까지 기독교 이야기 속 인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67)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푸른 옷을 입은 소녀’, 1918년, 개인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푸른 옷을 입은 소녀’, 1918년, 개인소장.

‘시대정신’이라고 할까.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20년대 에콜 드 파리’의 공기를 전해주는 모딜리아니와 수틴의 작품은 확실히 어딘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50~1960년대 일본 사회의 공기와 공명하고 있었다. 빈곤과 질병으로 스러져간 천재들의 작품이 전후 일본에서 동경의 대상이 된 까닭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세적이고 실리적인 성공을 넘어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바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40대 이하의 많은 일본인들은 모딜리아니와 수틴에게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과거 3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석권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마음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랬기에 로마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모딜리아니와 재회했던 나는 마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나 자신과 다시 만난 듯한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73~75)

조르조 모란디, ‘정물’, 1951년, 볼로냐 모란디 미술관

조르조 모란디, ‘정물’, 1951년, 볼로냐 모란디 미술관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바꿔 말하면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 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조 모란디는 유서 깊은 도시 볼로냐에서 위대한 유럽 장인의 노래를 이탈리아풍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아무래도 실천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 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갔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비판적 주석이 덧붙여지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화가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개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예술운동의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리’를 두는 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169)

마리노 마리니 ‘성채의 천사’, 1948년,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반비 제공

마리노 마리니 ‘성채의 천사’, 1948년,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반비 제공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기마상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이 실현되어 가까이서 보니 과연 페기 구겐하임이 썼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감탄이 나왔지만 그 부분만을 너무 응시해서도 안 되었다.

현대 세계의 고뇌를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마리니는 한편으로는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지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마리니의 표현이 가진 온화함과 풍성함의 비밀이며, 초상 조각에서 회화 작품까지 관통하고 있는,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장점이다.(193)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머가 느껴진다. 파시스트에게 남편을 참혹하게 잃은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격을 ‘이탈리아적’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권의 예술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특징일 것이다. 내가 좋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징이다.(193)

미켈란젤로, ‘론다니니의 피에타’, 1564년, 스포르체르코성. 반비 제공

미켈란젤로, ‘론다니니의 피에타’, 1564년, 스포르체르코성. 반비 제공

미켈란젤로가 89년 생애의 고투 끝에 만든 마지막이자 미완성 작품이다. ‘미완’이라고 썼는데 분명 사실이다. 정을 한 자루 손에 쥐고 순백의 대리석 덩어리 속에 갇혀 있는 무언가를 깎아내어 바깥으로 드러내는 행위. 미켈란젤로는 몇 번이나 그 일을 시도한 끝에 결국 도중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릇 ‘미완’이란 무슨 의미일까, 예술에서 ‘완성’이란 또 무엇일까. 이 작품과 마주하면 이런 의문이 들끓듯 일어난다.(305)

나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오랫동안 선입견을 가져왔고 실제로 그의 명작을 여러 번 접했어도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격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작품을 기점으로 해서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듯 작품들을 상기해보니 또 다른 풍경이 떠오르는 듯했다. 천재 미켈란젤로는 20대에 완성이라는 영역에 도달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후에 타성에 빠진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형식’에 만족해 줄곧 그 안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완성’에서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고, 마지막으로 ‘미완성의 완성’을 남기고서 목숨이 다했던 것이다. ‘론다니니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완성’이 있었을까.(313)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