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른 김근원과 산의 기억

2022.12.16 13:13 입력 2022.12.16 19:02 수정

지리산 노고단산장의 겨울. 1983년   ⓒ김근원

지리산 노고단산장의 겨울. 1983년 ⓒ김근원

노고단의 밤은 유난히도 추웠나 보다. 고단했던 몸을 추스르고 겨우 눈을 뜨니 산장의 유리창에는 얼음꽃이 피지 못하고 이파리들만 들러붙어 있었다. 창가의 랜턴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나 보다. 얼음 이파리들은 랜턴 가까이에는 날카로운 손을 뻗지 못했다. 산장의 손님들은 불멍에 빠져 들었을까? 텁수룩한 털보 산장지기의 만담에 잠 못 이루는 이들도 있었겠지. 혹시나 있을 길 잃은 등산객을 위해 호롱불을 끌 수는 없었기에 산장지기는 입담을 키워야 했을 거야.

산장지기들은 왜 하나같이 털보였을까? 이야기보따리를 무성한 털 속에 숨겨놓기 위해서?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았을 텐데, 산장지기들은 어느새인가 우리 산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지키던 정상 언저리의 터는 군사시설 같은 이름의 ‘대피소’가 들어섰다. 조훈현 9단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던 빨간 베레모를 쓴 산장지기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그들을 그리워하는 한 사진가의 뷰파인더를 통해 과거의 우리 산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설악산 만경대. 산악인 김정태가 귀때기청봉을 바라보며 수첩에 산에 대한 정보를 적고 있다.   1958년 ⓒ김근원

설악산 만경대. 산악인 김정태가 귀때기청봉을 바라보며 수첩에 산에 대한 정보를 적고 있다. 1958년 ⓒ김근원

설악산 용대리의 새끼 반달곰이 등산객의 과자를 받아먹던 시절 이야기이다. 산꾼들이 한국 산악사의 허리 부분이라고 지목하는 195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까지의 풍경들. 산악사진가 김근원은 등반 기념으로 세운 돌무덤 케른처럼 그 시절의 산 사진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식물학자 정영호 교수는 1986년 책 <한국식물분류학사개설> 초입에 김근원의 사진을 싣고 ‘케른’이라는 호를 헌정했다. 올해는 고(故) 케른 김근원 선생의 100주년. 유고 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과 같은 제목의 사진전이 지난달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다. 회현동의 전시공간 피크닉은 <국내여행(Grand Tour Korea)>의 한 테마인 ‘첩첩산중’에서 그의 사진들을 걸고 유품들도 공개한다. 내년 2월 19일까지. 김영일 작가가 찍은 평창의 산 사진 영상과 고 김영갑 작가의 제주도 오름, 그리고 영국 작가 마이클 케나가 찍은 신안의 섬과 바다 사진들도 감상할 수 있다.

강원도 인제. 백담사 들목에서 어슬렁거리는 반달곰을 마을 주민이 데려다 기르면서 용대리의 명물이 됐다. 1959년 ⓒ김근원

강원도 인제. 백담사 들목에서 어슬렁거리는 반달곰을 마을 주민이 데려다 기르면서 용대리의 명물이 됐다. 1959년 ⓒ김근원

<산의 기억>은 ‘사진가 김근원의 산과 사람들’이라는 부제처럼 산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연은 산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시작됐다. 북한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김근원은 한 소년의 도움을 받아 백운대까지 올랐다. 2년 후 울릉도와 독도 탐사를 떠나는 해군 함정에서 그는 소년을 다시 만났다. 소년의 이름은 유창서였다. 훗날 그 앳된 소년이 ‘설악산 반달곰’이라고 불리는 권금성 털보 산장지기가 될지 누가 알았을까? 모든 인연이 소중하지만, 김근원에게 산장지기는 각별하다. 산장이 없었다면 새벽녘, 그리고 해질 무렵의 그 많은 풍광을 찍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장지기는 김근원의 진정한 후원자였던 셈이다. 그가 사진전을 열면 설악산, 지리산, 북한산의 산장지기들은 출석 도장을 찍었다. ‘지리산 호랑이’라 불리며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노고단 산장지기 함태식은 “김근원 사진전은 함태식 음주전”이라며 술을 대놓고 마셨다. 김근원은 사진을 만들 때마다 산장지기를 그리워했다. 털보 산장지기들은 겨울 산에서 추위에 떨며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김근원에게 뜨거운 커피부터 안겨 주었다.

“자 여기 왔으면 우선, 따뜨으읏한 커피 한 잔, 먼저 해야 합니다.”

김근원의 유산을 보존하고 발굴하는 용산의 작업실을 산장지기처럼 지키는 그의 아들 김상훈씨가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종로의 집을 찾아온 산악인들에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곰보빵 한 조각에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아들은 아버지의 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가 먹었던 홍차에 적신 ‘마들렌 효과’란 이런 것인가? 아버지의 이야기에 빠져든 아들의 입가에서, 나는 노적봉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김근원의 미소를 보고 있었다. 김근원의 잃어버린 시간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북한산 백운대에서 하강 준비를 하고 있는 산악인들. 1958년.   ⓒ김근원

북한산 백운대에서 하강 준비를 하고 있는 산악인들. 1958년. ⓒ김근원

북한산과 더불어 한국 알피니즘의 요람이었던 도봉산의 오봉을 배경으로 찍은 아주 평범한 기념사진 한 장이 있다. 한국산악회의 나무 심기 행사가 열렸던 1965년의 따뜻했던 봄날이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봉산에 올랐다. 아버지의 친구들도 동행했다. 설악산 백담산장 지킴이 윤두선, 북한산 인수봉 정면벽 바윗길을 개척한 김정태, 성악가이자 중학교 음악 교사였던 양천종이다. 우이암에 이르자 아버지는 세 친구 사이에 두 아들을 세웠다. 찰칵. 김근원은 무엇을 위해 이 다섯 명의 기념사진을 찍었을까?

“아버지가 왜 굳이 이분들과 함께 사진을 찍게 했던 의도가 무엇인지, 이제서야 알게 됐습니다.”

기념사진 중심에서 포즈를 잡고 있던 중학생은 훗날 아버지처럼 사진작가가 된다. 김근원의 장남 김상훈 작가다.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받겠다는 원대한 포부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부가 시원치 않아 대학 예비고사도 떨어졌다. 재수도 별 소용없었다. 그러던 차에 서라벌예술대학교 학생 모집 광고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한번 해볼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은 괜히 속담이 된 게 아니었다. 합격증을 보여주자 아버지는 ‘씨익’ 웃었다.

아버지는 23만점이 넘는 사진을 남기고 2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방대한 아버지의 유산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내가 과연 아버지의 사진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막상 시작하니 자책감이 들었다. ‘이런 귀중한 자료가 사라질 뻔했구나!’ 4000장이 넘는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하니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들 속에는 살아생전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산에 대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팩트 확인을 위해 사진에 찍힌 인물들을 찾아다녔다. 도봉산 선인봉 B코스를 초등한 산악회 슈타인만 클럽의 전담, 소년 시절에 만나 아버지와 인연을 이어갔던 설악산 권금성 산장지기 유창서 등 원로 산악인들은 아들의 기억에 대한 보증인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와 산 친구들, 그리고 본인의 기억을 버무린 아들은 결심했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되기로! 아버지의 탈을 쓴 김상훈 작가는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썼다. 안 될 거 없었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청탁받은 원고를 아들이 대신 써주기도 했다. 아들은 살아생전 케른 김근원 선생의 공인받은 대필 작가였던 것이다. 지난해 출판된 <산의 기억>에 수록된 사진들과 이야기는 이렇게 복원됐다.

북한산 능선에서 바라본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 그리고 노적봉. 1971년    ⓒ김근원

북한산 능선에서 바라본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 그리고 노적봉. 1971년 ⓒ김근원

“산이 아름다워서 내가 아름답게 느꼈는지, 아니면 내 마음이 아름답게 보려고 했는지 몰라도, 나는 결국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야 말았다.”

1954년 10월 거대한 바위로 솟구친 북한산이 아버지의 눈을 사로잡았다. 일제 강제징용과 6·25전쟁에서 살아남았던 아버지가 가족 곁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간 이유를 김근원의 아들은 끝내 헤아릴 수 없어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썼다. 산을 오르지 않는 이들은 대개 등산의 이유를 묻는다. 아버지는 옹색한 변명이 싫었다. 아이들, 어머니, 그리고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유를 밝혀야 했다. 확실한 이유는 바로 사진이었다. 배낭에 넣어 다니던 작고 까만 카메라! 소년 시절 삼촌에게 선물받은 카메라는 산과 아버지를 탯줄처럼 연결시켰다.

울릉도. 촛대바위 앞 해변에서 야영을 하던 윤두선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1956년.    ⓒ김근원

울릉도. 촛대바위 앞 해변에서 야영을 하던 윤두선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1956년. ⓒ김근원

한국산악회 등 크고 작은 산악모임은 아버지의 길라잡이가 됐다. 해방 후, 한국산악회는 일제하에 유린당했던 국토의 구명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른바 ‘국토구명사업’이었는데, 많은 지식인이 참여하고 각종 과학 장비를 동원해 우리 국토에 대한 학술조사 사업을 이어갔다. 등산을 마치면 뒤풀이가 아니라 보고회를 열었다. 아버지도 사진 보고전을 개최했다. 1956년 울릉도와 독도 탐사 보고전을 시작으로 설악산 등 전국 명산의 보고전을 이어가며 산악사진가로서의 명성을 케른처럼 쌓아갔다. 1967년 일본 산악사진협회 해외사진가상도 수상했다. 앤설 애덤스의 하프돔을 연상시키는 도봉산 선인봉 사진이 1976년 국제산악연맹 회보 표지에 실렸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사진술을 성공시켰다. 35㎜ 필름카메라에 항공 필름을 장착해 사진의 해상도를 탁월하게 높였다. 아버지의 밀도 높은 사진을 본 이들은 아버지의 작은 카메라를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1989년 한국산악사진가회가 창립되자 아버지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케른 김근원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제1의 산악사진가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산악계를 벗어난 곳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별로 없었다. 아들은 필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오로지 산악사진의 예술성에만 승부를 걸었고, 시대적 코드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사진들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1956년 노적봉에서 찍은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의 파노라마’ 사진이 대표적이다. 제각기 다른 산세를 자랑하는 세 봉우리의 자태를 지켜보는 산악인 네 명의 뒷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모직 양복을 입고 사파리 모자와 ‘도리구찌’라 불렀던 사냥 모자를 쓴 산악인들의 뒤태는 고가의 아웃도어 브랜드가 넘쳐나는 지금보다 더 멋스러워 보인다. 특히 등산용 밧줄인 자일을 둘러메고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얹은 이의 포즈는 가히 패션모델처럼 느껴진다. 아들은 이 파노라마 사진을 아버지의 책 <산의 기억> 표지로 펼쳐 놓았다.

북한산 파노라마. 노적봉에서 바라본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 1956년 ⓒ김근원

북한산 파노라마. 노적봉에서 바라본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 1956년 ⓒ김근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틀렸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산은 태초의 자태 그대로다”라고 적는다. 변한 것은 다만 인간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1959년에 찍은 지리산 사진을 보면 천왕봉은 그대로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천막을 치고 매점을 운영하던 사람들의 풍경은 사라졌다. 장터목에서 도벌하는 나무꾼들을 이제 마주칠 수는 없으며, 노고단산장에서 만났던 반야봉을 좋아한다던 법정 스님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한라산은 어떠한가? 1957년에 찍힌 백록담 사진에는 분화구 풀밭 위에서 야영하는 장면이 포착돼 있다. 1958년 설악산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은 득도하셨을까? 울산암 아래서 흔들바위를 밀고 있던 스님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큰스님이 흔들릴 때까지 밀라 하셨습니다.” 일행이 다시 물었다. “뭘, 크게 잘못하셨나 보죠?” 스님은 ‘씨익’ 웃더니 사라져버렸다.

울릉도. 통구미를 지나 남양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1956년    ⓒ김근원

울릉도. 통구미를 지나 남양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1956년 ⓒ김근원

사진은 사라지는 것들에 맞선다. 이것이 바로 사진의 가장 큰 힘이다. 우리는 그래서 오래된 사진을 보며 ‘시간의 덧없음’에 당혹해하기도 한다. 겨울 온실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롤랑 바르트가 전율했던 이유는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사진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복원하는 김상훈 작가는 이러한 사진의 힘을 알고 있다. 그는 오늘도 작업실 스캐너에 아버지의 필름을 건다. 서둘러야 한다. 아직도 되돌리지 못한 김근원의 시간들이 거대한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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