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촘촘하고 더 끈끈하게…인터넷 같은 연결망 ‘편지 공화국’을 열다

2023.10.06 20:35 입력 2023.10.21 08:45 수정
이은수 교수

(16) 르네상스와 편지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연재글의 순서를 따라 마지막 순서로 검토하고 있는 동사 ‘소통하다’와 관련해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편지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번 로마의 길이 구축한 물리적인 연결망을 따라 편지가 어떻게 지식의 소통을 촉진해왔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며 흩어진 지식공동체를 서로 연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는지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번 연재의 무대는 중세에 다소 드물어졌던 편지의 소통이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한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의 유럽이다. 이 시기에 편지를 쓰고, 보내고, 또 받아들었던 사람들이 편지를 통한 소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 걸음 더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연휴 기간 동안 나는 늦은 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포럼에서 발표할 연사를 섭외하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의 비영리기관 대표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에게 e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이달 말에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수학과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스 델포이로 떠날 예정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e메일, 사회관계망서비스, 국제 학술 콘퍼런스, 그리고 전문 학술단체와 같은 다양한 지식의 연결망을 통해 이전에 교류해본 적이 없던 학자들과도 언제나 손쉽게 소통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학문의 세계는 대부분 편지의 교환을 통해 연결됐다.

물론 우리가 이미 다뤘던 바와 같이 편지는 아주 오래된 소통 수단 중 하나였다. 결코 새로운 소통 방식이라고 할 수 없는 편지가 지식의 소통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서유럽에서 13세기 말에 양피지를 대신해 리넨 종이가 더 구하기 쉬워지고 저렴해져 급속히 확산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편지의 양적 증가와 확산만으로 르네상스 시대 편지가 수행했던 다양한 역할과 면모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편지의 르네상스에 관심을 가졌던 폴라 핀들렌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는 편지가 등장하는 초상화들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편지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던 과정들을 재검토했다. 핀들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편지는 1450년부터 초상화에 등장하기 시작해 1500년대 베네치아 초상화에선 편지를 들고 있는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 화가가 한 인물을 그리며 포착할 수 있었던 수많은 장면 중 편지를 받아든 순간을 선택한 것은 편지가 르네상스 지식인들에게 소통을 위한 일상적인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드라마틱한 순간을 선사하는 도구였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로쏘 피오렌티노의 그림 <편지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의 초상>. 이미지 크게 보기

로쏘 피오렌티노의 그림 <편지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의 초상>.

편지가 등장하는 많은 초상화 중에서 두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끈다. 첫 번째 작품은 로소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가 그린 ‘편지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의 초상’(1518)이다. 비록 이 그림이 편지를 펼쳐 읽고 있는 인물을 묘사한 첫 번째 사례는 아니지만, 마치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감상자가 내용을 거의 읽어볼 수 있을 정도로 편지가 완전히 펼쳐져 있고 편지의 접힌 주름도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마치 이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에 의해 편지 읽기를 방해라도 받은 듯이 우리를 응시하는 젊은 남자의 시선에서 편지를 받아 읽는 수신인의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피오렌티노의 그림이 편지를 읽는 수신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 것에 비해, 야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는 1552년쯤 발신자와 수신자를 동시에 그려 넣은 초상화를 선보였다. 초상화는 두 남자가 한 통의 편지에 의해 서로의 우정을 돈독하게 가꿔온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마침 이 두 사람이 함께 들고 있는 편지가 보여주는 글귀는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De Amicitia)>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다른 모든 사회적 의무와 관계보다 우정을 높이 칭찬하고 있다. “우정은 가장 많은 이득을 가지고 있다네. 자네가 어디로 돌아서든지 우정은 함께하며, 어느 곳에서나 방해되지 않으며, 결코 시의적절하지 않은 때가 없으며, 결코 힘들게 하는 법이 없다네. 그리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을 끊고 불을 끊어도, 우리는 많은 경우 우정 없이는 살 수 없다네.”

야코포 다 폰토르모의 그림 <두 친구들의 초상>.  위키피디아

야코포 다 폰토르모의 그림 <두 친구들의 초상>. 위키피디아

이 그림이 그려지기 약 100년 정도 앞서 1443년에 시칠리아의 인문주의자 조반니 아우리스파(1376~1459)는 로렌초 발라(1407~1457)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학생이기도 했던 발라와의 우정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자네와의 교우가 언제나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고, 자네의 지적인 탁월함에 대해 지금까지도 또 앞으로도 계속 지대한 존경심을 가질 것이기에, 내가 [공무로 인하여] 자네와 교제하지 못하고 자네의 지적인 통찰로부터 깨달음을 얻지 못할 때마다 무척이나 속상하곤 했네. 실로 친구들과의 좋은 우정 속에 살면서 그 우정의 열매로서 편지를 보내고 또 돌려받는 것은 내게 있어 최고의 즐거움이었네.” 아우리스파의 말대로 폰토르모의 그림 속에 등장한 ‘우정의 열매’로서의 편지는 이제 편지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무미건조한 매개체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생생한 통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핀들렌 교수는 르네상스 시대 편지가 재발견된 것을 이렇게 요약한다. “편지는 생생한 손을 통해 생각과 열정, 욕망과 명령을 전달했다. 글을 쓰는 것에는 편지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마법이 있었으며, 이미지로 묘사된 것에 도전하는 ‘단어로 된 초상화’였다. 편지는 한 사람의 행위의 소품으로서 르네상스 초상화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 역시 펜이 종이에 닿는 순간부터 살아 숨쉬는 대상이었다.”

17세기에 조직된 과학 학회는
지속적이고 폭 넓은 편지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나누고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르네상스를 거쳐 이전보다 더 친밀하고 생생한 소통의 통로로 인식되기 시작한 편지의 연결망은 17세기에 조직된 여러 과학 학회들의 사회적 연결망과 여행을 통해 형성된 물리적 연결망에 의해 지속적으로 두꺼워지게 됐다. 단적으로 말해, 편지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시대(1466~1536)부터 프랭클린 시대(1706~1790)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고 비판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눈에 보이는 정치체제가 아니지만
지리·정치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혁신적 발견을 가능케 한 원동력

그래서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lingua franca)로 사용해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의 장거리 상호 소통이 가능하게 했던 이 편지의 연결망을 보통 ‘편지공화국(Res Publica Litterarum 또는 Res Publica Literaria)’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비록 눈에 보이는 어떤 정치체제를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편지공화국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앤서니 그래프턴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교수는 이 공화국의 시민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파하고 비판하는 데 있어 일종의 공통 규범을 공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근대 초기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편지공화국이 자신들이 속했던 지리적 공간만큼 중요했던 정신적 세계였음을 밝혀냈다. ‘편지공화국’의 학자들이 지리·정치적 경계를 뛰어넘어 지식을 공유하고 혁신적 발견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최단시간강하곡선’ 문제를 던진
베르누이의 편지와 뉴턴의 답장은
지식 나눔의 눈부신 사례다

베르누이의 문제를 담은 1696년 악타 에루디토룸 부분 발췌. 이탤릭체로 기술된 부분이 베르누이의 문제이다.  위키피디아 이미지 크게 보기

베르누이의 문제를 담은 1696년 악타 에루디토룸 부분 발췌. 이탤릭체로 기술된 부분이 베르누이의 문제이다. 위키피디아

때로 역사는 수학 문제를 통해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볼 수 있다. 요한 베르누이(1667~1748)의 ‘최단시간강하곡선’ 문제는 편지공화국에서 편지를 통한 지식 교환의 눈부신 사례 중 하나다. 그는 악타 에루디토룸(Acta Eruditorum)의 지면을 빌려 동료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고했다.

“나 요한 베르누이는 이 세계의 가장 명석한 수학자들에게 고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는 꼬임이 없고 또 도전할 만한 문제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명성을 얻을 것이고 그 해답은 영원한 기념비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과 페르마가 그랬던 선례를 따라, 나도 자연을 탐구하는 우리 공동체의 은덕을 입고자 우리 시대 가장 훌륭한 수학자들 앞에 그들의 탐구 방법과 또 지적 능력을 시험해볼 만한 문제 하나를 내놓고자 합니다. 만일 누군가라도 제가 제안한 문제에 대한 답을 회신해 오신다면 저는 그 사람의 이름을 큰 칭송과 함께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696년 6월.”

이어서 그는 최단시간강하곡선으로 알려진 유명한 문제를 꺼내들었다. “평면 위에 높이가 다른 두 점이 있다고 할 때, 마찰 없이 중력의 영향만으로 구르는 구슬이 높은 지점에서부터 낮은 지점까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굴러 내려올 수 있는 선의 모양은 무엇인가?”

물리학과 기하학의 교차에서 탄생한 이 도전은 단순한 해답을 넘어, 근대 초기 학문의 생태계를 장식한 수많은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일으켰다. 과학과 수학, 철학의 여러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이들이 자신의 해답과 아이디어를 빠르게 공유했다. 그리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유럽의 대지를 휩쓸고 있을 때, 베르누이의 최단시간강하곡선의 문제를 담고 있었던 편지 한 장이 아이작 뉴턴의 집에도 도착했다. 그는 단 하룻밤 만에 최단시간강하곡선이 사이클로이드(직선 위로 원을 굴렸을 때 원 위의 정점이 그리는 곡선)의 모양을 취한다는 풀이를 적어 익명으로 베르누이에게 답신을 보냈다. 풀이의 비범함을 보고 이내 그 익명의 수학자가 뉴턴임을 알아차린 베르누이가 “사자의 발톱을 보고 사자를 알아보았다(tanquam ex ungue leonem)”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베르누이의 문제가 대표적으로 말해주듯이, 편지공화국 지식인들 사이의 흥미로운 발견들이 근대 초기 학문계의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켰다. 이 네트워크는 편지를 통해 아이디어와 발견을 공유하는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연결망이 보여주는 지식의 교환과 협력의 강력한 힘은 근대 초기의 편지가 마치 오늘날의 ‘인터넷’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편지공화국의 연결망이 증진시킨 소통의 속도와 효율성이 학문적 발전을 가속화했다.

드라마틱한 순간을 선사한 편지
생각의 전달이 디지털로 바뀐 오늘
발신·수신자의 그림 속 교감을
우린 다시 복원할 수 있을까

오늘 각종 고지서와 광고전단만 드문드문 배달되는 우리집 우편함을 괜히 한번 더 열어보면서, 그리워하던 친구와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편지를 받아들고 그것을 열어보기까지 설렘을 느꼈던 때를 아련하게 추억해본다. e메일과 카카오톡으로 바로바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각과 감정이 맺어지는 기쁨은 그만큼 줄어들지 않았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쯤에서 다시 피오렌티노와 폰토르모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이 그림 속에서 편지를 발신하는 사람과 수신하는 사람이 느꼈을, 편지가 고유하게 전달하는 그 생생한 생각과 감정을 디지털로 대체된 시대에도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지 숙고해볼 문제이다.

이은수

[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더 촘촘하고 더 끈끈하게…인터넷 같은 연결망 ‘편지 공화국’을 열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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