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수도 민영화…“10년전보다 더 나빠졌어요”

2009.04.26 17:40 입력 2009.04.27 09:55 수정
마닐라 | 정법모 통신원

3부-미국 모델, 그 파국적 종말 (5) 공공사업의 사유화

한달 27만원 버는데 수도 설치비가 20만원

사용료는 10년동안 10배까지 뛰고

하수도 설비 안돼 수질은 엉망

지하수로 빨래하고 빗물로 목욕하고…수돗물 공급 못받는 시민만 270만명

비가 오는 날이면 필리핀 빈민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다. 비누칠을 하고 나와 빗물에 샤워를 하는 아이들, 집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가며 씻고 있는 여자들, 빨래에 쓸 물을 통에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아낙네, 빗물을 받아 동생을 씻기고 집안일을 위해서 빗물을 받고 있는 소녀.

세계자원연구소(World Resources Institute)에 따르면 필리핀은 1인당 연평균 물 사용량이 6093m3로 중동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지역 평균의 2배다. 하지만 2007년 필리핀 지역수도관리국 자료에 의하면 전체 국민의 24.1%만이 상수도를 이용하고, 하수관이 연결된 곳은 3%에 불과하다. 상수도 보급률이 이처럼 저조하다 보니 지표수나 지하수 의존율이 높게 마련이지만, 하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수질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빈민가에서 소년들이 물통을 줄지어 놓은 채 수동 펌프로 지하수를 길어올리고 있다. <마닐라 | 정법모 통신원>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빈민가에서 소년들이 물통을 줄지어 놓은 채 수동 펌프로 지하수를 길어올리고 있다. <마닐라 | 정법모 통신원>

민영화로 껑충 뛴 물값…물값에 시달리는 월마

필리핀의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 저소득층 지역에 살고 있는 윌마(30).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딸을 두고 있는 주부다. 16살 때부터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월 9000페소(약 27만원)를 번다. 비슷한 직종의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많은 수입이다.

그녀는 7남매의 다섯째로 현재 오빠 한 명을 제외하곤 모든 가족이 모여 살고 있다. 부모님과 출가한 남매의 자녀들까지 합하면 전체 가족수가 38명에 이른다. 윌마의 언니와 여동생은 모두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서 한 달에 각각 2500페소와 6000페소를 받는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의 통학차량 기사를 했으나 2년 전부터는 일이 없어 쉬고 있다.

그리고 남자 형제 3명은 모두 목수로 일을 하는데, 하루에 450페소까지 받지만 계속 일이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특히 첫째 오빠네는 자녀가 9명이며, 작년에 14살 된 딸은 아이를 낳기도 했다. 계속 늘어나는 식구 문제가 윌마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많은 가족이 자신을 가장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전기와 수도는 윌마네 이름으로 가설됐고, 모든 친족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다.

다섯 가구가 사용하는 수도요금은 한 달에 1600페소(4만8000원) 정도. 가구당 나눠 부담하면 한 가구에 320페소가량이 된다. 수도요금은 누진세가 적용되기 때문에 가정마다 미터기를 달면 그만큼 수도요금이 적어지겠지만 수도를 연결할 때 3700페소를 내야 했기 때문에 하나만을 달았다. 그나마 윌마가 수도를 처음 연결한 이후 수도 연결비는 2003년 4246페소, 2008년 7186페소로 올라 이제는 따로 수도를 연결할 엄두를 내기조차 힘들다.

더구나 수도요금을 한 달만 내지 못하면 수도 공급이 중단되고 다시 연결하려면 연결 비용을 또 내야 한다. 윌마네도 수도요금을 내지 못해 수도가 끊긴 적이 있었다. 식구들은 옆집에 1갤런(3.79ℓ)에 1페소를 주고 물을 길어다 사용했다. 이렇게 했더니 한 달에 물값으로 500페소 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윌마네는 평소 수돗물을 절약하기 위해 세탁에 쓰이는 물은 옆집에서 지하수를 길어다 쓴다. 냄새가 날 정도로 수질이 좋지 않지만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물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정부는 수인성 질환 및 지하수 고갈 문제 등을 이유로 지하수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윌마는 전기세로도 한 달에 1650페소 정도를 낸다. 그런데 이 액수도 다른 식구들이 윌마 집에서 끌어쓰던 전기를 모질게 끊어서 준 것이다. 이전에는 한 달에 3700페소까지 나왔다. 다른 식구들이 어려울 때는 1600페소 정도 되는 수도세까지 대신 내줘야 하므로 수도와 전기 요금으로 5000페소 정도가 들었다. 당시 윌마 월급은 월 6500페소였다. 미납액이 1만페소로 누적되자, 윌마가 식구들에게 더 이상 부담하기 힘들다고 했다. 생계비의 많은 비중을 전기와 수도요금으로 내야 하는 현실 때문에 괴롭다.

필리핀 마닐라 빈민가에 있는 공동우물. 하수도 시설 미비 등으로 인해 악취가 풍기고 수질이 나쁘지만 아이들이 목욕을 하고 여성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마닐라 | 정법모 통신원>

필리핀 마닐라 빈민가에 있는 공동우물. 하수도 시설 미비 등으로 인해 악취가 풍기고 수질이 나쁘지만 아이들이 목욕을 하고 여성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마닐라 | 정법모 통신원>

국제금융기구 요구로 상수도 민영화

윌마가 사는 동네는 그나마 수도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수도가 공급되지 못하는 지역이 메트로 마닐라에만 212곳이나 된다. 1200만명의 시민 가운데 270만명 정도는 아직도 상수도 공급이 아예 안되는 동네에 살고 있는 셈이다. 수도 공급 문제는 필리핀의 오랜 과제였다.

장기독재를 누렸던 마르코스 대통령 시기에 수도 및 전기는 비리와 부정축재의 온상이었던 터라, 1997년 이루어진 상수도 민영화는 일정 정도 수도 공급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당시 메트로 마닐라의 수도 사업을 관할하던 도시상하수도공사는 평균적으로 메트로 마닐라 시민의 67%에게 하루 16시간 동안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86년 집권한 아키노 대통령 시절부터 필리핀에서는 여러 국영사업을 민영화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수도사업에 대한 본격적인 민영화는 95년 라모스 대통령이 ‘전국 물 위기법’을 공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고질적인 물 공급시스템의 열악성,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부패, 엘니뇨로 인한 가뭄 등의 요인이 맞물려 수도민영화는 전기부문과 함께 탄력을 받게 되었다.

결국 126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의 도시상하수도공사는 97년 세계은행의 지침을 받아 민영화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정부는 수도 관련 시설 확충을 위해 아시아개발은행, 세계은행, 일본국제협력은행으로부터 8억달러의 외채를 차입하고 있었다. 아시아 외환위기와 맞물려 누적된 외채와 수도 공급의 비효율성을 타파하기 위해 국제금융기구들은 필리핀 정부에 상수도 사업을 민영화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1100만명에 달하는 메트로 마닐라 시민을 위한 물 공급 사업인데다 필요한 투자액이 75억달러였던 만큼, 이 민영화사업은 아시아에서 첫번째의 대규모 수도 민영화사업이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이를 두고 향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모범적인 민영화사업이 될 것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공개입찰 결과 메트로 마닐라를 동서로 양분해 97년부터 25년간 물을 공급할 사업자로, 마닐라워터와 마이닐라드가 각각 선정되었다. 마닐라워터는 필리핀의 아얄라 가문이 주축이 되어 아얄라사와 BPI 금융이 60% 정도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머지 지분은 영국계 유나이티드 유틸리티와 일본의 미쓰비시사가 주주로 참여했다. 한편 민영화된 최대 전기회사의 주주인 로페스가는 마이닐라드의 지분 60%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40%는 물 부문 최대 다국적 기업 중 하나인 프랑스계 수에즈가 갖게 되었다.

기존에 설치된 상수도관이 있는 지역을 승계한 마이닐라드는 입찰 조건으로 도시 상하수도가 안고 있던 부채를 90% 승계하기로 했고, 신규로 상수도를 확장해야 하는 마닐라워터는 10%의 부채를 승계해 상환하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이들은 인수조건으로 ① 수도요금 인하 ② 2000년까지 24시간 물 공급 체계 완성과 수압 증가 ③ 2000년까지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의 수질 달성 ④ 10년 안에 전 지역에 수도 공급 ⑤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누수로 버려지거나 도둑맞는 ‘비수익수량(non-revenue water)’ 축소 ⑥ 새로운 인프라 구축을 위한 75억달러 투자 ⑦ 15년 안에 하수도 설비 비율 60%로, 25년 안에 80%로 증가 등을 약속했다.

실패한 마닐라 수도 민영화

필리핀 소녀가 미리 설치해둔 천막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천리>

필리핀 소녀가 미리 설치해둔 천막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천리>

10년이 지난 지금 이 수도 민영화사업은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시민단체인 ‘부채로부터의 자유’에서 일하고 있는 다이안은 지난 10여년의 경과를 한마디로 “전적인 실패”라고 평가했다. 첫번째 이유는 여전히 물 공급을 받지 못하는 시민이 많다는 점이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두 수도회사, 마닐라워터와 마이닐라드는 2002년까지 모든 시민이 하루 24시간 수돗물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212개 지역은 수돗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 공급을 위한 수도관 매설 및 연결 등의 비용이 사용자 부담이어서 저소득층이 살고 있는 동네에는 수도 확장이 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근에 수도관이 설치되었다고 해도 한국 돈으로 20만원이 넘는 수도 연결비는 일반 가정에게 너무 큰 부담이다.

두번째는 수도 요금이 지난 10년간 지나치게 많이 올랐다. 입찰 당시 마닐라워터는 1m3 당 2.61페소, 마이닐라드는 4.86페소를 제시했었다. 10년이 지난 2008년 기준으로, 두 회사는 각각 26.98페소와 32.03페소의 요금을 받고 있다. 6~10배 오른 것이다. 이들은 입찰 당시 맺었던 계약과는 달리 사업권을 따내자마자 페소 가치 하락 및 수익률 저하를 이유로 지속적으로 가격 인상을 요구해 왔다. 최초 계약에는 없었던 여러 가지 항목이 요금에 부과되면서 수도요금은 전반적으로 급격히 오르게 되었다.

수도 민영화는 국영기업의 외채를 탕감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됐지만 이것도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외채문제는 해소되기는커녕 더 증가했다. 당시 두 기업은 8억달러의 외채 변제를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특히 90%의 외채를 승계한 마이닐라드의 경우 2004년까지도 적자 누적을 이유로 변제하지 않았고, 정부를 상대로 가격인상을 위한 협상을 벌일 때 외채 변제 문제를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 기업을 퇴출하는 대신 공적자금을 투여, 출자전환방식으로 마이닐라드의 지분을 사서 다른 주주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추가로 외채를 더 빌려야 했으며 일반 시민들의 세금 부담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수익성 없다며 설비투자 안해 수질 악화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마닐라 수도 민영화…“10년전보다 더 나빠졌어요”

다이안은 민영화 이후 수도회사들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책임도 소비자에게 가격부담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소비자 전액 부담원칙’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들은 수도회사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노후한 상수도관을 교체하는 일은 아직도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수도관을 통해 전달되는 물은 여전히 필리핀 정부가 정한 식수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 사기업의 경영진 및 주주들은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설비투자나 낙후된 지역에는 시설 확장을 바라지 않게 마련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마닐라워터의 경우 약속한 대로는 아니지만 꾸준히 수도관을 신설하고 효율성을 늘리고 있지만, 마이닐라드는 만성적인 적자를 내는 바람에 2004년께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여되는 상황까지 되었다.

마이닐라드가 담당하는 구역에만 25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수도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마닐라워터의 경우 1년 안에 요금이 부과되지 않는 비중을 31%로 줄이기로 약속했으나 2005년에 가서야 이 수준을 달성했다. 마이닐라드의 경우 57.4%에서 2003년엔 오히려 69.5%로 증가했으며, 2007년엔 68%를 기록했다. 두 회사가 약속한 하수도 설비 비율은 현재까지도 4%를 넘지 못하고 있다.

70년 이후로 각종 법이 제정되어 하수도를 설치할 것을 국가가 규정하고 있으나 수도공급업체는 투자 대부분을 상수도 설치에 할애한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필리핀 전체적으로 상하수도 확충에 소요되는 예산 중 97%가 상수도 건설에, 3%만이 하수도 설비에 사용된다고 한다. 이러한 하수도 시설 미비는 바로 수질 악화로 이어져 수인성 질환을 만연시키는 요인을 제공한다. 마닐라워터의 경우 하수도가 설비된 지역은 상수도 사용요금의 60%만큼을 하수도 요금으로 별도 부과하고 있어 하수도 설비가 되면 시민들이 부담해야 할 수도세는 더 인상되게 된다.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마닐라 수도 민영화…“10년전보다 더 나빠졌어요”

2004년 전기 및 수도공급회사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소득세를 소비자에게 부담하려고 시도했다. 필리핀 대법원은 ‘공공시설’이라는 이유로 반대 결정을 내렸다. 이 ‘공공시설’에 대한 해석을 놓고 거센 논쟁이 있었지만 도시상하수도공사는 마닐라워터와 마이닐라드는 단순한 계약자일 뿐 공공시설에 종사하는 업체가 아니라고 해석한 뒤 두 회사가 자신들에게 부과된 소득세를 소비자에게 부담하는 것을 허용했다. 다이안은 “물은 사유 재산이 아닌, 공기처럼 인간에게 필수적인 재화이자 곧 인권”이라며 “그러나 민영화 이후 물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영국도 오래전에 수도가 민영화됐지만 수도요금을 내지 못하더라도 사는데 최소한의 필요한 물은 공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필리핀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당장 수도와 전기가 끊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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