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혁명의 산물이 아닌 전쟁의 산물이다”

2023.08.18 21:06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출판평론가

[책과 삶]“헌법, 혁명의 산물이 아닌 전쟁의 산물이다”

총, 선, 펜
린다 콜리 지음·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 616쪽 | 3만5000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소싯적 마르고 닳도록 외웠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과 제2항이다. 이 조항들이 국민 혹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와는 별개로 국민의 기본권,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면서 국가 기관과 권력을 구성, 배분하는 것은 헌법의 기본 목적일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헌법이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 곧 군주의 권력이 국민에게 이양되는 하나의 징표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미국, 독일, 러시아에서 대개의 성문 헌법은 혁명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18~20세기 초 성문 헌법 발달 추적
1755년 코르시카의 첫 헌법부터
미 독립전쟁·1차 세계대전 등 통해
프랑스 등 서구 혁명 결과물 아닌
전쟁·침략·폭력과의 연관성 밝혀

1776년 미국 독립전쟁 롱아일랜드 전투 당시 미합중국군. 미국은 독립전쟁을 치르며 헌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왼쪽 그림). 인쇄술의 발달은 성문 헌법 확산에 이바지했다. 위키피디아

1776년 미국 독립전쟁 롱아일랜드 전투 당시 미합중국군. 미국은 독립전쟁을 치르며 헌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왼쪽 그림). 인쇄술의 발달은 성문 헌법 확산에 이바지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영국 출신으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린다 콜리는 <총, 선, 펜>에서 헌법이 “민주주의적 열망이나 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의 잿더미나 침략의 위협”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성문 헌법이 발달한 과정을 추적하면서 “근대 국가와 근대화한 상태를 말해주는 트레이드마크”인 성문 헌법이 “전쟁 및 폭력의 양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밝힌다. 번역을 맡은 김홍옥은 ‘옮긴이의 글’에서 이를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헌법을 만든다”는 말로 요약한다.

저자에 따르면, 성문 헌법은 놀랍게도 1755년 지중해의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섬은 역사 이래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항시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1755년 7월 제노바공화국에 맞서 “사실상 반군 총사령관이자 행정부 수반”에 선출된 파스칼레 파올리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10쪽에 달하는 헌번 초안”을 작성해 ‘헌법’(costituzione)이라고 명시했다. 엄청난 권력이 파올리에게 집중되기는 했지만 “조세 및 법률 제정에 관한 책임을 지녔을 뿐 아니라 폭넓게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인 의회(General Diet)가 조직되면서 코르시카 공화국은 성문 헌법을 최초로 갖춘 국가의 위용을 지니게 되었다. 저자는 파올리가 “주요 유럽 강대국들 간의 해상 경쟁”, 즉 “전쟁 위협과 전쟁의 발발”에서 가난하고 사분오열된 코르시카를 지키기 위한 장치로 “혁신적인 성문 입헌주의”를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최초의 성문 헌법을 제정한 코르시카 공화국은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저자가 코르시카의 사례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즈음부터 서구 열강이 “육상에서의 싸움뿐 아니라 해상에서의 싸움을 계획적으로 혼합한 전쟁”인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인명과 비용 측면에서도 대가가 클뿐더러 해상과 육상을 넘나들며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됨으로써 그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 투쟁을 아우르고, 악화시키며, 그 결과 훨씬 더 위험하고 파괴적으로 거듭나는 분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7년 전쟁이 시발점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는 그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저자의 학문적 집요함은 이 대목에서 발휘된다. “만연한 전쟁, 전쟁의 규모와 속성의 변화는 중요한 정치적·영토적 교란”을 일으켰고, 끝내는 여러 국가들이 “사상과 관례의 변화를 촉발하는 핵심 요인”으로서 성문 헌법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러 전쟁으로 제국들이 붕괴하면서 새로운 통치 체제와 권위를 재구성하기 위한 최적의 방편이 곧 성문 헌법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본질적으로 혁명이 전쟁보다 더 매력적이고 건설적인 현상”이라는 오래된 시각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쇄 발달·빨라진 선박의 영향에
성문 헌법은 세계적 현상 자리매김
백인 남성 민주주의 조항에 관대
여성·비백인 차별 수단으로 활용

총이 성문 헌법 도입을 추동했다면 확산에 이바지한 것은 인쇄술이다. 흔히 최초의 성문 헌법이 태어난 나라로 알려진 미국의 경우 18세기 후반 독립전쟁을 치르면서부터 헌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특히 1776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미국의 주(州) 헌법들은 “정기적으로 재판(再版)을 찍었으며, 해외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의 장기적인 하이브리드 전쟁에 맞서 프랑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외국에 나간 미국 외교관들과 상인들의 손에는 미국 헌법 사본이 들려 있었다. 18세기 중엽 “정부·법률·권리의 체계화 및 개혁과 관련한 계몽주의에 매료”된 이들은 “저술의 수량과 창의성 면에서 폭발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인쇄술은 이를 뒷받침하면서 성문 헌법의 자장 또한 넓어졌다.

저자가 성문 헌법이 18세기 후반 이후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빨라진 선박”을 꼽는 것은 어쩌면 앞선 논의들을 아우르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지역을 가리지 않았고, 인쇄물들은 그사이 세계 곳곳에 배를 타고 당도했다. 한편으로는 “남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중동의 정치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유럽, 미국 및 기타 지역의 헌법에 대해 배우고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서 성문 헌법은 세계 도처로 퍼졌다.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헌법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그 정도가 한층 더했다. 물론 “비서구 지역의 헌법 제정자들”은 서구에서 배운 성문 헌법을 단순히 베끼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의 특정 요구에 맞게” 고쳐 썼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탄생한 일본 헌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하고 성스러운” 존재인 천황의 지위를 오히려 더 강력하게 부여했고, 일본 거주민들이 “시민으로 전환”되는 일도 없었다. 일본 헌법은 서구 열강의 위협, 즉 “전쟁과 계속되는 폭력의 위협”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위협을 다시 배를 통해 동아시아와 전 세계로 돌리고야 만다.

성문 헌법을 제정한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을 무릎 꿇린 후 “이제 국가는 오직 근대적 헌법을 가짐으로써만 적절하게 세계 다른 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여러 나라에서 힘을 얻었다. 한 중국 외교관은 “다른 나라들이 부유하고 강력해진 이유는 주로 헌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성문 헌법은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성문 헌법이 남성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전개된 상황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고대 이래로 “여성의 법적 정체성”은 “그녀의 남편, 그리고/또는 다른 가까운 남성 친척의 정체성”에 포함되었다. 문제는 초기는 물론 20세기 초반까지도 성문 헌법이 여성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초 미국 각 주의 헌법은 “백인 남성 민주주의를 위한 조항들”만 점점 관대해졌고, “여성의 배제는 역시 한층 명료”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의 전투 의무를 적극적인 시민권을 위한 배타적 적합함과 연관 짓는 것은 새로울 게 없는 일이었다.” 여성뿐 아니라 백인 침략자들과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토착민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도 성문 헌법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일부 제국은 그들의 영토 확장을 방해하는 민족, 특히 비백인 민족을 차별하고 그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주는 데 이 새로운 헌법을 써먹었다.” 펜(pen)으로 명명된 다양한 사상적 배경, 그것을 명문화한 인쇄술의 발전은 이처럼 성문 헌법의 세계화, 그리고 명과 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제(機制)라고 할 수 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문해력 수준의 급격한 확산”과 대중 매체의 발전과는 별개로 성문 헌법이 시민들에게 그 본의가 충분히 인지되고 있는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헌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을 정의하고 기술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나라에서 통치 체제가 구축되고 권한이 행사되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는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토머스 제퍼슨의 말마따나 “성문 헌법은 비록 열정 또는 기만의 순간에 유린당할 수도 있지만, 깨어 있는 자들이 다시 국민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 삼고 국민에게 상기시킬 수 있는 텍스트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성문 헌법이 우리의 오랜 믿음처럼 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전쟁의 산물이며, 그것이 인쇄술과 다양한 전파 경로를 통해 오늘의 체제로 만들어졌다는 저자의 주장은 대담하기까지 하다. “더없이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하며 폭력적인 세상에서” 탄생했지만, 오히려 그런 세상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는 점에서 성문 헌법은 나름의 역사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 선, 펜>은 근대 세계 성문 헌법의 출현과 확산을 통해 우리 시대 헌법과 그것을 해석하는 좌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저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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