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지영 감독 “예술가보다 대중영화 감독이고 싶다”

2023.11.01 15:49 입력 2023.11.01 22:37 수정

‘삼례 나라슈퍼 사건’ 기반 실화 영화 <소년들>

설경구·유준상·허성태·염혜란·서인국 출연

데뷔 40년, 제주 4·3 다룬 차기작도 준비중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소년들> 정지영 감독. CJ ENM 제공

<소년들> 정지영 감독. CJ ENM 제공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주인 할머니를 살해하고 돈과 폐물을 훔쳐 달아났다. 동네 소년 세 명이 범인으로 지목돼 각각 징역 3~6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소년들은 경찰이 사건을 조작하고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해 만들어낸 가짜 범인들이었다. 사건 발생 17년 후인 2016년 재심을 통해 진범이 밝혀지고서야 소년들은 최종 무죄를 확정받았다.

정지영 감독(77)이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다룬 영화 <소년들>(1일 개봉)로 돌아왔다. 지난달 3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 감독을 만났다.

배우 설경구가 진범을 추적하는 형사 ‘황준철’로 나온다. 영화를 이끌 주인공을 고민하던 중 2000년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의 진범을 잡아낸 실제 인물 황상만 반장을 모델로 따왔다. 황 반장을 딴 캐릭터는 약촌오거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재심>에도 등장하지만 분량이 거의 없었다. 황 반장이 <재심>을 보고 실망했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정 감독은 “전주 시사회 때 황 반장이 이번 영화를 보고 좋아했다”며 웃었다.

유준상이 사건을 조작한 형사 ‘최우성’을 연기한다. 배역 이름은 실제 사건의 주임검사 이름을 앞뒤 글자만 바꿨다. 정 감독은 “신자유주의 질서가 대두한 이후 사회에서 스스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잘나서 그런 자리에 왔다고 생각한다”며 “최우성은 악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고 합리화시키는, 경쟁과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렇기에 일부러 잘생기고 모범생 같은 유준상을 캐스팅했다”고 했다. 영화 말미에도 나오지만, 재심 이후 이 사건을 조작한 경찰과 검찰 등 처벌받은 사건 담당자는 아무도 없다.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염혜란이 황준철의 아내를 연기한다. 허성태가 수더분하고 마음씨 따뜻한 형사로 영화의 쉴 틈이 된다. 서인국이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분해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설경구가 안정적으로 극을 이끌지만, ‘소년들’이 진짜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통의 시간을 겪고도 어른으로 성장한 이들의 모습이 영화의 감동 지점이다. 실제 사건 재심을 이끈 박준영 변호사가 영화를 본 뒤 감독에게 “아이들한테 목소리를 내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한다. 영화 속 소년들은 재판정에서 “우리는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실제론 내내 주눅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정 감독 영화가 현실과 다르게 각색된 데 대한 비판도 있지만, 감독은 그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했다. “(영화에서라도) 목소리를 내게 해줘야죠.”

“왜 투자자는 날 싫어할까”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영화 <소년들>의 한 장면. CJ ENM제공

1997년 <블랙잭>, 1998년 <까>가 잇달아 대중의 외면을 받으며 감독 생활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2012년 <부러진 화살>로 복귀하기까지 14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다. 영화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 중국 혁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리랑>, 5·18민주화운동과 얽힌 <은지화>를 준비했지만 무산됐다. “<아리랑>은 중국 사정이 있었고, <은지화>는 시나리오도 완성을 했어요. 그런데, 글쎄요. 내가 선택한 소재를 투자자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기다림 끝에 총제작비 15억원을 들인 <부러진 화살>로 귀환했다. 2007년 한 교수가 재판에 불만을 품고 판사를 향해 석궁을 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 사법 불신이 팽배했던 상황과 깐깐한 교수를 연기한 안성기의 연기 변신이 이슈가 되며 관객 346만명을 모았다. 감독은 “그 정도 흥행이 될 것이라곤 생각 못했다”며 “<부러진 화살>이 나를 지금까지 영화를 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NEW 제공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NEW 제공

저예산 영화의 기적이라 불린 뒤였지만, 감독이 느끼기에 투자자들이 자신을 대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던 듯하다. 정 감독은 “김근태 고문 사건을 다룬 <남영동 1985>도 투자자들이 안 좋아하니까 이전 영화에서 번 돈을 가져다 찍었다”며 “내가 이후 <블랙머니>를 포함해 어쨌든 영화를 성공시키고 있잖나. 투자자들이 정지영이 선택하는 건 일단 안 보려고 하는데, 이젠 ‘정지영 감독이 하는 걸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자’ 이래야 한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는 CJ ENM이라는 대형 배급사와 함께했다. 정 감독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CJ가 박준영 변호사에게 이 사건의 영화화를 문의해 왔다. 감독이 정해진 걸 모른 것”이라며 “만약 CJ에서 먼저 영화에 손을 댔다면 내가 감독이 안 됐을 수도 있다”며 웃었다.

“극적 장치는 대중 상대하는 감독의 자세”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감독 데뷔했다.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등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지난 9월 서울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에서 ‘정지영 감독 40주년 회고전’을 진행했고, 지난달 열린 제8회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최고령 현역 감독’으로 불린다.

비슷한 연배의 영화인들이 현장을 떠난 것에 대해 정 감독은 “그들이 떠난 게 아니다. 다들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못하고 있는 건 투자자들이 외면해서다. 어른이니까 상대하기가 버겁고 낡았다는 것인데, 영화를 포함한 한국 사회의 조로 현상은 문제가 있다. 영화계가 소중한 노하우를 잃고 있다는 측면에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영화 <남부군> 포스터.

영화 <남부군> 포스터.

영화계에 동년배는 “없다”고 말했지만, 동료는 “있다”고 했다. 감독은 “동료라는 개념을 나이로 따지지 않으니 설경구를 비롯해 모두에게 조언을 얻는다”고 말했다. 설경구도 최근 인터뷰에서 정 감독에 대해 “의식하지 않아도 꼰대 모습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게 없다. 나도 그렇게 나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제주4·3 사건을 소재로 한다. 감독은 “사건 자체보다 역사적 사건에서 상처를 입은 인물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다뤘다”고 했다. 시나리오는 완성했다. 사회적인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다룰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예술가이기보다 대중영화 감독으로 남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많은 관객과 대화하고 싶다. 다큐멘터리는 관객이 잘 들지 않으니 그런 면에서 좀 어렵다. 켄 로치와 나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그는 진솔하고 진지하게 접근한다. 나는 실제 사건에 극적 장치를 더한다. 졌는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를 볼 때 관객들은 통쾌함을 느낀다. 대중과 상대하는 감독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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