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식 항해사의 남극 편지

펭귄이 묻네요 ‘우리 집에 왜 왔니?’

2018.03.25 13:50 입력 2018.04.01 11:12 수정
김연식 그린피스 항해사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타고 남극을 가다


나라 바깥에 여권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은 미국보다, 호주와 중국, 브라질보다 넓지요. 여건만 되면 다들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보름짜리 휴가로는 엄두도 못 내고, 적어도 스무날은 필요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번 다녀오면 사람들 사이에서 무용담 최강자로 등극합니다. 세상 어느 경험도 여기 다녀온 얘기에 견줄 수 없습니다. 이건 무용담계의 람보르기니, 오광 고도리,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쯤 됩니다.

여기가 어딜까요. 우주정거장? 달? 화성? 답은 바로 ‘남극’입니다.

우리가 지구본 바닥에 방석처럼 깔고 앉아 보이지 않았을 뿐, 남극은 그토록 넓고 신비한 곳입니다. 일찍이 아문센과 스콧, 섀클턴 같은 모험가들은 그 유명한 탐험으로 영원한 전설을 써냈죠. 어디 그 뿐입니까. 매년 1만명 넘는 관광객이 이 지역 탐험 크루즈 앞에 줄을 섭니다. 궂은 날씨에 번번이 상륙은 취소되고, 대신 배에 갇혀 멀미 횟수나 세기로 이름난 크루즈에 말이죠.

그 남극에 왔습니다. 국제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의 환경감시선 ‘아틱 선라이즈’ 호로 말이죠. 저희는 지난 1월부터 4월 중순까지 남극 웨델해를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데 보탬이 되려 해저를 탐사하고, 해양생물을 조사하고, 이 일대를 파괴하는 원인을 찾아 폭로하고 있습니다. 무용담 삼기에는 사뭇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극해를 탐사 중인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아틱 선라이즈’호. 아틱 선라이즈호는 남극 웨델해 보호구역 지정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해 남극 내 기후변화, 남획과 오염 등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그린피스 제공

남극해를 탐사 중인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아틱 선라이즈’호. 아틱 선라이즈호는 남극 웨델해 보호구역 지정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해 남극 내 기후변화, 남획과 오염 등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그린피스 제공

3월의 남극은 어쩐지 쓸쓸합니다. 해 질 녘 놀이공원이나 늦은 밤 폐점을 준비하는 식당처럼 말이죠. 계절은 12월 여름에서 6월 겨울을 향해 달리고,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하는 두터운 구름으로 덮입니다. 저무는 태양은 점점 희미해지며 하늘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태양은 한갓지던 여름을 놓치기 아쉬운 듯 수평선 주위를 오래 맴돕니다.

서쪽에서 점점 난폭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현재 기온 영하 5°C, 기압 960hPa. 엄청난 저기압입니다. 불쑥불쑥 불어닥치는 강풍 블리자드를 타고 눈발이 총알처럼 수평으로 달려듭니다. 배는 앞뒤 좌우할 것 없이 사방으로 흔들립니다. 좀처럼 멀미가 없는 저도 속이 메스껍습니다. 이건 시작일 뿐. 계절이 바뀌면 바람은 더 거세지고, 기온은 영하 30-40°C를 훌쩍 넘깁니다. 극지는 인간의 접근을 반기지 않습니다.

이토록 황량하지만 남극 바다에도, 인간의 신호는 가득합니다. 대한민국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킹조지 섬을 아우르는 사우스 셔틀랜드 제도에는 미·중·러와 한국을 포함해 열두개 나라의 기지가 있습니다. 남극 반도와 본토, 남극점 등 남극 전체를 세면 70여곳이 넘습니다. 여름이면 전 세계에서 4000여명이 연구 목적으로 이곳을 찾습니다. 1만명 넘는 관광객과 크루즈선은 앞에서 말씀드렸죠?

바다는 어선들 차지입니다. 현재 남극은 1970년대 시작한 크릴새우 조업이 활황인데, 길이 100미터가 넘는 대형 어선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세종호, 인성호와 광자호를 비롯해 노르웨이·중국·칠레·우크라이나에서 온 배들입니다. 실제로 지난 11일 남극해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대한민국 어선 ‘세종호’를 만나 무전으로 교신했습니다. 당시 세종호는 불법어업을 의심하는 칠레 해군의 검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해도를 펼쳐봅니다. 수백 개 섬마다, 그보다 많은 해협마다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디셉션 섬, 리빙스턴 섬, 그리니치 섬, 브란스 필드 해협, 디스커버리 만, 파라다이스 만, 반달 만… 땅에 등록번호를 부여하기라도 하듯 세밀하게 이름이 붙었습니다. 노자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 했습니다. 이름은 그 실체를 다 담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자연에 속해있던 것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인 건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요.

남극의 아델리 펭귄. 그린피스 제공

남극의 아델리 펭귄. 그린피스 제공

오지에 뻗은 인간의 흔적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사람이 살기 힘든 곳에 꾸역꾸역 찾아온 까닭은 무엇일까요? 1786년 영국의 토마스 델라노가 남극에서 물범 사냥을 시작한 이래 1892년까지 물범 사냥 선 1100척이 남극을 찾았습니다. 이른바 남극의 ‘물범 사냥 시대’입니다. 이와 함께 포경선이 몰려왔습니다. 1994년에 상업 포경이 중단될 때까지 남극에서 혹등고래와 밍크고래, 향유고래 등 150만마리의 고래가 작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오죽하면 포경원의 해변(Whaler‘s bay)이라는 곳이 있을까요. 대체 얼마나 많은 혹등고래와 흰 수염 고래, 향유고래, 바다표범과 물개가 도살됐는지, ‘150만’이라는 숫자를 차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고래 1000마리가 1500번 죽어야 150만이 된다면 조금 피부에 와닿을까요.

최근에는 굉음과 배기가스를 내뿜는 대형 어선이 펭귄·바다표범의 서식지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린피스가 지난 5년간 크릴 어선이 이동한 경로를 추적한 결과, 어선들은 해안에서 30km 이내의 완충지대를 넘어 펭귄 서식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여름에 펭귄·바다표범 등 남극해 동물들이 먹이를 찾고 겨울이면 어류가 알을 낳는 곳입니다.

배들은 오염되지 않은 원시의 바다에서 연료를 옮기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23일 남극에서 파나마 어선과 우크라이나 어선이 배에서 배로 연료를 옮기는 걸 목격했습니다. 만일 사고가 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실제로 2014년 2월24일 대한민국 트롤 어선 광자호가 좌초했고, 1989년에는 아르헨티나 선박 ‘바이아 파라이소’ 호가 암초를 들이받아 기름 약 60만ℓ를 바다에 흘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상존하는 위협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남극 웨델해의 제임스 로스섬.  그린피스 제공

남극 웨델해의 제임스 로스섬.  그린피스 제공

남극의 하늘은 뻥 뚫렸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오존층 이야기입니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알지도 못한 채 프레온 가스를 마구 쓴 탓이지요. 냉장고와 자동차, 스프레이가 없는 남극에서 한번 파괴된 오존층은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남극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기후변화의 영향을 겪고 있습니다. 서남극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온난화가 진행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남극반도의 기온은 지난 50년간 약 3°C 올랐습니다. 펭귄과 물범은 까닭 모른 채 기후변화의 피해자가 됐습니다.

다시 남극을 봅니다. 이 청량한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시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아름답기만 하지 않습니다. 황량합니다. 20세기 초 두려움을 모르는 탐험가들의 용기는 이제 전설로 막을 내렸습니다. 남극에 여권 없이 갈 수 있다는 것. 그 말은 이 거대하고 신비한 땅에 소유자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반대로 우리 모두가 주인이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제 개척정신이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난해 남극해양생물자원보존위원회(CCAMLR)는 동남극 일대 웨델해를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안을 논의했지만, 어업으로 이득을 얻는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부결됐습니다. 그린피스는 올해 남극 웨델해 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환경감시선 아틱 선라이즈 호와 활동가들을 남극에 파견한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러분, 남극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세요.


김연식 그린피스 항해사.  그린피스 제공

김연식 그린피스 항해사.  그린피스 제공

■필자 소개

그린피스 항해사 김연식.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을 운전합니다. 북극과 남극, 아마존, 지중해, 파타고니아, 솔로몬제도 등 전 세계 이슈 현장에서 먹고 자고 숨쉽니다. 인천일보에서 3년간 기자로 일했으며, 단행본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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