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왜구, ‘신왜구’로 거듭나…아베의 ‘경제도발’은 그 연장선

2019.07.27 06:00 입력 2019.07.27 06:01 수정
주강현

왜구의 준동은 현재진행형

조슈번에 속했던 변방의 바닷가 지역 시모노세키의 간몬해협. 국제정치 격랑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슈번에 속했던 변방의 바닷가 지역 시모노세키의 간몬해협. 국제정치 격랑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변방의 바닷가 사쓰마번·조슈번
히로부미 등 배출한 정한론의 고장
아베도 선조의 기반인 이곳 의탁

아시아서 가장 지긋지긋한 전쟁은
천년을 넘게 이어온 왜구와의 전쟁
왜구의 침략 전통 제대로 읽어야
한반도 둘러싼 역사 제대로 읽혀

약탈과 습격이라는 본질 유지한 채
왜구는 시대 따라 그 성격도 변해
이제 우린 신왜구와 또 다른 전쟁
그것은 남북 공유의 현실적 전선


■ 문명개화 서두른 변방의 바닷가 사쓰마

1870년대, 일본 규슈 최남단 변방 중의 변방인 사쓰마번(薩摩藩)이나 조슈번(長州藩) 사람은 누구나 한반도를 정벌하러 가야 한다고 믿고들 있었다. 정한론(征韓論)이 그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중앙정부에 진출했던 사쓰마번 가고시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미련 없이 낙향하자 가뜩이나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던 사무라이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막부 시절에는 번주에게만 충성하면 밥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던 하급 무사에게 남은 것은 칼자루 하나뿐이었다. 마침내 불꽃이 타올랐다. 일본 근세사의 마지막 내전인 그 반란을 사람들은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라 불렀다. 그러나 우두머리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자살하며 전쟁은 예상보다 싱겁게 끝났다. 그가 총애했던 부하들은 뒤에서 목을 쳐서 그가 좀 더 편하고 위엄 있게 죽을 수 있게 배려했다.

그로부터 120년쯤 지난 후 세이난전쟁은 조금은 생뚱맞게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다. <라스트 사무라이>가 그것이다. 주인공 가쓰모토(와타나베 겐)는 사이고 다카모리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어차피 영화니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를 수 있지만 제목만큼은 압권이다. 영화에서는 최후의 사무라이 대장 가쓰모토가 할복하는 순간 벚꽃이 지고 있었다. 가쓰모토의 강인함은 화사한 꽃잎에 파묻혀 소리 없이 변방에서 스러졌다.

사쓰마번 가고시마는 분명히 변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한판 붙고도 죽지 않고 버텼던 고슴도치와 같은, 작지만 강력한 사쓰마는 일찍이 독립 왕국 류큐를 병합하고 해양제국 건설에 몰두했다. 사쓰마번의 번주들은 누구보다 재빨리 문명개화에 나섰으니, 이미 19세기에 막부도 모르게 영국 유학생을 파견할 정도였다. 변방에서 최고의 선진적인 동력이 가동되고 있었다.

■ 한반도 침략을 주도한 조슈번

조슈번에 속했던 변방의 바닷가 지역 시모노세키는 또 어떤가? 이토 히로부미는 초등학생도 다 안다. 그렇지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그러므로 안중근은 영웅이다’라는 식의 애국심을 부추기는 교육만으로는 역사의 미완성 과제가 풀리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는 알아도 정작 조선 지배에 실질적 영향을 끼친 군사적 패권주의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모르는 반쪽짜리 교육을 하고 있지만, 다들 눈을 감고만 있다. 게다가 정작 이토 히로부미나마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 출신이다. 시모노세키를 비롯한 야마구치현 일대에는 기도 다카요시 같은 정한론 이론가가 버티고 있었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료마가 간다>에서 극찬한 당대의 지략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숙원이었던 조슈파와 사쓰마파가 결합해 삿초(薩長) 동맹을 성립시킨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네들 유신의 주역이 한결같이 정한론의 원흉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일본 군국주의 역사에서 조슈는 육군, 사쓰마는 해군을 장악한다. 러일전쟁을 이끈 도조와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도조, 이 두 해군 전략가 역시 사쓰마 출신이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미우라 고로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은 모두 조슈 출신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주도 세력은 바로 ‘이토-이노우에-미우라’로 연결되는데, 규슈의 행동대원을 동원했던 조슈 라인이었다.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서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주도 세력도 이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는 알면서 정작 일본 육군의 수장이자 침략의 대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름조차 모르며, 그들의 배경인 조슈번에 대해서도 알려 하지 않는다. 식민 시대의 청산을 주장하면서도 이런 게으름과 타성 그리고 무지가 너무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깔려 있다.

■ 한반도에 치명타 가한 열강은 해양 세력

1870년대 정한론의 대표 주자 사이고 다카모리(왼쪽 사진)로 인해 일본 근세사의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전쟁이 발발했다. 정한론 갈등을 둘러싼 인물도(가운데). 초등학생도 아는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역시 정한론의 원흉이다.

1870년대 정한론의 대표 주자 사이고 다카모리(왼쪽 사진)로 인해 일본 근세사의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전쟁이 발발했다. 정한론 갈등을 둘러싼 인물도(가운데). 초등학생도 아는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역시 정한론의 원흉이다.

역사는 말한다. ‘변방을 주목하라!’고. 제국과 식민지가 교차하는 변방의 바닷가로 가장 선진적인 사상·종교·과학기술, 심지어 전염병까지 들어왔으니 함부로 중앙과 변방을 차별할 일이 못 된다. 베이징에서 해금 정책으로 강력하게 바다를 통제하는 동안 광저우 부근 중국 남부 바닷가에서는 해적이 번성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배가 들어온 곳도 두말할 것 없이 바닷가였다. 홍콩과 마카오, 심지어 한반도의 부산 왜관과 진해, 인천 같은 곳은 외국의 문물과 침략적 세력이 들어오는 최전선이기도 했다. 변방은 문명과 문명이 교차하는 열린 광장이었고, 바닷길은 당대의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19~20세기 한반도에 치명타를 가한 열강은 모두 해양 세력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며, 프랑스·영국·포르투갈 등이 직간접으로 연계돼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안팎의 논리가 있는 법이다. 그동안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시각에만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눈을 바깥으로 돌려서 바다 건너 타자를 주체로 인식하고 반대편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러면 한반도 역사의 물마루가 훨씬 더 명료하게 보인다.

<하멜 표류기>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유명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잘 모른다. 이 책은 ‘암스테르담발(發)’이 아니라,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발’로 읽어야 한다. 하멜 일행이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바타비아(인도네시아)와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商館)이었다. 당시에는 수많은 배가 네덜란드가 건설한 포르모사(타이완)를 거쳐서 나가사키로 향했으니, 하멜의 표류는 확률상 필연적이었다. 한반도를 탈출한 하멜이 돌아간 곳도 데지마였으며, 거기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찍이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가 가고시마 해변에 도착한 이래로 일본에 천주교 포교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와중에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웅천(진해) 왜성에 나타났다. 그는 1년여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조선에서 보낸 편지’를 남겼다. 기독교 포교가 문제가 되자 포르투갈 대신 네덜란드가 에도(江戶) 막부에 의해 선택됐고, 드디어 나가사키에 데지마가 열렸다. 서구로 열린 창을 통해 난학(蘭學)이 들어와 번성했고, 일본은 근대를 준비할 기회를 얻었다.

하멜의 한반도 표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멜 표류기>를 읽을 때는 표착 지점인 제주가 아니라, 데지마로부터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다시 말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방법이 당대를 이해하는 올바른 길이 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15~16세기 대항해기의 파장은 한반도에까지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다. 히라도섬에 처음 나타난 남만인, 다네가섬에 전해진 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 동원된 철포대, 임진왜란 초기 일본인의 조총에 낙엽처럼 쓰러진 조선 병사…. 이처럼 서양에서 밀려온 대항해의 파장은 한반도까지도 엄습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만 그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사의 파장이 세계사라는 총체적 안목에서는 너무도 쉽게 들여다보인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사를 새롭게 읽는 법, 이는 바다를 제대로 읽어야만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 필연적인 신왜구의 출현

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지긋지긋한 전쟁은 ‘왜구와의 전쟁’이었다. 초원에서 일어선 칭기즈칸이 세계의 지축을 흔들었다면, 왜구는 지역은 넓지 않은 대신에 천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아시아 곳곳을 괴롭혔다. 신라의 문무대왕이 오죽하면 죽어서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왕이 되기를 원했을까. 엄청난 약탈과 살인, 방화, 인신매매로 우리는 물론이고 중국과 류큐 왕국도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대마도 아래에 위치한 이키섬에는 왜구 장수 아기발도가 신화적 존재로 구전, 전승되고 있다. 이성계와 남원성에서 한판 붙고 황산대첩에서 패한 그 유명한 소년 장수 아기발도의 고향이 바로 이키다. 이처럼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왜구가 진을 치고 있었으니 왜구의 침략 전통은 동아시아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규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14~15세기, 그러니까 여말선초에 고려와 조선을 혹독하게 괴롭히던 왜구는 원래 마쓰우라(松浦) 지방을 비롯한 북규슈의 포구와 섬을 근거지로 하던 어민이었다. 기후도 나쁜 데다 거듭된 전란으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이에 그들은 한반도 연안까지 와서 조운선이나 해안 지역의 창고 등을 습격, 약탈했다. 마구잡이로 불을 지르고 여자를 강간하고 건장한 조선인은 붙잡아 노예로 부리는 일도 많았다.

왜구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그 성격도 변했다. 그러나 약탈과 습격이라는 왜구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정한론을 내세우며 조선 침략을 감행한 주도 세력인 사쓰마와 조슈는 이들 왜구 전통의 근대적 발현일 뿐이다. 일본의 현 총리 아베 신조가 자기 선조의 기반이었던 이 지역에 의탁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제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과거의 왜구가 ‘신왜구’로 거듭나고 있다. 북으로는 홋카이도, 일명 에조치로 진출해 아이누를 식민화했고, 남서쪽으로는 류큐를 병합했으며,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고, 남양군도까지 점령했다. 이렇듯 끊임없이 남의 땅을 먹어야만 사는 정벌론자들이 일본 근대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왜구 전통의 장기 지속적 결과물이다.

왜구의 특징은 교환이 아니라 약탈이다. 일본 교과서 왜곡 사태도 국가와 민족 간의 평화와 교류를 꿈꾸는 교환 체계가 아니라, 일방적 약탈 체계 옹호로 벌어진 문제다. 바야흐로 신왜구가 준동하는 중이다. 신왜구는 한반도가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서 팔뚝처럼 들이밀어 지정학적으로 몹쓸 나라라는 황당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적반하장으로 역사를 왜곡한다.

왜구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바다의 역사이기도 하다.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와 이키섬이 훗날 임진왜란 발발 시 선봉대의 본거지, 러일전쟁의 근거지가 됐다. 신왜구 세력이라 할 수 있는 현 아베 정권이 대한민국에 경제 침략을 도발하는 것은 왜구의 전통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끊임없이 한반도를 넘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침략을 감행하는 왜구의 준동은 왜구 역사가 종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임을 알려준다.

왜구와의 전쟁을 치러온 민족으로서 우리는 이제 신왜구와의 또 다른 전쟁을 마주하는 중이다. 과거 임진왜란 때는 침략의 길을 열어주고 안내했던 우리 내부의 왜구가 있었고, 국권이 피탈되는 과정에서는 내부의 문을 열어준 일진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방식과 형식의 친일 내부 세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싸움도 병행되는 중이다. 해양 세력 일본, 신왜구와의 싸움은 오늘날 남북이 공히 공유하는 현실적 전선이리라.

▶필자 주강현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약탈적 왜구, ‘신왜구’로 거듭나…아베의 ‘경제도발’은 그 연장선


국립해양박물관장, 전 제주대 석좌교수.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민속학, 고고학 등 융·복합적 전방위 연구로 세계를 누벼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등대의 세계사> <독도강치 멸종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환동해 문명사>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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