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모두를 위한 지옥에도 불평등은 있다

2018.04.27 17:01 입력 2018.04.27 18:26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휴먼 스토리’라고? …여성 착취의 구조는 여전하기만 하다

tvN <나의 아저씨>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방영 초기, 현실 속 40~50대 남성의 권력을 지우고 아저씨들의 자기연민을 늘어놓는다는 비판(황진미)이나 이지안(아이유)과 구원자로서의 박동훈(이선균)을 운명적인 관계로 묶어내며 로맨스를 정당화하는 영상문법에 대한 비판(박우성)이 주를 이뤘다면, 회차를 거듭할수록 “김운경 작가님이 젊어지시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반응(유병재)이나 로맨스가 불가능한 신자유주의 한국의 삭막한 풍경을 잘 그려냈다는 평(문강형준)이 나왔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에 대한 평이 극과 극인 것은 호평과 악평으로 나뉘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입장의 비평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른 지평 위에 서 있다. 비판하는 쪽에서 이곳의 한국 사회에서 실제 아저씨들이 지닌 권력과 폭력이 지워져 있는 문맥을 문제 삼는다면, 옹호하는 쪽에선 드라마가 의도하고 실제로 꽤 잘 구현되는 상처 입은 삶들에 대한 위로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공통의 논의를 위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나의 아저씨>에 깔린 아저씨 세대에 대한 연민의 기만성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난받는 개인들에 대한 위로라는 주제의식 안에서 중화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이 텍스트 안의 명백한 성맹적(gender blind) 요소는 약점이되 지엽적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tvN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다른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며 놀라는 사이, 이지안(아이유)은 사무실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를 무심히 눌러 죽인다. 하지만 지안을 이해하기 위해 시청자는 남성 박동훈(이선균)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tvN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다른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며 놀라는 사이, 이지안(아이유)은 사무실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를 무심히 눌러 죽인다. 하지만 지안을 이해하기 위해 시청자는 남성 박동훈(이선균)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나의 아저씨>와 비슷한 인물 구도를 갖춘 김원석 감독의 전작 tvN <미생>과 비교해보자. “당신들이 술맛을 알아?”라는 오상식(이성민)의 대사는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여기엔 가정 바깥에서의 노동만이 고난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선 어느 정도 성맹적 요소가 있다. 다만 직장인 사회에 집중하는 드라마 안에선 지엽적인 문제가 될 뿐이다. <나의 아저씨>는 그보다 훨씬 멀리 나간다. 이선균이 분했던 MBC <하얀거탑>의 최도영을 오상식 자리에 앉혀놓은 듯한 박동훈은 민감한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억누르고 회사로 출근하는 인물이다. 형인 박상훈(박호산)이 한 건축업자의 옷을 더럽혀서 무릎 꿇고 비는 걸 어머니 변요순(고두심)이 보게 된 걸 안 동훈은, 해당 업자를 찾아가 “밖에서 당한 모욕을 가족은 모르게 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를 통해 간도 쓸개도 빼놓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남성 ‘가장’에 대한 연민은 극대화된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강윤희(이지아) 역시 밖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이며 그런 그가 집에서 꼬박꼬박 동훈을 위해 밥을 차려주는 장면은 아무런 문제제기나 연민 없이 그려진다. 동훈의 휴대전화에 윤희는 이름이 아닌 ‘집사람’으로 저장되어 있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탈락해 백수로 지내면서도 꼬박꼬박 어머니 요순이 해주는 밥을 당연하듯 먹고 있는 상훈은 어떠한가. 여성은 전문직이어도 남편의 밥을 해주고, 남성은 백수가 되어도 여성이 해주는 밥을 먹는다. 가부장제 안에서 ‘가장’으로서의 남성이 자본주의하의 세상에서 시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 여성들을 가사 노동에 갈아 넣어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대해 드라마는 놀랍도록 침묵한다. 드라마 안에서 울분을 토해내는 건 오직 남성들이다.

tvN의 ‘나의 아저씨’, 평은 놀라울 정도로 다른 지평에 서있다
아저씨들의 권력을 비판하며, 개인의 위로를 옹호하기도 한다
그럼, 아저씨 개인의 위로를 위한 ‘성맹적’ 요소는 허용되는가
파견직 20대 여성이 겪는 혹독함도 동훈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세상은 정말 모두에게 지옥일까…‘여적여’의 구도도 여전하다

직장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직장인 남성만 발언할 기회를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의 아저씨>는 후자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굳이 현실 40~50대 남성이 지닌 성별 권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텍스트 안에서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미생>의 장그래-오상식 구도와 흡사하면서도 다른 이지안-박동훈의 관계는 이 차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부터 정서적 이입이 가능했던 장그래와 달리 지안은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어떤 의미로든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다. 무례하며 범법행위도 쉽게 저지른다. <나의 아저씨>는 그런 지안을 시청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동훈이라는 우회로를 거친다. 모두가 지안의 위악을 이해하지 못할 때 동훈만이 동료들을 향해 더 정확히는 시청자를 향해 지안을 위해 변명해준다.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라고. 동훈과 건축업자와의 실랑이를 도청하던 지안이 가족에 대한 동훈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할머니를 위해 살인을 무릅쓴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안이 도청을 통해 동훈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반면 동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서사적 트릭일 뿐이다. 정작 도청을 통해 동훈에게 감화되는 것은 지안이며, 지안의 속을 간파하고 드러내는 것은 동훈이다. 20대 여성 지안이 겪는 혹독한 삶은 기성세대인 동훈의 자상한 시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일면 따뜻하고 휴머니즘적이지만, 모든 정서적 이입이 동훈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지안이 겪는 부조리한 현실조차 동훈의 주관적 관점 안에서 쉽게 상호이해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여 <나의 아저씨>의 강점으로 이야기되는 상호이해와 화해, 치유의 서사는 특유의 성맹적 약점 안에서 오히려 기만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충분히 멀리서 보면 모두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각자도생 중이며 서로 도와야 할 이들인 건 맞다. 하지만 동훈의 말대로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 모두가 감수해야 할 고통과 불의가 공평하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더 많은 불의를 감수해야 하는 건 파견직 20대 여성이 맞다. 자신에게 키스하려 했단 이유로 지안을 바로 회사에서 자르려 한 동훈의 행동은 어떻게 봐도 월권이자 남의 밥줄을 건 폭력이지만 드라마 안에선 지안의 생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맥거핀으로 활용될 뿐이다. 모두가 힘든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도 유독 파견직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것, 당장 사내 정치에서 밀려 고난을 당하며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40대 남성도 단지 여성의 “단정치 못한 품행”을 근거로 젊은 파견직 근로자를 자를 권력이 있다는 것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 tvN <또 오해영>에서 줄곧 등장했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가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인식을 대체하는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회식 자리에서 여성이 당연한 듯 고기를 굽는 상황에서도 갈등은 여성 대 남성이 아닌, 파견직이고 더 나이 어린 지안이 고기를 굽지 않는 것에 대한 여성 직원의 분노로 표출된다. 남편보다 잘나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미움의 정서는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닌 윤희에 대한 요순의 불편함으로 그려지며, 이혼 후 도준영(김영민)과의 결혼까지 염두에 뒀던 윤희의 정상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역시 남성들은 지워진 채 지안에 대한 윤희의 적대로 드러난다. 동훈 삼형제로 대표되는 ‘나의 아저씨들’은 자신들이 눌러 앉은 구조적 우위에 서서 구조적 약자인 여성들끼리의 싸움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한에서 무해하게 그려진다. 이 드라마가 사랑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꽤 야심차게 그려내려 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아저씨들이 젠더 권력과 경제 권력의 맥락에서 벗어나 오직 사람의 얼굴로 등장하기 위해선 그들이 여성을 착취하며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모르는 척해야만 한다. 이 선택적 무지를 과연 휴머니즘이라 칭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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