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단지 ‘마중물’일 뿐…성패 가르는 건 글로벌 경쟁력

2018.10.08 22:16 입력 2018.10.25 11:28 수정

베트남 진출 기업들의 전략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한류’ 이미지를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우거나, 현지화에 더 집중하는 상반된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호찌민의 라네즈 매장, GS25 편의점, CGV 영화관, 롯데마트 내 K푸드존.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한류’ 이미지를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우거나, 현지화에 더 집중하는 상반된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호찌민의 라네즈 매장, GS25 편의점, CGV 영화관, 롯데마트 내 K푸드존.

올해 초 베트남 진출한 GS25
한국 기업이라는 점 드러내며
품질 좋고 깔끔한 이미지 구축

지난 4일 호찌민의 한 GS25 편의점. 문을 열자 베트남 직원이 한국말로 “어서오세요. 지에스 트웨니파이브입니다”라고 인사한다. 매장에선 미국·베트남·한국 음악이 돌아가며 나온다.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탄 땀(16)은 “일주일에 두어번 이곳에 들른다. 다들 한국 편의점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한반도의 약 1.5배 크기인 33만㎢ 땅에서 9600만명이 사는 나라. 국제통화기금(IMF) 기준 2018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545달러로 한국(3만2774달러)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지만 매년 6%대 가파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이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 올해 6월까지 한국의 투자 누적액은 616억7300만달러로, 2위인 일본(554억4700만달러)보다 훨씬 많다. 한류가 몰아친다는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은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을까.

■ “한류, 마중물인 건 분명”

GS25는 베트남 중견기업과 손잡고 지난 1월 첫발을 내디뎠다. 아직 재래시장이 전체 유통의 80%를 차지하는 베트남에 미국·일본계 편의점은 모두 합쳐 730여개뿐이다. 도시화율이 아직 30% 수준에 그쳐 각국 유통업계는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있다.

진출 초기 기업인 GS25는 ‘한국 기업’이라는 점을 차별화 요소로 삼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한국 신선식품이다. 비빔밥과 떡볶이 등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패밀리마트나 서클케이 같은 일본·미국계 편의점에서는 찾기 힘든 아이템이다. ‘유어스 도시락’ 등 자체브랜드(PB) 상품은 한국에서는 저가 상품이지만 이곳에선 프리미엄 브랜드 대접을 받는다.

윤주영 GS25 베트남법인장은 “젊은 세대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있다”면서 “한국 편의점처럼 깨끗하고 넓은 매장환경, 한국과 베트남 제품을 섞은 상품 구색이 소비자들이 찾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2002년 베트남에 백화점 사업으로 뛰어들어 실패를 겪은 뒤 한국 인삼주로 재기한 고상구 K&K 글로벌트레이딩 회장(59)은 “한류가 없었으면 정착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2000~3000달러에 이르는 인삼주는 당초 팔려고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한국 인삼은 비싸고 귀한 것’이라는 인식만 심어주면 성공이라고 봤다. 그러나 ‘한국’ 브랜드를 등에 업고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지금은 ‘아자개 쌀’ ‘진주 수곡딸기’ 등 한국 농산물도 잘 팔린다고 했다. 고 회장은 “베트남 쌀이 주식인 이곳에서 한국 쌀맛을 소비자에게 길들이기가 녹록지 않았다”며 “10년 동안 입맛을 바꾸는 데 투자해 100년 동안 수익을 보는 식품업계 특성상 앞으로 한국 농산물의 판로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 기업’ 강조 안 해”

베트남에서 고가 화장품의 강자는 로레알과 시세이도다.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이 그 뒤를 추격하고 있다. ‘짝퉁’이 활개치는 베트남에서 ‘made in Korea’가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임을 강조하는 것이 전략상 효과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 모델로 배우 송혜교, 라네즈에 배우 이성경을 기용하지만,‘K뷰티’를 마케팅의 중심에 놓지 않는다. 그보다는 라네즈는 ‘워터’, 설화수는 ‘홀리스틱 뷰티’ 등 브랜드 콘셉트를 더 강조한다.

박숭희 아모레퍼시픽 베트남영업팀장은 “ ‘한국 화장품은 품질이 좋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지 ‘한국’ 자체를 강조하는 건 아니다”라며 “사드 후폭풍 이후 중국에서 한국 기업이 고배를 마셨던 것에서 보듯 대외적인 변수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정기 아모레퍼시픽 베트남법인장은 “현재 베트남의 소득수준이 높지 않아 럭셔리 화장품 매출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장기적 전망은 밝다”고 했다.

이미 시장 안착 롯데마트는
‘비싼 한국제품’ 인식 바꾸려
현지화 전략에 더 힘쏟기도

2008년 베트남에 진출해 13개 점포를 운영하는 롯데마트도 ‘한국 기업’임을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롯데마트가 현지에서 하는 유일한 마케팅은 ‘전단’ 배포인데, 여기에도 한국어나 한국 기업을 연상케 하는 문구는 전혀 없다. 베트남 사람은 롯데가 한국 기업이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고, 이미 시장에 안착한 상황에서는 현지화 전략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윤병수 롯데마트 베트남법인장은 “ ‘한국 제품은 비싸지만 좋은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실제 다른 마트보다 싸게 내놓은 제품도 비싸다고 인식한다”고 말했다.

2010년 베트남에 진출해 지난해 2000만달러 판매를 달성한 팔도비나도 사정은 비슷하다. 컵라면처럼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베트남 라면보다 ‘끓여 먹는’ 한국 라면은 2배가량 비싸다. 팔도비나는 “끓여 먹는 라면이 진짜”라며 현지인의 입맛을 바꾸는 데 갖은 고생을 했다.

현지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팔도비나’를 ‘한국 라면회사’로 부른다. 굳이 한국 기업임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김명진 영업팀장은 “베트남에서 한류가 인기 있으니까 한국 기업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한국 드라마와 K팝 등 문화 콘텐츠가 한국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소비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현지 기업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기업발 한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베트남 외식업계 점유율 1위(25%)인 롯데리아는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

■ “한국 콘텐츠? 안 먹혀”

한류와 소비, 연결 힘들어
한국 이미지만 앞세우던
교육 콘텐츠 사업은 참패

한국 이미지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도 있다. 메가스터디가 베트남 대그룹과 합작해 세운 넥스에듀는 지난해 1월 ‘한국’을 앞세우다 실패를 맛봤다. 당시 넥스에듀는 한국의 기업 직무교육 콘텐츠를 번역해 제공하면 베트남 직업교육 시장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현실은 달랐다. 베트남 대기업인 빈그룹 관계자는 넥스에듀가 가져온 콘텐츠를 보며 말했다. “베트남인들은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경우가 많다. ‘한강의 기적’은 존중하지만 한국의 교육 콘텐츠 수준은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친다.” 베트남 대형은행인 비엣틴뱅크 담당자도 “한국의 경쟁자는 미국·유럽 기업이다. 우리와 계약하려면 콘텐츠 수준을 높여오라”고 했다. 현재 넥스에듀는 콘텐츠 개발에 힘쓰고 있다.

김지연 넥스에듀 연구원은 “한국 콘텐츠가 베트남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며 “이곳에서 한국 기업이 성공한 것은 ‘한국 기업’이라서가 아니라 ‘콘텐츠 자체가 세계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에서는 미국·유럽·일본 기업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해외 진출 기업이 많다 보니 영어 교육의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우형민 베트남 국제교류재단 소장은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1만명으로, 한국어 교수를 늘려달라는 각 대학의 요구가 빗발친다”면서도 “베트남에서 좀 더 경제수준이 높은 가정은 영어를, 그보다 낮은 가정은 한국어를 배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류의 힘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그보다는 세계 기업과의 경쟁력을 더 중심에 둬야 한다”고 했다.

<하노이·호찌민 |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창간 기획-콘텐츠가 미래다]한류는 단지 ‘마중물’일 뿐…성패 가르는 건 글로벌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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