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도 관계도 쉽게 로그아웃하는 사회…당신은 AI와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까

2023.10.20 20:26 입력 2023.10.21 08:57 수정
이은수 교수

(17) 소통의 풍요 속 친밀함 빈곤

그래픽 | 현재호 기자 hyun@kyunghyang.com

그래픽 | 현재호 기자 hyun@kyunghyang.com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알려져야 할 소식이 뉴스룸의 문턱을 넘지 못한 때가 있었다. 뉴스 게이트키퍼는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소식 중에서 방송 혹은 신문 기사로 내보낼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가려내는 일을 하는 자리다. 그러나 사안의 경중을 따져본다는 것이 때로 힘없는 소수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문턱을 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때까지 자기를 희생해 메시지를 전달해온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되새겨보자면 그만큼 오랫동안 방송과 출판의 인프라는 고비용이 요구되는, 그래서 소수만 발신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였다. 그 결과로 중앙 한곳에 몰린 소통의 인프라를 움켜쥐고 있던 사람들은 수많은 목소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할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목소리들이 저녁 뉴스와 조간신문 기사로 나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던 그 길목에만 잘 버티고 서 있으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통 검열·통제 없앤 소셜미디어
수십억명 연결 ‘글로벌 커뮤니티’
항상 연결돼 있지만 친밀함 ‘빈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식의 소통의 검열과 통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누구나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생각을 게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곳곳의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보도하는 사람이 언론계에 꽤나 오랫동안 몸 담아온 숙련된 저널리스트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사건이 벌어지던 그 찰나의 중요한 순간에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를 잡은 이 증인은 카메라 앱을 켜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다소 엉성한 앵글 그대로 방송하더라도 주요 방송사의 시청률과 맞먹을 만한 시청자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 소셜미디어들을 자주 써오면서도 이 연결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는지 체감하지 못할 때가 있다. 어차피 이 연결망이 내 레이더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친구들과 계정들은 적정선에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3년 2분기 기준 페이스북의 활성 사용자 수는 거의 30억명에 육박하는 상황이고, 유튜브는 25억명, 인스타그램은 20억명에 가깝다. 매일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일일활성 사용자 수만 하더라도 20억명에 가깝다.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돼 지식, 의견과 뉴스를 비롯한 정보를 발신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고, 이는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하던 편지공화국의 지식인들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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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확장돼 형성된 대규모 소통 커뮤니티에 관해 지속적으로 두 입장이 부딪혀왔다. 한 입장은 당연히 ‘세계를 연결하고’ ‘세계를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페이스북을 만들었다던 마크 저커버그의 입을 통해 주로 옹호됐다. 2017년 그가 페이스북의 비전을 재정립하는 목적으로 공유한 ‘글로벌 커뮤니티를 만드는 여정’이라는 글과 2019년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표현의 자유’에 초점을 맞췄던 연설이 대표적이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초기부터 이 연결망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의견을 표현할 기회를 부여해왔음을 강조해왔다. 그러다가 조금씩 페이스북을 통해 여러 문제들이 터져 나오자 지난 몇 년 동안은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으로부터 페이스북이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찾곤 했다. 부족, 도시, 국가로 점점 더 공동체의 크기가 커져가면서 더 큰 규모의 새로운 사회 인프라가 출현해왔던 것처럼 이제 단일국가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기후환경 위기, 전염병 문제, 테러리즘 확산 등의 위협에 대응할 ‘글로벌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가 그리는 글로벌 커뮤니티는 ‘연대하고, 안전하고,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참여하고,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구성이다. 이것이 그가 메타로 회사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페이스북의 가장 중요한 비전으로 간주됐다.

다른 입장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여러 부작용들이 저커버그가 주장하는 글로벌 커뮤니티의 구성이라는 순기능의 혜택을 차감하고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정보와 소통의 검열은 어떤 방편으로든 여전히 시도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통의 차단이 아니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와 다양한 목소리들 속에서 어떻게 필요한 목소리를 찾고 적절한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저급한 허위 정보들이 정작 중요하고 진실을 담고 있는 정보들에 쏟아야 할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앗아가는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방치되고 있다. 페이스북의 담벼락을 스크롤하면서 보게 되는 친구의 포스팅과 그 외 잡다한 광고들은 시각적으로 교묘하게 비슷해서 서로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광고 수익을 극대화하고 싶은 회사로서는 사용자들이 친구의 일상을 읽어내던 마음 상태의 연장선에서 비슷한 친숙함으로 광고들을 읽을 수 있도록 배치해뒀기 때문이다. 이런 피로들이 오랫동안 누적되면 더 깔끔한 인터페이스를 갖춘 곳을 찾게 되지만 새롭게 얻은 소통망조차 여전히 온라인상의 네트워크임에는 변함이 없다.

20세기 초 미국의 연방대법원 판사였던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허위 정보와 오류로 가득한 잘못된 연설들에 대한 최고의 치료법은 더 많은 연설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침묵할 것이 아니라 허위 정보를 정정하는 더 많은 메시지를 발송하라는 제안은 시민들이 대부분 지상파TV와 주요 일간지라는 비교적 한정된 언로(言路)를 통해 정보들을 들었던 과거에만 유효한 해결책이다. 오늘날 우리는 처음 허위 정보가 담긴 메시지를 받았던 사람에게 다시 제대로 된 정보가 발송되도록 그 사람을 원래 채널에 계속해서 붙들어둘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채널에서 저 채널로 끊임없이 옮겨가고 있는 대중의 주의와 관심을 붙들어두기 위해 발신자들은 자극적인 제목들과 섬네일들을 계속 뿌리고 있을 뿐이다.

소통의 연결망이 확대돼 접속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게 됐다는 것은 분명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상황은 고대 아테네가 추구했던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발언할 권리, ‘이세고리아’가 구현된 이상적인 상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소통의 발신이 지나치게 급격하게 불특정 다수에게로 확장된 상황에서 우리가 이 수많은 발언과 그 속에 담긴 정보들을 제대로 취사선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양질의 지식과 정보를 선별적으로 취합하는 큐레이션이 시급하다는 문제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소통과 관련해 다른 심각한 문제는 분명 전보다 더 많은 소통을 하고 있는데도 점점 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MIT(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에서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셰리 터클은 <외로워지는 사람들(Alone Together)>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더욱 “소통의 풍요 속에서 친밀함의 빈곤”을 느낀다는 점을 지적했다. 온라인 네트워크에서 매일 수백, 수천개의 메시지를 교환하면서 항상 연결돼 있었으나 사실은 전혀 연결돼 있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온라인 소통이 여러 일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태스킹으로 인해 덜 집중된 상태로 이루어지거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대개 따라오는 여러 친밀한 몸짓과 접촉을 결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면해 의견 조율하는 수고 대신
문제 상황 때마다 덮어두고 회피
전원 끔으로써 관계의 짐 덜어

점점 더 뚜렷이 드러나는 친밀함의 빈곤을 관찰해온 학자들이 결정적으로 우려하고 있는 것은 의견의 충돌이나 감정의 오해가 쌓여 관계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온라인 소통은 그 문제의 상황을 쉽게 덮어두고 회피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대면해서 이야기할 때 혹은 전화로 대화할 때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끝까지 의견을 조율하고 해묵은 감정을 풀어내는 수고를 해야 했던 때와는 달리 이제 우리는 로그아웃해버리거나 전원을 끔으로써 손쉽게 그 관계의 짐을 덜어버릴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클릭 한번으로 친구가 되었으므로 다시 클릭 한번으로 친구를 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를 끊다(unfriend)’라는 영어 단어가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등장 이후에야 생겼을 정도로 맺은 시간만큼 정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들었던 소통 관계의 깊이는 급격하게 얕아졌다.

새삼 우리가 지난 회에 봤던 키케로의 우정론 글귀를 담은 편지를 나란히 들고 있던 두 친구의 그림이 낯설게 느껴질 대목이다. 이 그림에서 느껴지던 우정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이제는 많이 가벼워진 탓이다.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닌 기성세대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옛 경험에 기초해 이 상황이 무엇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아직 이 넓고 얕아진 소통의 결과가 무엇일지 사실은 제대로 헤아리고 있지는 못하다. 온라인 소통이 가져온 장점과 단점의 대차대조표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소통의 관계가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임계점을 우리가 벌써 지나버린 것은 아닌지 불안해할 뿐이다.

새로운 소통과 우정에 대한 우리의 셈법에서 하나의 지표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던바의 수(Dunbar’s Number)’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인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로빈 던바는 자신의 이름을 딴 ‘던바의 수’란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던바의 수는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말하는데, 각 사람의 외향·내향적 성향에 따라 대략 100명에서 230명 사이의 범위 안에 다양한 값을 가진다. 그러나 대개 이 수는 150명이다. 던바는 이 150명 중 비교적 더 가까이 지내는 50명이 있고, 그보다 더 친밀하게 소통을 하는 15명이 있으며, 가족이나 가장 깊이 사귀는 친구는 5명가량으로 친밀함의 정도가 점점 더 고조된다고 봤다. 이 수의 구조가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대체로 바뀌지 않는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던바의 중요한 관찰이다. 그러나 좀처럼 변화가 없던 이 던바의 수가 온라인 네트워크 속 새로운 방식의 소통과 사귐을 통해 변하고 있다는 것이 고민을 심화시킨다.

진정한 사귐 잃고 외로운 인간들
이미 AI 로봇과의 관계 ‘시험대’
친구의 대상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디지털 소통과 관계 맺음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 아직 충분히 영글지 않은 이때, 벌써부터 인공지능 로봇과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다른 새로운 실험이 시작됐다. 살아있지 않은 개체와의 우정과 사랑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해도 정당한가? 반대로 살아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인문학자의 시각에서 기술의 발전을 다른 말로 치환하면 ‘오래 묵은 고민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찾기도 전에 늘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되는 행위’이다. 일단 이 새로운 고민을 담은 종이를 가져다가 덧대어 비춰보아야 할 첫 장소는 우정과 사랑의 의미를 파헤친 오래된 고전 속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소통 문제에 대한 고민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시작하는 이들이 꽤 있다. 총 10권 중에서 2권을 ‘친애’에 할애하여 친애의 종류를 나누고 이상적인 사귐을 고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무생물과의 친애는 가능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인공지능 로봇과의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사귐과 소통이 주는 즐거움과 유익들을 많이 잃어버린 빈궁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로봇과의 소통과 우정에 계속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점점 더 그것 외에 달리 정서적 외로움을 달랠 대체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나는 인공지능이 지난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돌아와 봄을 맞은 이 순간이 소셜네트워크의 황금기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이 참 절묘하다고 느낀다. 온라인에서 맺어졌던 수많은 사회적 연결망의 ‘소통의 풍요’ 속에서 ‘친밀함의 빈곤’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다시 ‘친밀함의 풍요’를 맛보기 위해 ‘소통의 빈곤’을 택하려 하고 있다. 내가 마음대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사귐과 돌봄의 로봇은 더 이상 외로움을 해갈하려 누군가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또 다른 유명한 글귀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친구 없이는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제 그 친구의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새롭게 정의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을 뿐이다.

이은수

[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소통도 관계도 쉽게 로그아웃하는 사회…당신은 AI와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까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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