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영화들 진짜 주인공은 ‘밥’입니다

2007.03.01 17:41

구식에다 뚜껑도 안 닫히지만 ‘좋지 아니한가’의 밥솥은 가족들을 한자리에 부른다. 밥이 아닌 기호식품(커피)을 마시며 요즘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는 가족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구식에다 뚜껑도 안 닫히지만 ‘좋지 아니한가’의 밥솥은 가족들을 한자리에 부른다. 밥이 아닌 기호식품(커피)을 마시며 요즘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는 가족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영화 ‘괴물’의 마지막 장면은 힘없던 강두(송강호)가 더 힘없는 소년 세주(이동호)를 식구로 거두어 함께 밥을 먹는 풍경으로 끝난다.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일을 보도하는 방송 뉴스에는 아랑곳 않고, 영화 속 세주의 대사처럼 “먹는 데 집중”한다. 애초 병원에 감금된 온가족이 눈이 뒤집혀 병원을 탈출하게 된 계기도 “우리 현서 지금 며칠째 굶은 거지?”라는 고모(배두나)의 환기에 의한 것이었다.

DVD에 실린 봉준호 감독의 해설을 들어보자. “따뜻한 밥상을 마침내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이 힘없는 가족들이 진정 이루고 싶었던 순간이고, 비록 괴물이 활개치는 영화이긴 하지만 진정 이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밥상을 차려주는 가장 숭고한 행위”였다. 한국 관객 1300만명이 본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가장 소중한 문제는 다름아닌 ‘밥먹는 일’이다. 봉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 최고조의 처절한 순간을 맞은 극중 송강호가 용의자 박해일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연장선이다.

동시대를 고민하는 충무로의 여러 감독들이 ‘밥’을 화두로 떠올리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다시 말해 ‘싸이보그지만 (밥먹어도) 괜찮아’를 내놓고는 “밥먹는 게 가장 중요한 영화”라 했고, 조인성의 입을 빌려 “식구가 뭐여, 같이 밥먹는 입구녕여”라고 정의한 ‘비열한 거리’의 유하 감독은 한솥밥 먹던 조폭들의 끔찍한 배신을 통해 역설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말한다.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은 1일 개봉작 ‘좋지 아니한가’에서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21세기적 인간관계를 정립해보고자 심드렁한 다섯 식구를 밥상머리에 앉힌다. 배 곯던 1960~70년대도 아닌데, 이들은 왜 밥먹는 일을 ‘말하는’ 것일까.

밥먹는 일이 핵심 주제로 등장한 영화 ‘괴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주인공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에게 밥 걱정을 해주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밥먹는 일이 핵심 주제로 등장한 영화 ‘괴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주인공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에게 밥 걱정을 해주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박찬욱 감독은 ‘싸이보그…’에 대해 “(영화속 인물들의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없다면 거기에 적응해야 환자들도 살아갈 수 있으므로 뭔가 변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그냥 밥먹고 씩씩하게 살자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믿어 밥을 먹지 않는 영군(임수정)을 위해 일순(정지훈)은 선의의 거짓말을 해가며 그녀가 밥을 먹도록 돕는다. 옳고 그름이나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다수의 구획에 맞추기 위해 ‘치료’하는 문제보다,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챙겨주려는 것이다. 거대구조나 권력을 연상케 하는 방송 뉴스를 꺼버리고 가장 원초적인 문제인 밥을 챙겨주는 ‘괴물’의 강두와 맞닿는 지점이다.

작품마다의 주된 문제의식이 밥을 통해 전달된다 해도 이것이 품는 의미에 모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하지만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들은 밥먹는 일이 21세기에 갖는 함의에 대한 한가지 답을 전해주는 듯 보인다. 길에 쓰러진 여학생을 도와주려다 원조교제 누명을 쓰는 아빠, 평생 식구들 밥만 해주다 노래방 총각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엄마 등 한 가족이 겪는 황당한 일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족이라 해도 서로 모르는 면이 있게 마련이고 그걸 다 이해하려 들지 말고 적절한 거리를 둔 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우주의 섭리에 맞는다”는 것. 하물며 타인과 타인, 문명과 문명 사이는 어떠랴. ‘싸이보그…’의 화제와 겹치기도 한다.

영화에서 엄마는 뚜껑이 고장난 오래된 밥통을 허리띠로 묶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고쳐 쓴다. 디지털 세상에 황망해하거나 애써 적응하려는 모습도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비어져나온다. 이렇게 지은 밥은 콩가루 같은 식구를 한자리에 모으는 유일한 매개체다. 그 밥상에 균열이 오면서 가족은 그간 몰랐던 서로의 틈새를 엿보고, 종반부 마을 주민들의 원시적인 집단 격투를 통해 주인공들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인간에게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행위를 소중하게 여기고 따뜻한 밥 한그릇으로 서로를 위해주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디지털과 인터넷으로 온세상이 하나된 듯한 시대, 세계화와 시장이 획일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더욱 절실하고 필수적인 문제로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다.

〈송형국기자 hank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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