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 아닌 티끌 투자하는 청년들···‘대박’보다 ‘따박’

2024.06.10 13:58 입력 2024.06.10 16:52 수정

[2024티끌투자보고서] 영끌 아닌 티끌 투자하는 청년들···‘대박’보다 ‘따박’

주식 투자 이미지 사진. 정지윤기자

주식 투자 이미지 사진. 정지윤기자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은형씨(가명·33)에겐 변하지 않는 투자 습관이 있다. 매일 딱 2000원씩 세 종류의 미국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하는 일이다. 하루에 총 6000원을 투자하는 셈이다. 주식·ETF 등을 1주 단위 이하로 매매할 수 있는 소수점 거래를 통해서다.

은형씨는 2021년 9월부터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원씩, 올해부터는 2000원씩 같은 종목에 투자해왔다. 그야말로 ‘티끌 투자’다. ‘티끌’은 어느덧 백 만원대의 ‘산’이 됐다. 지난달 12일 기준 380만원을 넘겼다. 세 종목 평균 수익률은 25.79%. ‘태산’까진 아니어도 성취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언젠가부터 2030 청년세대의 투자는 ‘영끌’ 혹은 ‘빚투’로만 대변된다. 실제로 수 년전 비트코인이 오른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가상자산에 뛰어들면서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기성세대들은 부동산을 통해 자산을 형성하기 어려운 젊은 세대들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가상자산에 뛰어든다고 분석했다. 물론 주식이 오르고 가상자산 등 다 오르는데 나만 상승 흐름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소외공포)’ 증후군으로 급하게 ‘묻지마 투자’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대박’을 노리고 ‘주식 리딩방’에 들어가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2024년 지금 여기, 다른 흐름이 있다. 주식시장은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몇 년 사이 갑자기 올랐다가 다시 내려갔다. 2030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의 역동성을 경험했다. ‘100세 시대’ 노후는 사회가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영끌’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영끌’ 아닌 ‘티끌’ 투자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은형씨처럼 ‘대박’이 아닌 ‘따박따박’ 안정적 수익을 얻으려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 5월 한 달간 ‘티끌 모아 태산’을 지향하는 청년 투자자들을 전화·대면 인터뷰를 통해 만났다. 세상을 뒤흔든 ‘코인·주식 대박’의 함성 저편에서 이들 청년은 ‘안전한 미래를 만드는 것’이 투자의 목적이라 입을 모았다.

“공부 삼아” “귀찮아서” 티끌 투자 하는 이유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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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적금만 알던 지우씨(가명·27)가 주식 투자에 뛰어든 것은 입사 직후인 2020년 말이다. 코로나19 유행과 함께 찾아온 유례없는 증시 활황기, 지우씨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꾸만 띄우는 주식 관련 콘텐츠에 설득됐다. 첫 투자의 기억은 또렷하다. 1주에 500달러가 넘었던 넷플릭스 1주는 사기 어려웠다. 0.02주 소수점 주식을 샀다. 그게 시작이었다. 한 번 문턱을 넘으니 그 다음은 쉬웠다.

2019년 해외 주식에 한해 시범 도입된 소수점 주식 매매는 2022년 9월부터 국내 주식에도 적용돼 초보 투자자들도 유명 ‘귀족주’ 투자를 쉽게 시도해볼 수 있게 만들었다. ‘종잣돈’이 많지 않은 2030세대의 주식 투자 접근성을 높인 것이다. 젊은층이 많이 사용하는 토스증권의 통계를 보면, 2022년 3월 해외 주식 소수점 거래 서비스를 선보인 이후 지난 4월까지 누적 156만명이 이용했다. 이용자 중 20대(28.8%)와 30대(23.3%)가 절반이 넘었다. 심지어 해외 주식에 투자한 20대(33.5%)와 30대(39.4%) 10명 중 3명 가량은 소수점 거래로만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우씨는 주식뿐 아니라 금, 채권, 부동산 조각투자, 외화RP(환매조건부채권) 등 다양한 금융 투자를 시도했다. 현재는 월 소득 300만원의 20~30%를 꾸준히 투자에 활용한다. 2년 전부터는 매일 ‘매매일지’를 적고 의견을 나누는 온라인 스터디 모임도 만들었다. SNS에서 만난 30여명과 함께 매매일지, 스크랩한 경제 기사를 매일 올린다. 3일 이상 매매일지와 스크랩 기사를 올리지 않으면 이 모임에서 ‘강퇴(강제퇴장)’ 당한다. 지우씨는 스터디 모임을 통해 경제를 공부하고 매일 조금씩 투자해온 끝에 입사 3년6개월여 만에 8000만원의 자산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미 초보 수준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1만원씩 소수점 주식을 산다. “적은 돈으로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주가 흐름을 관측하며 투자하기에도 적합해요. 여러 분야 기업에 원 없이 투자해볼 수 있으니까 금융 공부도 되고 포트폴리오도 분산되는 측면이 있어요.” 그는 소수점 거래로 20여개의 미국 주식 종목을 보유 중이다.

회사원 경선씨(가명·28)가 소수점 주식을 사게 된 이유는 “귀찮아서”다. 그는 올해 초부터 애플, 코카콜라, 엔비디아 등 미국 유명 주식 위주로 증권사에서 제공하는 적립식 자동 주문 서비스를 활용하고 있다. 경선씨는 “처음엔 평단가가 낮은 시기나 종목을 골라 매수하는 것을 시도한 적도 있지만, 결국 우상향 하는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라는 생각에 매일 1만원씩 자동 주문을 걸어놨다”면서 “주식에 신경쓰느라 일상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안전지향’ 60대와 꼭 닮은 20대 투자성향

임상병리사 규연씨(가명·24)는 ‘없는 셈 칠 수 있는 돈’만 투자한다. 월 소득이 200만원인 그에게는 매달 30만원이 최대치다. 규연씨가 주식을 시작했던 것도 2020년, 대학에 갓 입학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부터다. 규연씨는 호기심에 카카오 주식을 샀다가 하룻밤 사이 벌었던 1만2000원을 기억한다. 당시 아르바이트 시급을 훌쩍 뛰어넘는 돈이 ‘그냥’ 생겼다는 게 놀라웠다. 이후 주식 투자를 본격적으로 했지만 당시만 해도 50대 부모님은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며 못마땅해 했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님도 할머니도 주식 투자를 하세요.” 규연씨 가족은 결국 2021년 주식 열풍과 함께 불어온 ‘포모(FOMO) 증후군’에 휩싸였다. 규연씨는 “제 설득보다는 부모님 주변에도 주식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님과 투자성향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재력의 차이는 확실히 있다”며 “7000원짜리인 주식 다섯 주도 망설이다 겨우 사는 편인데, 부모님은 한 번에 100주씩 통크게 투자하시더라. 원금회복을 위한 ‘물타기’에도 적극적이시다”라고 말했다.

서인주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지난해 ‘투자성향과 금융환경인식이 금융자산 비중변화 의향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서 20대의 투자유형점수가 60대 이상의 그룹과 비슷하게 안정지향적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젊을수록 위험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결과”라며 “투자성향을 세대 또는 연령대로 통칭해 예측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분석했다. 세대보다는 소득과 자산에 따라 투자성향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이 만난 청년들은 투자에 있어 ‘주체적인 판단’을 중시했다. 출퇴근 길에는 증권사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나 경제 관련 뉴스레터를 보고 어떤 자산을 사고 팔지 결정할 때 합리적인 근거를 대기 위해 노력했다. 남의 판단에 휘둘리는 ‘주식리딩방’에 들어가지 않고, 예측이 힘든 코인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다.

은형씨의 투자 신조는 소위 ‘몰빵’ 투자를 지양하자는 것이다. 그는 월소득 300만원 중 절반가량을 투자에 활용한다. 22만원은 소수점 주식에, 나머지는 주식·채권·원자재·부동산·코인 등 투자를 다각화해 손실 위험을 상쇄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주식은 개별 종목 아닌 ETF 위주로만 투자한다. 은형씨는 “시장이 성장하는 만큼의 수익, 물가상승률을 약간 웃도는 정도의 수익을 얻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높은 집값에 부동산 대신 금융 투자

이처럼 ‘저위험, 저수익’을 지향하는 청년들이 바라는 것은 ‘벼락 부자’나 ‘코인 대박’이 아니다. 이들은 투자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로 ‘안전한 노후’를 공통적으로 꼽았다. 사회제도를 통해 노후를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청년들을 투자로 이끈 셈이다.

지우씨는 “나이 들어 제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저 대신 돈이 일해서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투자의 목표”라고 말했다. 은형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안전”이라면서 “다리를 다쳤을 때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탈 수 있는 정도의 안전망은 갖추고 싶다”고 말했다. 경선씨는 “국민연금만으로는 내 노후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이러한 불안 때문에 월배당 ETF도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2020년 이후 주식 투자에 뛰어든 청년들이 짧은 시간 동안 시장의 호황과 불황을 모두 경험하면서 연령이 낮을수록 공격적 투자를 한다는 통념과 달리 안정지향적인 청년 투자자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후 불안은 최근 배당 ETF의 인기로 이어지고 있다. 큰 폭의 성장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분기·월마다 꼬박꼬박 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흥행 요인이 됐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미국 대표 배당 ETF로 꼽히는 SCHD(슈왑 US 디비던드 에퀴티)는 지난달 말 기준 국내 ‘서학개미’들이 다섯번 째로 많이 산 종목이었다. SCHD의 보관금액은 8억7544만달러로 연초 6억1806만달러 대비 41.6% 증가했다. K-SCHD라고 불리는 TIGER 미국배당다우존스 ETF는 올해 개인투자자가 세 번째로 많이 순매수한 ETF다.

청년 투자자들이 받는 배당금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지우씨는 지난 4월 기준 2만4000원, 경선씨는 3만원, 은형씨는 5만원을 받았다. 은형씨는 “지금은 배당주보다는 성장주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는데 은퇴가 가까워지면 비중을 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우씨도 “점점 배당주 비중을 늘려 은퇴하는 시점에는 월 100만원 정도를 배당금으로 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을 비롯해 노령 인구를 위한 복지제도의 효용과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금융 투자를 통해 여윳돈을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라면서 “기성세대가 부동산 투자를 통해 노후 대책을 마련했지만, 높아진 집 값의 문턱을 넘지 못한 청년들은 금융 투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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