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상사에 존재하는 두터운 회색지대… 이걸 잘 읽어야 사회나 역사도 제대로 보여”

2013.04.14 21:36 입력 2013.04.15 09:51 수정

‘기억과…’ 워크숍 앞두고 뤼트케·임지현 교수 대담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오는 17~20일 ‘기억과 기억하기’를 주제로 국제워크숍을 연다. 연구소와 사학과의 WCU(World Class University) 트랜스내셔널 일상사 사업단이 독일 일상사 연구의 대가 알프 뤼트케 교수를 초빙해 수행한 WCU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자리다. 워크숍에서는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가 제주 4·3항쟁에서 ‘미망인의 체화된 기억’을 발표하는 등 11개국 16명의 연구자가 주제 발표를 한다. 경향신문은 워크숍을 앞두고 지난 11일 뤼트케 교수와 연구소장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을 마련했다. 이들은 민초들이 어떻게 기억을 통해 공공성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권력은 기억을 어떻게 통제에 이용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로 진행한 대담의 동시통역은 연구소 김청강 박사가 맡았다. 다음은 대담 전문.

알프 뤼트케 교수(왼쪽)와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지난 11일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강의실에서 대담하고 있다. 이들은 1980년 광주를 제대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광주에서 학살극이 벌어질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알프 뤼트케 교수(왼쪽)와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지난 11일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강의실에서 대담하고 있다. 이들은 1980년 광주를 제대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광주에서 학살극이 벌어질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임지현=‘일상사’ 연구 방법론을 소개해달라.

뤼트케=첫번째 연구는 프로이센 경찰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법이나 규율이 하층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평범한 경찰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관심이 많았다. 권력자들이 만든 자료만 보면, 정치권력이 시키는 대로 세상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은 일상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예컨대 학교에서 부상 우려 때문에 매년 눈싸움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말은 곧 아이들이 그 지시를 무시하고 매년 눈싸움을 했다는 말이다. 일상사 연구의 핵심 중 하나는 잘 안 보이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권력과 보통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임지현=전통적인 마르크스에 입각한 역사연구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

뤼트케=마르크스주의 역사학도 국가의 지배나 지배도구가 무엇이었는지가 중심이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공장이 노동자들의 출퇴근 시간 같은 규율을 엄격하게 강요했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당시 노동자들 일상사를 보면, 출근 15분 만에 독자적으로 쉬면서 차를 마시곤 했다. 노동 규율이 강한 곳은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노동자들은 다른 세계를 만들기도 했다. 회색 지대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임지현=황석영씨의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보면, 일하는 시간에 몰래 담배를 피우는 우리말로 ‘땡땡이’ 치는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규제나 통제가 100% 실현되는 사회는 독재자의 꿈이지만 그 꿈은 노동자들에 의해 늘 배반될 수밖에 없는 꿈이다.

뤼트케=독일 노동자 계급은 나치 집권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되거나 심지어 적극 협력했다. 나치가 영악하게 여러 일을 진행했다. 무급휴가였던 메이데이(노동절)를 유급휴가로 바꿔줬다. 히틀러가 ‘기쁨을 통한 힘’이라고 부른 일종의 나치적 복지정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는데, 국민차(폭스바겐) 보급 프로젝트가 좋은 예다. 일상 사람들에겐 가정을 만들고 이루어나가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결국, 반대한 사람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동조하게 됐다. 독재체제의 대중동원이 꼭 대중을 속여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임지현=박정희 독재정권도 ‘퍼블릭카’ 프로젝트를 시도했는데, 1960년대 후반 경제력으로는 무리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아우토반’을 모델로 한 것이다. 박정희는 빈농의 출신 배경을 볼모로 조국근대화, 국민차, 고속도로 같은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대중의 자발적 동원을 유도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다.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담론의 층위는 ‘기억과 기억하기’가 정치적으로 살아있는 핫이슈라는 것을 보여준다.

뤼트케=‘기억의 정치’는 교과서 기록, 공식행사 연설처럼 한 국가·사회가 공식적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전쟁 승리나 희생에 관한 이야기, 국가차원의 기념일도 해당된다. 이런 ‘기억의 정치’ 의례는 기관화되었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식도 제도화·정치화됐다. 이에 반해 ‘기억하기’는 개인이 일상을 기억하는 것이다. 1950년대 어느날 내 어머니가 은촛대를 없애버렸다. 외조부와 같은 집에 살던 유대인이 1942년 강제수용소로 쫓겨날 때 두고 간 촛대였다. 일상에서 ‘기억하기’란 은촛대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일에선 68혁명을 계기로 청소년들이 부모가 홀로코스트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기억의 정치(학)’가 아니라 ‘기억하기’를 실천한 것이다.

임지현=한국 사회도 광주에서 학살극이 벌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할 때,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고 본다.

뤼트케=‘기억하기’의 실천은 민초들이 일상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괴팅겐에서 나치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려 한 적이 있다. 공식적 ‘기억의 정치’와는 다른 풀뿌리의 기억 방식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것을 봤다. 사람들이 일본대사관 부근 앞의 위안부 소녀상에 추울 땐 담요도 덮어주고, 모자도 씌워준다. 실질적으로 위안부와 그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임지현=무명용사의 탑 같은 것은 자식이나 부인이 자신의 아버지, 남편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권력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드는 방식이라면, 탈영병 기념비는 권력의 횡포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던 탈영병을 풀뿌리의 새 영웅으로 기억하는 방식이다. 민주화세력의 각종 기념사업회 같은 데 불편한 게 여전히 남아 있다. 박정희 기념비 프로젝트에 대항하는 거창한 대체 프로젝트를 이야기한다. 독재체제의 기념·기억의 정치 형식 및 구조와 닮은 것이다. 4·3항쟁에서도 주민들의 일상의 기억하기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친척을 잃고 고통받은 보통사람들의 기억 말이다. 좌우 양쪽의 공식 기억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기억을 살려내야 한다.

뤼트케=통일 전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체제에 무조건 순응, 협력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조그만 오두막에 30~40평 정도 땅을 가졌는데, 다들 거기로 도망갔다. 자기만의 틈새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일상사에는 회색지대가 두텁게 존재했다. 사회나 역사도 두터운 회색지대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 의식을 가져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임지현=기억은 다중적이다. 우리는 군사독재 때 일상에서 어떤 괴롭힘, 지분거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잘 안 한다.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등은 생체권력의 지표이기도 하지만, 일상에 대한 독재의 테러이기도 했다. 뤼트케 교수에게서 배우는 바는 어떤 문제든 하나씩 단절된 게 아니라 복잡계처럼 얽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일상사를 사소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소함 속에 응결돼 축적된 역사를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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