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을 캐는 아버지와 예쁜 딸이 살았네

2023.01.13 14:47 입력 2023.01.13 18:58 수정

한국의 가족, 익산, 1971,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한국의 가족, 익산, 1971,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우리의 삶이란 아득한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놀이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욕망이란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넓은 바다로 띄워 보내는 소꿉놀이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서 가족은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며, 가없는 하늘가, 고요하고 아득한 바닷가에서 함께 뛰노는 벌거숭이의 아이들이며, 사랑하는 나의 클레멘타인인 것이다.”

가족은 한평생을 써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이야기의 원천이다. 우리가 ‘영원한 청년작가’라 부르던 고 최인호 작가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연재소설도 <가족>이었다. 1975년 시작했던 수필 같은 소설은 포켓용 잡지 월간 ‘샘터’를 통해 독자를 만났다. 잡지사 대표가 말했다. “샘터가 없어지거나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재하시오.” 서른 살의 최인호가 대답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쓰겠습니다.” 연애담과 신혼일기로 시작했던 <가족>의 연재는 작가의 손녀가 등장할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됐다. 34년6개월. 국내 잡지 역사상 가장 긴 연재소설이었다.

스스로 ‘고통의 축제’라 불렀던 5년이라는 긴 투병의 시간을 보내던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으로 홀연히 떠나 버렸다. 작가가 남겨 놓은 가족의 이야기들은 단행본으로 묶여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1984년 발행된 <신혼일기>를 시작으로 2009년 <가족 앞모습>과 <가족 뒷모습>까지 9권의 단행본이 출판됐다. <가족 앞모습> 표지에는 아들 도단이를 목말 태운 서른두 살의 최인호를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을 찍은 이는 “함께 있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사진 찍던 날의 추억을 책날개에 적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작가주의 사진가로 평가받는 주명덕이다. 책 사이사이에는 주명덕 작가가 사진기자로 일하던 시절 찍었던 ‘한국의 가족’ 연작을 비롯한 15점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의 가족, 논산, 1971,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한국의 가족, 논산, 1971,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셀 때마다 한두 명 차이가 날 만큼 등장인물이 많다. 마흔다섯 명인 것 같다. 카메라를 향해 엎드려 절하고 있는 개를 포함한다면 마흔여섯. 1971년 논산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사진을 찍자고 집안 어르신한테 네 차례나 설득했다. 가족들 뒤로 보이는 지붕은 볏짚이다. 아직은 새마을 운동의 물결이 미치지 못했던 마을인가 보다. 가족계획사업은 말해 무엇하랴. 같은 해에 찍은 사진이지만 서울 동부이촌동의 가족은 단란하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고 있는 젊은 부부의 가족들이 아파트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자녀를 낳는 것조차 정부가 간섭했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외로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1인 가족’이 흔해빠진 지금의 눈으로는 행복해 보인다.

‘한국의 가족’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들을 1971년부터 기록한 사진 연작이다. 주명덕의 말에 따르면 “특별히 거창한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민국 가족의 유형에 빈민층은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중랑교 일대 판자촌에 사는 가족의 사진을 문제 삼았다. 주명덕의 사진과 함께 월간 ‘중앙’에 실렸던 여성 사회학자 이효재 교수의 빈부 계층별 시리즈 기사도 거슬렸다. 애당초 3년을 기획했던 주명덕의 ‘한국의 가족’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72년에 막을 내렸다.

한국의 가족, 서울 동부이촌동, 1971,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한국의 가족, 서울 동부이촌동, 1971,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사진기자 시절의 주명덕은 자기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독일 사진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모국의 관상학적 초상을 집대성했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이야기. 예술가, 숙련된 무역업자 등 7가지 범주로 분류된 잔더의 사진집 <시대의 얼굴>이 1929년에 출판됐다. 나치는 마지막 범주를 문제 삼았다. 백치, 병자, 광인 등의 초상이 담긴 ‘최후의 사람들’은 나치의 우생학과 아귀가 맞지 않았다. 계급 의식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사진집 서문도 눈엣가시였다. 사진집은 모조리 압수당하고 사진 건판도 파괴당했다. 살아남은 잔더의 필름은 모국이 아닌 미국에서 빛을 보게 된다. 뉴욕현대미술관의 사진부 디렉터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상실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재건하려는 원대한 기획을 추진했다. 1955년 개막한 대규모 사진전 <인간 가족>이다. 68개국의 사진작가 273명이 촬영한 503점의 사진들이 걸렸다. 전범국 독일인의 초상을 담은 잔더의 사진들이 포함된 <인간 가족>은 인류는 하나의 대가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파리에서 열렸던 <인간 가족> 순회전을 본 롤랑 바르트는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이 행하는 몸짓들의 보편성”을 보여주려 한 기획이라고 <현대의 신화>에 썼다.

세계를 돌며 ‘인간 대가족’이라는 신화를 전시했던 <인간 가족>은 2년 후 서울 경복궁에서도 개최됐다. 6·25전쟁을 기록했던 사진가 임응식은 <인간 가족>의 국내 전시를 부탁하는 편지를 디렉터 에드워드 스타이켄에게 보냈다. 세계대전만큼 혹독한 전쟁을 치른 한국에서의 <인간 가족> 개최는 합당했다. 당초 25일 동안 예정됐던 전시는 일주일이 연장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 사진작가들에게 준 영향도 컸다. 당대의 사진가들은 ‘회화주의’와 ‘리얼리즘’이라는 대결 구도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사진 미학을 경쟁적으로 주장했다. 인류의 생로병사를 기록한 <인간 가족>은 리얼리스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최봉림 뮤지엄한미 부관장은 <인간 가족> 한국 전시가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이 한 쌍을 이루는 휴머니즘적 리얼리즘이 상당 기간 한국 사진계의 한 흐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는 오는 4월16일까지 ‘한국의 사진사 54년’을 펼쳐놓는다.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가 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청동에 새로 마련한 전시관의 개관전이다. 정해창의 <예술사진 개인전람회>가 광화문빌딩에서 열렸던 1929년에서부터 <임응식 회고전>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1982년까지의 한국 사진사를 전시한다. 사진 원판에 기초한 프린트와 인쇄물로 구성된 사진의 역사다. 정해창의 사진전은 사진가의 미학적 역량을 개인전으로 선보인 최초의 전시였다는 점에서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이후의 사진작가들은 조형성을 강조하는 ‘회화주의’와 기록성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의 큰 흐름을 형성하며 한국의 사진 미학을 구축해 나갔다.

섞여진 이름들,1963_1965,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섞여진 이름들,1963_1965,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한국 사진사에서 리얼리즘의 물꼬를 튼 <인간 가족> 이후로 주목해볼 만한 한국 사진작가의 전람회가 있다. 1966년 서울 중앙공보관 제1전시실에서 열렸던 주명덕의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이다. 혼혈 고아들의 초상을 담은 주명덕의 사진전은 파문을 일으켰다. 대학생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그럴 만했다. 신문 문화면에 대서특필됐고, 혼혈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설까지 실렸다. 주명덕은 사진과 함께 글을 첨부하는 미국의 사진 잡지 ‘라이프(Life)’의 형식을 따랐다.

“혈육도 없습니다. 생활도 없습니다. 물론 감정도 없습니다. 단지 내게는 검은 살갗과 거역하지 못할 ‘숙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형처럼 큰 눈망울의 어린 소녀가 인형을 품에 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하얀 블라우스 왼쪽 가슴에 적힌 ‘이혜숙’이라는 한글은 소녀의 이름일까? 흑백사진으로 찍힌 소녀의 얼굴빛은 검다. 원피스와 인형의 피부는 하얗다. 혜숙이가 <인간 가족> 사진전을 관람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품에 안은 인형처럼 어른이 되면 하얗게 변하리라 기대했을까? 아니면 약간은 누레질 것이라 예상했을까? 혜숙이의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쏠리맥, 데이비드, 조, 그리고 남아, 순남…. 섞여진 이름들처럼 버림받은 아이들의 생각이 ‘인간 대가족’이라는 신화에 섞여들어갈 수 있었을까? 홀트씨 고아원의 초상들은 1969년 <섞여진 이름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으로 출판된다.

섞여진 이름들,1963_1965,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섞여진 이름들,1963_1965,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섞여진 이름들,1963_1965,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섞여진 이름들,1963_1965, Gelatin Silver Print ⓒ주명덕, 뮤지엄한미 소장

청년 주명덕이 혜숙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누이 덕분이다. 1963년이었다. 고아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한다던 누이가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걱정하는 어머니는 누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대학생 아들을 보냈다. 고아원에 발을 들여놓은 주명덕은 아이들의 반 이상이 혼혈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모든 아동은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미국인 ‘해리 홀트’가 운영하는 고아원이었다. 주명덕은 아이들에게 장난감도 사주고 편지도 썼다. 만남은 3년 동안 지속됐다. 백인, 흑인, 그리고 한국인의 얼굴이 섞인 초상을 사진에 담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섞여진 이름들>은 사진으로 기록된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다. 주명덕은 사진집 뒷장에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여 이념과 주장으로 카메라에 모아 놓게 하는 모티브가 되었다”고 후기를 적으며 자신의 카메라가 향해야 할 곳을 제시했다. “앞으로 나의 사진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모아서 우리의 문제들을 현실에서 찾아서, 사회에 반영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 결과가 될 것이다.” 스물아홉 살의 사진작가는 초심을 지켜나갔다. 주명덕은 작가 노트에 ‘한국’이라는 단어를 많이 채워 나갔다. ‘한국의 이방’ ‘은발의 한국인’ ‘한국의 메타모포시스’ 그리고 ‘한국의 가족’….

전몽각 개인전, 포토에세이 <윤미네집>, 1971. / 뮤지엄한미 소장

전몽각 개인전, 포토에세이 <윤미네집>, 1971. / 뮤지엄한미 소장

주명덕이 전국을 돌며 한국의 가족사진을 찍고 있던 시절에 자기 가족들을 찍은 사진들을 전시장에 건 사진작가가 있었다. 사진의 리얼리즘을 고민했던 ‘현대사진연구회’를 창립한 고 전몽각 선생이다. 그는 밥벌이를 위해 토목공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지만 사진기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1971년 열렸던 전몽각의 개인전 <윤미네 집>은 큰딸이 태어나던 1964년부터 찍었던 가족 앨범이다. 윤미가 열네 살이 될 무렵 전몽각은 가족 앨범을 동명의 개인전으로 다시 공개했다. 그는 딸이 시집가던 날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26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소설가 최인호가 <가족>을 연재하기 이전부터 전몽각은 사진에 담긴 가족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손에 쥔 도구는 달랐지만 전몽각과 최인호는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한국 중산층 가족의 연대기로 엮어낸 낭만적인 리얼리스트였다.

큰딸이 시집가자 전몽각은 <윤미네 집>을 사진집으로 기념하고 싶었다. 사진집을 편집하고 출판한 이는 주명덕이었다.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라는 부제를 달았다. 사진집의 마지막은 성인이 된 윤미씨가 시집가던 날의 장면이다. 딸의 손을 잡은 전몽각이 결혼식장에 들어선다. 셔터를 누른 이는 전몽각과 주명덕의 사진 친구 강운구였다. 노년의 강운구는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사랑받는 사진집 <윤미네 집>의 인기 비결을 궁금해한다. 김수영의 시 ‘나의 가족’은 이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까?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