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시민은 남성'이라는 허구… '남성성의 각본들'

2021.11.19 15:51 입력 2021.11.19 23:19 수정

남성성의 각본들

허윤 지음| 오월의 봄 | 368쪽 | 2만5000원

<남성성의 각본들>은 근대성의 표준으로 여겨진 ‘남성성’ 개념이 민족국가와 함께 형성되는 과정을 문학, 영화를 통해 추적한다. 심우섭 감독의 <남자와 기생>(1969·위쪽, 아래 왼쪽)과 <남자식모>(1968·아래 오른쪽) 등의 영화는 1960년대 성행한 여장남자 코미디로 지배적으로 군림하던 기존의 남성성에 틈과 균열을 내며 다종다양한 남성성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남성성의 각본들>은 근대성의 표준으로 여겨진 ‘남성성’ 개념이 민족국가와 함께 형성되는 과정을 문학, 영화를 통해 추적한다. 심우섭 감독의 <남자와 기생>(1969·위쪽, 아래 왼쪽)과 <남자식모>(1968·아래 오른쪽) 등의 영화는 1960년대 성행한 여장남자 코미디로 지배적으로 군림하던 기존의 남성성에 틈과 균열을 내며 다종다양한 남성성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고자의 시간.”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염상섭은 일제강점 말기를 이렇게 명명했다. 일제의 통치 아래 제 날개를 펴지 못한 조선의 상황을 그는 ‘거세된 청년’에 빗댔다. 그의 생각에 근대는 본디 ‘거세되지 않은 청년’의 것이어야 했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길을 내는 아들의 세계, 서구에서 유포된 근대성의 신화는 식민지 조선에 온전히 도래할 수 없었다. 조선이라는 아버지는 죽었으나 아들이 죽인 것이 아니었다. 제국 일본이라는 더 강력한 가부장이 나타났을 뿐. 길 잃고 헤매던 이 ‘거세된 청년’은 해방 이후 새로운 요구를 마주한다. 남성 청년은 건국과 반공의 주체인 ‘1등 시민’으로 호명됐다. 전쟁을 수행하는 강인한 육체로 기능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남성 청년들에게 적극적으로 따를수록 다치거나 죽게 되는, 그리하여 끝내 수행할 수 없는 허구의 ‘각본’을 끊임없이 들이밀었다.

<남성성의 각본들>은 근대성의 표준으로 여겨진 ‘남성성’이란 개념이 민족국가와 함께 형성되는 과정을 한국 문학을 비롯한 문화적 텍스트를 통해 추적하는 학술서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고 이성적이라 여겨지는 ‘남성다움’은 국가와 함께 구성된 허구라는 주장이 다수의 자료 분석과 함께 제기된다. 더불어 국가와 지배계급이 작성한 ‘한국 남자’라는 보편적 각본에서 탈락한 여성, 퀴어, 그리고 주변화된 남성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공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원본 없는 판타지> 등을 통해 한국 현대문학과 문화를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탐구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남성성이란 역사적 담론의 구성체이며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남성성’이란 화두에 골몰해 온 그의 결론이다.

‘근대문학의 아버지’ 이광수의 초기작에는 동성을 향한 성애적 욕망에 신음하는 남성 청년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전근대적 아버지와 대결할 기회를 빼앗긴 근대 청년들의 갈등과 고통이 이 같은 ‘퀴어함’으로 재현됐다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즘의 일환으로 남성 동급생을 사랑하는 남성 청년의 자아는 어딘가 굴절돼 있다. 이는 앞으로 한국 현대사와 함께 전개될 ‘남성성의 각본들’ 예고편처럼 읽힌다. 일제라는 가부장의 축출을 의미하는 ‘해방’은 곧 ‘날개 꺾인 청년들의 비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들의 진짜 비상은 이후로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1등 시민은 남성'이라는 허구… '남성성의 각본들'

저자는 총이나 테러, 물리적 폭력을 통해 ‘호전적 남성성’을 수행했던 해방기 청년들에 주목한다. 남성 청년은 국가 재건의 주체로 적극적으로 호명됐고 국가는 이들에게 폭력을 장려했다. 우익단체 서북청년단은 그렇게 형성된 ‘호전적 남성성’의 표상이다. 갈고리와 죽창으로 설명되는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국기와 애국, 용맹이라는 남성적 가치로 거듭난다.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끔찍한 폭력을 자행하고도 이들은 반성할 줄 몰랐다. 해방의 아들이자 건국의 주체인 이 남성들에겐 공산주의와 싸움을 벌인다는 명분이 마련됐다. 이 각본의 생명력은 꽤나 질겨서, 국가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2014년 광화문광장,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는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이유로 세월호 리본을 철거했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은 시민권의 위계를 설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됐다. 전쟁에 나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군인만이 ‘1등 시민’으로 대접받았고, 이는 곧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성성’의 기준이 됐다. 그러나 이 위계화에 따르는 남성들은 죽거나 장애를 입고 남성성을 훼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남성도 도달할 수 없는, 내용 없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 바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인 것이다. 속 빈 강정에 불과한 남성성의 내용은 어떻게 채워졌을까. 저자는 “대한민국을 건설한 건강한 남성 국민은 (성적으로 방종한) ‘아프레걸’ ‘자유부인’ 등의 여성성을 통해 구성된다”고 썼다.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은 여성들의 저임금 노동력에, 정치적 안정은 미군 기지촌과 같은 여성 거래 시스템에 기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와 함께 힘을 키운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1등 시민’은 곧 남성이라는 허구를 유지해야 했다. 그때 동원된 것이 ‘여성은 시민이 되기엔 너무나 방종하다’는 전형적 여성혐오다.

저자는 국가와 함께 형성된 이 강고한 젠더 규범에도 균열을 낸 이들이 있음을 주목한다. 1950년대 화려한 전성기를 맞았던 여성국극단, 1960년대 성행한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가 대표적이다. 창극단의 젠더 위계에 반발해 형성된 여성국극단은 ‘남성성’을 과잉되게 연기하며 이것이 결국 각본에 불과함을 폭로했다. 여성 역시 신체와 상관없이 남성성의 수행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여장을 하고 기생, 식모로 일하게 되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임권택의 영화 <남자는 안팔려>(1963)나 심우섭의 영화 <남자식모>(1968), <남자와 기생>(1969)은 결국 이성애적 규범으로 봉합된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포섭되지 못한 주변화된 남성들의 모습을 노출하며 ‘여자-되기’를 통해 이 남성성의 유해함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책은 박정희 정권이라는 ‘아버지’에 맞서 독자적인 ‘아들’의 서사를 완성한 진보진영의 남성 지식인들이 결국 통치 이데올로기나 다름없는 여성혐오를 ‘남성성’의 유지 동력으로 삼았음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박정희 정권도, 이에 대항하며 ‘민중’이라는 남성적 주체를 내세운 지식인들도 “프랑스 시집을 읽는 소녀”로 표상되는 부르주아 여성을 혐오하며 스스로의 남성됨을 형성했다. 그 끝에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여성 민중의 연대와 실천, 저항은 리얼리즘 문학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그가 ‘남성성의 각본’을 경유해 돌아본 한국 문학사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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