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들어내면 하늘에 남는 것

2023.02.10 10:35 입력 2023.02.10 19:09 수정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뜻이 좋다고 이름까지 괜찮은 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이 그렇다. 봉천동. 서울 관악산 아랫말 이름이다. 마을이 하늘을 받들고 있는 모양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소설가 조경란이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자기가 사는 곳이 싫지는 않았다. 동네 이름이 마뜩치 않을 뿐. 그래서 서울대입구역에 산다고 말했던 적도 있다.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관청이 발벗고 나섰다. 2008년 9월1일 행정구역 봉천은 개명했다. 은천동, 행운동, 낙성대동, 중앙동 등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봉천동이 사라질까? 택시를 타고 중앙동에 가자고 하면 기사가 어디인지 몰라 결국 조경란은 봉천동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려야 했다.

노란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말했다. “저 달을 들어내면 하늘엔 뭐가 남겠냐?”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저 달을 들어내면 하늘에 구멍 하나 남질 않겠냐. 너는 작가가 아니냐. 모든 사람의 생애는 구멍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니라. 그 구멍을 오래 들여다보너라.” 고민하던 조경란은 봉천동에 눌러살기로 결심한다. 목수인 아버지가 지은 3층짜리 집 옥탑방에서. 그런 탓에 그의 자전적 단편소설의 제목은 <나는 봉천동에 산다>라는 이름을 달았다.

사진집으로 엮는다면 조경란의 소설보다 두꺼울 것이다. 오는 3월5일까지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열리는 <뮈에인, 내 마음속의 오목렌즈>는 봉천동을 비롯한 서울의 가난했던 옛 동네를 찍은 사진 196장을 펼쳐 놓는다. 네 명의 사진작가 김정일, 임정의, 최봉림, 김재경이 참여했다. 이들은 가난한 동네의 구멍을 오목렌즈를 통해 오래 들여다보았다. 왜 하필 오목렌즈냐고? 당장의 이익을 좇는 근시안으로는 우리 삶을 멀리 내다볼 수 없으므로.

■김정일, 포클레인에 맞서다

기억 풍경-도곡동,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기억 풍경-도곡동,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1982년 어느 날 신문 지면에, 지금으로 말하면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40여 개의 개발지구가 발표됐다. 투기의 시작이며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발점이다. 이 신문 쪽지를 가지고 한 군데씩 지워가며 촬영을 다녔다.”

사진가의 작가노트는 대학생 시절의 기억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수업을 듣던 김정일은 아주 적절한 소재를 신문에서 발견한다. 길음동, 금호동, 신길동, 대신동, 신당동, 장위동, 목동, 묵동, 반포동, 대치동, 압구정동, 도곡동…. 곧 사라져 버릴 장소에 대한 목록은 프랑스 사진가 ‘으젠느 앗제’를 떠오르게 했다. 앗제는 오스만 남작의 도시개발 계획으로 곧 사라져버릴 파리의 구시가지를 낱낱이 기록했다. 김정일의 사진에는 앗제의 것처럼 사람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는 다르다. 앗제는 사람이 필요 없었고, 김정일은 사람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낯선 타지 사람이 사진찍을 수 있는 것은 뭘까? 무명씨의 집들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 정도는 양해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김정일은 열정적인 수집가처럼 가난한 집들의 유형들을 정면으로 사진에 담았다.

신문과 카메라를 손에 든 김정일은 매봉산 근처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고 불리던 마을을 찾는다. 지금은 마을 이름 다음에 타워팰리스라는 영어 이름이 따라붙는 곳, 도곡동이다. 50여 년 전 김정일은 이곳에서 우물이 있는 언덕 위의 집 한 채를 발견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언덕이 아니었다. 포클레인이 땅을 파내 집이 있는 곳만 언덕처럼 남아있었을 뿐이다. 위태로워 보인다. 구겨진 함석 슬레이트 담장으로 개발의 광풍을 얼마 동안 막아냈을까? 김정일은 사진 찍을 당시 그곳에서 두엄 냄새가 지독했다고 그의 사진집 <기억의 풍경>에 적어 놓는다.

기억 풍경-압구정,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기억 풍경-압구정,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기억 풍경-봉천동,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기억 풍경-봉천동,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기억 풍경-묵동,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기억 풍경-묵동,c.1982, archival pigment print ⓒ김정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임정의, 골목길을 노래하다

금호동야경_1993_archival pigment print ⓒ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금호동야경_1993_archival pigment print ⓒ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최근 시를 짓고 있는 사진작가 임정의는 1980년대 서울 풍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그의 집안에는 그를 포함해 4명의 남자들이 돈 안 되는 기록 사진을 찍었다. 숙부 임석제, 아버지 임인식, 그리고 아들 임준영. 그러니 임씨 가문이 찍은 사진들은 1980년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의 대부분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같은 장소를 3대에 걸쳐 기록한 사진도 있다. 선친 임인식이 항공사진으로 남겨 놓은 동대문운동장과 남대문 일대가 그렇다.

임인식의 항공사진에는 가난한 동네가 없다.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6·25전쟁 이후의 풍경이었으니까.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진가의 길을 선택했던 임정의는 대한민국 건축사진가 1세대로 활동했다. 그는 틈틈이 의뢰받지 않은 건축물의 풍경들을 묵묵히 기록했다. 아버지만큼의 높이는 아니지만, 꽤 높은 곳에서 우리가 사는 장소의 풍경을 담았다. 금호동 산00번지. 그가 사는 곳도 꽤 높은 곳이다. 임정의는 “한국은 없애는 건 잘하지만, 기록은 빵점”이라며 기록 사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건축학과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쳤던 그는 “자신의 삶 보다 이웃의 삶을 깊이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골목길을 걷던 임정의는 공공장소를 사적인 용도로 활용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골목길 하늘을 가로 지르는 빨랫줄, 통행로에 불법 건축한 작은 장독대, 제맘대로 증축한 난간들…. 하지만 다들 서로 이해했다. 그네들의 집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식구들 몸만 누일 수 있는 만큼 작았기 때문이다. 임정의는 살가운 장소의 풍경을 기억하며 자기 사진 옆에 시를 적는다. “그림자도 제 길이를 뻗지 못하는 골목길은 매우 한적했답니다.”

신림7동가로를이용한건조대_1984_archival pigment pritn_ⓒ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신림7동가로를이용한건조대_1984_archival pigment pritn_ⓒ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상계동, 1990, archival pigment print ⓒ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상계동, 1990, archival pigment print ⓒ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봉천5동외곽가로_1985_archival pigment print ⓒ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봉천5동외곽가로_1985_archival pigment print ⓒ임정의,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최봉림의 봉천동 순례길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가현문화재단 한국사진문화연구소장이자 사진작가인 최봉림은 30여 년 전 찍은 봉천동의 필름을 그 시간의 격차만큼이나 빛이 바랜 세피아톤으로 인화했다. 1989년 봄, 최봉림은 사진가가 되기 위한 훈련 무대로 자기 이웃마을 봉천동을 선택했다. 상도동 종점에서 시작해서 봉천동 끝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순례자의 길 같았다. 1주일에 4번 정도 2년을 다녔으니, 사진가의 얼굴을 익힌 주민들도 있었을 터. 그래서 최봉림의 사진에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안경을 쓴 개들도 사진가를 알아보고 포즈를 취한다. 수탉 두 마리는 도대체 왜 그리 높은 전봇대 위로 올라갔을까? 폭격을 맞은 것처럼 보이는 마을 공터에 치솟는 불길은 거센 바람에 흩날린다.

‘서울 달동네 1990, 봉천동’이라는 제목을 단 최봉림의 사진들은 ‘달동네’하면 흔히 떠올리는 ‘추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훗날 중산층이 되어 아파트 베란다에서 원도심을 내려다보는 감상적인 시선은 아닌 것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 그리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감. 이 알쏭달쏭한 상황은 조경란의 <나는 봉천동에 산다>와 잘 어울린다. 최봉림은 조경란의 아버지가 말했던 ‘삶의 구멍’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 사진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은 관람객 몫이다. 조경란이 최봉림의 사진을 본다면, 단편소설 한두 편쯤은 더 써 내리라는 생각이 든다. 궁금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봉림의 사진 구멍으로 빠져든다.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서울 달동네 1990,봉천동,c.1990,inkjet print, ⓒ최봉림,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김재경의 침묵하며 바라보기

mute-053-봉천3동, 1999, gelatin-silver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mute-053-봉천3동, 1999, gelatin-silver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건축사진가 김재경의 사진은 골목에서 바라본 주거지의 풍경들이다. 세기말인 1999년과 2010년에 사진을 찍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의 시간인데, 그보다 더 아득히 먼 시간의 격차가 느껴진다. 왜 그럴까? 그가 찍은 장소에는 도저히 사람이 등장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때문이다. 유령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그가 찍은 장소는 패망한 고대 도시의 유적지처럼 보인다. 그래, 패망은 예견된 미래였다. 더 높이 솟구치려는 현대 도시의 욕망을 어떤 소시민이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중세 유럽의 도시를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도시의 공기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부르주아지와 임금 노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민들은 도시의 성벽 안에 살 수 없었다. 00시티, 00스테이트, 00팰리스, 00캐슬 등 건설사가 만든 브랜드 이름을 단 주소에 전입할 수 없는 서울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골목길은 누구나 걸을 수 있으나, 고층 아파트 복도는 아무나 돌아다닐 수 없다.

김재경의 작가노트에는 “지금까지 휘둘린 우리의 주거, 도시환경처럼 그것이 외양에만 그치는 것은 판타지와 스펙타클 사회를 가속화하는 일”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환상에 사로잡혀 외면하는 누추한 공기감”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 높이와 모양새가 다른 계단,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암석, 삐뚤고 휘어진 가정집 외벽으로 만들어진 골목길 사진들은 촉각적이다. 건축물의 무게감도 피부에 와닿는다. 그의 사진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은 소리다. 마치 침묵의 시간이 봉인돼 있는 장소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장소감이 느껴진다. 쉿! 입을 다물라! 그리고 삶의 장소를 온전하게 바라보라! 김재경은 자신의 사진에 ‘mute’라는 제목을 단다.

동숭동(2009년)_091103_1-1_18 2009, archival pigment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동숭동(2009년)_091103_1-1_18 2009, archival pigment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mute-027-옥수동, 1999, gelatin-silver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mute-027-옥수동, 1999, gelatin-silver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mute-027-옥수동, 1999, gelatin-silver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mute-027-옥수동, 1999, gelatin-silver print ⓒ김재경, 서울대학교미술관 제공

■고요를 명령하라

뮈에인(myein). ‘신성하게 하다’는 뜻의 그리스어다. ‘맺다’, ‘닫다’에서 유래했다. 성스러운 예식은 신의 전령이 고요를 명령하며 시작된다. 철학자 한병철은 “고요는 특별한 수용성, 심층적이며 관조적인 주의집중과 짝을 이룬다”고 <리추얼의 종말>에 적는다. 그는 루이 다게르가 1939년경 찍은 프랑스 파리 탕플 대로의 풍경 사진을 예로 든다. 변변치 않은 초기의 사진술은 상당히 긴 노출 시간이 필요했다. 사진에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고, 고요히 있는 것들만 남아있다. 한병철이 말하는 “관조적인 주의집중”은 이처럼 “길고 느린 것에 대한 지각”이다.

김정일, 임정의, 최봉림, 김재경의 사진이 한데 모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삶의 장소를 신성하게 바라본다. 30여 년 전 찍은 필름들을 버리지 않고(김정일, 최봉림), 3대에 걸친 사진 아카이브를 수집하고(임정의), 묵언을 수행하며 골목길을 걷는 일(김재경)은 모두가 일종의 고행이며 ‘리추얼(의식)’이다. 리추얼은 반복되며 시간에 리듬을 부여한다.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는 리추얼을 필요로 한다. 다시 한번 ‘뮈에인’의 뜻을 되새겨 본다. 쉿! 전령은 고요를 명령한다. 진실은 고요 속에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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