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통제해 진리를 목격하려는 ‘실험실’은 근대과학의 환유어

2023.11.03 22:10 입력 2023.11.03 22:13 수정
이은수 교수

(18) 지식이 탄생하는 곳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에 등장하는 학술원 ‘살로몬의 집’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공간이 나와 눈길
로버트 보일의 ‘진공 펌프’ 실험은 과학사적으로 유명
유럽에 한동안 있었던 ‘해부 극장’도 의학 발전에 일조

조지프 라이트의 그림 ‘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 로버트 보일의 실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성질에 대한 지식을 당시 유럽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위키피디아

조지프 라이트의 그림 ‘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 로버트 보일의 실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성질에 대한 지식을 당시 유럽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위키피디아

이 연재는 처음 예고했던 대로 지난 글들을 통해 인간 지식의 획득과 공유의 근간을 이루는 4개의 동사 ‘발견하다’ ‘수집하다’ ‘읽고 쓰다’ ‘소통하다’를 다시 서술해왔다. 편의상 4개 영역으로 나눠 살펴봤지만, 각각의 동사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4개 동사 사이사이를 연결하면서 전체를 관통할 방법들을 여럿 생각해볼 수 있겠다. 대표적으로 ‘목격하다’란 동사를 하나의 실 삼아 전체를 엮어볼 수 있다.

‘발견’을 다른 말로 치환하면 자연 속 신의 흔적(2회), 잃어버렸던 지식의 유산(3회),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지의 세계(4회)를 ‘목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수집은 세상의 모든 지식이 한곳에 모여든 도서관(6회), 흩어진 지식들을 다시 모으는 필사의 노력(7회),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는 자연의 극장(8회)을 ‘목격’하는 사람들로 이어졌다. 읽고 쓰기의 세계가 열리고(10회), 책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된 후(11회), 인쇄 활자를 통해 책들이 퍼져나갈 수 있는 시대가 열리자(12회), 지식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통은 이 ‘목격’의 필연적인 결과로 따라왔다. 자유롭게 자신이 목격한 바를 경쟁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때도 있었지만(13회), 때로 모든 연결망이 끊어지자 지식의 목격자로 고독하게 버텨온 사람들도 있었고(14회), 이후 편지 공화국에 이르게 되면(15회), 지식을 목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여러 초기의 과학 학회들로 태동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렇게 발견하고, 수집하고, 읽고 쓰고, 소통하는 행위들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면서 각각의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은 ‘목격하다’라는 동사를 국어사전은 ‘눈으로 직접 보다’라는 뜻으로 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의 발견이 하나둘씩 쉬운 것부터 소진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눈으로 직접 보기 어려운 것들만 남겨진다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현미경과 망원경을 사용하기도 했고,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호기심의 방을 만들어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진기한 사물과 생물들의 표본을 수집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연재글에서 다룬 바 있다.

결국 과학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 이 목격이 연루되는 발견, 수집, 서술, 소통의 작업을 더 고도화하는 일이다. 그래서 과학사를 읽는 여러 독해 방식 중 하나는 이 목격의 능력과 범위가 어떻게 확장돼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사를 읽어나갈 때, 영국의 법률가이자 자연철학자였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입을 통해 자연 속의 진리를 더 잘 목격하려 특별히 고안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베이컨의 사후 출판된 유명한 저작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그런 특별한 공간을 그려낸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베이컨의 유토피아 사회 ‘벤살렘 왕국’의 핵심에는 지식이 탄생하는 곳인 ‘살로몬의 집(Salomon’s House)’이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미래를 그리는 이곳은 이렇게 묘사된다.

“솔로몬 전당(살로몬의 집)이라 불리는 학술원의 건립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있던 제도 가운데 가장 고귀한 기관은 우리 왕국의 등불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에 대해 연구하는 기관이지요. (중략) 우리 학술원의 목적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과 작용을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 활동의 영역을 넓히며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김종갑 옮김)

학술원의 구성원들은 각자 여러 임무와 활동을 수행했다. 먼저 ‘빛의 상인’ 12명이 있었다. 벤살렘 왕국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외부와 교류하는 일을 단절했기에 신분을 감추고 외국에서 활동하던 이 상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얻은 발견들과 실험에 관한 자료들을 벤살렘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약탈자’라고 불린 회원 3명은 서적에 적힌 실험들을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고, ‘신비인간’이라고 불린 다른 회원 3명은 기계기술, 인문예술 혹은 학문기술로 편입되지 않은 영역에서의 실험들과 사회적 관행들을 수집하곤 했다. 새로운 분야를 실험하고 연구하는 회원 3명은 ‘개척자’라고 불렸으며, 앞서 언급된 회원들의 연구 활동에 이름을 붙이고 목록을 만들며 이로부터 새로운 이론과 원리를 도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회원들을 ‘편찬자’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실험 결과의 데이터를 추론하는 역할, 그 데이터에 근거해 새로운 실험을 고안하는 역할, 두 번째 라운드의 실험을 실행하고 보고하는 역할을 각각 3명의 회원들이 맡았다. 마지막으로는 이 새로운 실험 데이터를 해석하고 자연의 법칙과 공리들을 만드는 3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연의 해석자’라는 이름을 가졌다.

우리가 다뤘던 발견하고, 수집하고, 읽고 쓰고, 소통하는 행위들을 종합적으로 모두 수행하도록 설계됐던 이 살로몬의 집은 동굴, 타워, 호수, 연못, 목욕탕, 정원, 포도밭, 공원, 양조장, 공장 등 다양한 부속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각각의 시설들을 오늘날의 과학연구 인프라로 환원시켜보면 실험실, 관찰실, 생태정원, 식물원, 동물원 등 다양하게 연결할 수 있다. 베이컨의 설계에서 핵심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특별하게 봉쇄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도구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고 우리 지각의 능력을 확대해 목격할 수 있는 대상과 범위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베이컨이 그려내는 특별한 공간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목격하고자 설계한 대로’ 일부 제약조건을 달아 봉쇄해 놓은 공간이라는 비틀어진 의미가 있다.

일종의 통제된 자연을 관찰하며 그 속에서 지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실험실은 근대과학의 환유어(metonym)와도 같다. 목격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의 성능 확대에도 불구하고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진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자연의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둘씩 통제해보기 시작했다.

로버트 보일(1627~1691)은 온도가 같으면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으로 유명하다. 보일의 공기 펌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성질을 목격하기 위해 진공 펌프를 만들고, 여러 조건들을 바꾸며 사실들을 검토해봤다는 점에서 근대 실험과학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그의 통제된 자연 실험실 안에서는 자연에서 쉽게 관찰하기 어려운 ‘진공’이라는 상태를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른 과학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실험실을 만들어낼 충분한 매력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의 해부 극장 묘사도.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의 해부 극장 묘사도. 위키피디아

눈으로 직접 보기 어려운 것을 목격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또 다른 공간은 ‘해부 극장’의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15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에 걸쳐 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볼로냐, 네덜란드 레이던과 스웨덴의 웁살라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15곳의 해부 극장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남아 있다. 목재로 지어진 임시 시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일부는 더 영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돌로 지어지기도 했다.

의학교육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해부 극장은 통상 원형 극장 모양의 방으로 구성됐으며, 극장의 한가운데는 인체나 동물의 사체를 해부할 수 있는 테이블이 놓였다. 그리고 이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볼 수 있도록 관객들을 위한 좌석이 배치됐다. 당시에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들은 지시에 따라 사체가 하나둘 해부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인체 내부의 구조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단순히 시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배울 것이 없다고 봤다. 실제로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해부된 신체 일부를 해부 극장의 상단 열부터 시작해 다른 열로 전달하며 만져보기도 했다고 한다.

인체를 해부하는 일과 극장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겠으나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늘 주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극장에 앉아 있던 학생과 관중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집중해 보면서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해 두었을 것이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가 유명한 저술 <인체의 조직에 관하여>를 통해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갈레노스의 해부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해부학의 세계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쉽게 용인되지 않았던 인체의 내부를 목격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일의 진공 펌프 실험실도, 유럽 곳곳에 세워졌던 해부 극장들도 결국 그 공간 안에 들어와 그 특별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 사람들 수가 제한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분명 인쇄술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6세기에는 단순히 글만이 아니라 여러 시각적 이미지로도 새로운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인쇄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나갔기 때문이다.

1543년부터 1555년 판본에 이르기까지 베살리우스의 해부도는 총 700부도 넘을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그 속에 담긴 생생한 이미지들은 직접 해부 극장에 앉아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최소한의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인쇄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하나의 변화는 ‘가상목격(virtual witnessing)’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과학이 발전해나갔다는 점이다. ‘가상목격’이라는 말은 과학사학자 스티븐 섀핀과 사이먼 섀퍼가 ‘보일의 과학실험이 어떻게 그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믿을 만한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이다.

실험에 사용된 물질적인 도구들, 설계 과정들, 그리고 실험의 결과들을 현장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상세히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험 전체가 이 실험보고서를 읽고 있는 독자들을 가상의 목격자로 승격시킬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여러 과학논문을 통해 읽게 되는 언어 표현들이 비인칭 수동태 표현들을 중심으로 특정하게 정형화돼 있는 것은 독자들로부터 실험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이기도 하다.

근대과학 이후에 실험실은 더욱 정교한 방법으로 자연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덜어내고 집중해야 할 것만을 부각시키는 여러 고도의 장치들을 더 갖출 수 있었다. 그 결과들을 보고하는 논문들도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가상의 목격이 가능하도록 여러 발전을 거듭했다.

따라서 오늘의 과학을 바탕으로 우리가 지식의 발견과 공유와 관련해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시대에 던져야 할 질문을 단 하나로 줄여보자면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우리가 과거에 목격하지 못했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목격할 어떤 새로운 도약을 마련해줄 수 있는가?”

이제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연재부터 2회에 걸쳐 “그래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다뤄 보겠다. 인간이 새로운 지식의 발견과 공유를 위해 자연을 목격하는 일에 있어서 여전히 인공지능으로 대체하지 못할 고유한 지적 능력으로서의 아이겐밸류를 가지는지 검토하며 이 연재를 마무리해나갈 것이다.

이은수

[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자연을 통제해 진리를 목격하려는 ‘실험실’은 근대과학의 환유어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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