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매력만큼 부작용도 심각”

2016.03.01 20:35 입력 2016.03.01 20:44 수정

역사 매개로 심리적 위안…인접 국가들과 역사 갈등

‘위서의 사회사’ 콜로키움

고조선, 한사군 등을 둘러싼 상고사 논쟁이 최근 일어나면서 역사서로서의 신뢰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른바 위서(僞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대사 연구는 명확한 문헌 사료, 고고학적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극히 적은 사료의 해석을 놓고 그 견해가 충돌한다. 이 과정에 전문가는 물론 비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위서 인용 문제가 늘 대두된다. 제도권 학자들은 ‘위서이니 인용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선 ‘위서가 아니다’라며 위서 여부로까지 논란이 벌어지기 일쑤다.

국내에서 위서 여부 논란의 대표적 사례는 <환단고기>다. 논리성이 없고, 비합리적인 내용이 많아 역사서로는 신뢰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여러 판본이 계속 나오는 등 이 책은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환단고기>를 사료로 삼은 다른 학문 분과의 ‘성과물’까지 나오기도 했다.

역사 분쟁은 한·중·일간에도 반복되고 있다. 중국에서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를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AP연합뉴스

역사 분쟁은 한·중·일간에도 반복되고 있다. 중국에서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를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AP연합뉴스

계속되는 위서 논란 속에 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 연구소 등은 최근 ‘위서의 사회사’를 주제로 한 콜로키움을 열었다.

콜로키움에서 발표자들은 위서가 유행하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며, 다른 나라들 또한 시대 상황과 당대의 요구에 따라 위서가 등장하곤 한다고 밝혔다.

한국의 시민단체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규탄하고 있다. AP연합뉴스·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의 시민단체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규탄하고 있다. AP연합뉴스·경향신문 자료사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이 자리에서 러시아에서 대표적 위서로 손꼽히는 <벨레스의 책>을 소개했다. 195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문학가 유리 미로류보프가 처음 소개한 이 책은 9~10세기에 원문이 쓰였지만 원래의 목판은 소실돼 책을 직접 접했던 미로류보프가 기억을 더듬어 1950년대에 재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9세기부터 시작해 ‘벨레스’ 신을 숭배했던 슬라브인들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역사 기록에 비추었을 때 슬라브인들이 형성된 시기는 5~6세기인데 이 책으로 인해 그들의 역사는 2000년 가까이 더 고대로 올라간다. 더불어 슬라브인이 9세기 바이킹의 침략으로 비로소 야만의 시대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유라시아를 누빈 아리안족을 기원으로 하는 민족이라고 이야기한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위서 <벨레스의 책> 목판 원본이라고 알려진 사진.

러시아의 대표적인 위서 <벨레스의 책> 목판 원본이라고 알려진 사진.

<벨레스의 책>은 학술적 근거가 희박하지만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러시아인들의 역사적 콤플렉스를 자극하며 이를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벨레스의 책>은 또 흔히 위서가 그러하듯 민족종교와도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강 교수는 “자국을 ‘서구의 변방’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중심’으로 여기고자 하는 러시아인들의 심리가 책의 이면에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벨레스의 책> 같은 위서가 국수주의, 인종주의를 강화하고 인접 국가 간 갈등을 키운다는 점이다. 실제 러시아를 비롯한 유라시아 각국은 최근 치열한 역사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4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옛소련 시절 이전에 카자흐 영토에는 국가 체제가 없었다”고 발언하자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1465년 세워진 ‘카자흐 칸’국이 우리 역사의 기원”이라고 대응했고 2015년을 국가성립 550주년으로 선포하고 대규모 기념행사까지 개최했다. 강 교수는 “최근 유라시아지역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판슬라브주의’와 중앙아시아의 ‘판투르크주의’, 칭기즈칸을 구심점으로 삼는 ‘판몽골주의’ 등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라시아의 역사 분쟁은 한·중·일 동북아 3국 간의 역사 갈등을 연상시킨다. 위서에 열광하는 심리는 역사 분쟁과 길항하며 확대된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역사왜곡에 맞서 한국도 보다 공세적으로 역사 문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문영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은 “잘못된 사실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위서는 그 매력만큼 부작용 또한 심각하다”며 “위서는 현대사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국수주의에 가까운 민족주의에의 동경, 심리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커질수록 위서도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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