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호가 커지면 ‘비경’은 ‘비명’이 된다

2020.09.06 21:13 입력 2020.09.06 21:17 수정

남미 페루를 지나는 안데스산맥의 해발 4562m 고지대에 위치한 ‘팔카코차 빙하호’. 1941년 빙하호를 지지하던 방벽이 붕괴되면서 다량의 호숫물이 쏟아져 주민 4000여명이 숨졌다.  페루 국립빙하생태계연구소(INAIGEM) 제공

남미 페루를 지나는 안데스산맥의 해발 4562m 고지대에 위치한 ‘팔카코차 빙하호’. 1941년 빙하호를 지지하던 방벽이 붕괴되면서 다량의 호숫물이 쏟아져 주민 4000여명이 숨졌다. 페루 국립빙하생태계연구소(INAIGEM) 제공

2018년 세계 빙하호 1만4394개
30년 동안 수·덩치 1.5배 증가
기후변화로 빙하 녹는 물 증가
방벽 붕괴 땐 대참사 재현 우려

“앞으로 30년간 10배 늘 수도”
배수 시스템 구축, 재앙 막아야

새하얀 눈과 짙은 고동색 땅이 어우러진 남미 산악지대에 호수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페루를 지나는 해발 4562m의 안데스산맥 고지대에서 에메랄드빛을 뿜고 있는 이 호수의 이름은 ‘팔카코차’. 언뜻 백두산처럼 화산 분화구에 물이 찬 칼데라호로 보이지만 오목하게 들어간 지형에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빙하호(Glacial Lake)’다. 팔카코차 빙하호의 수량은 약 1700만㎥에 달한다. 올림픽 규격 수영장 6800개를 채울 양이다.

지금은 팔카코차 어디를 둘러봐도 평화롭기만 하지만 1941년 12월13일의 호수는 달랐다. 거대한 눈사태가 팔카코차 빙하호에 쏟아졌던 것이다. 빙하호 표면에 강한 파도가 생긴 데 이어 호수를 지지하던 자연 방벽이 무너졌다. 토양과 암석이 뒤섞인 호숫물이 산 아래 도시 후아레스를 덮치면서 주민 4000여명이 숨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 30년 새 우후죽순 ‘빙하호’

문제는 이런 재난이 ‘옛날이야기’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주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에 논문을 발표한 미국과 캐나다, 영국 연구진에 따르면 2018년 전 세계 빙하호 개수는 1990년보다 53% 증가한 1만4394개에 달했다. 같은 기간 부피는 48% 늘어난 156.5㎦에 이르렀다. 약 30년 동안 빙하호 개수와 덩치 모두 대략 1.5배나 늘어난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분석을 위해 25만4000여장의 위성사진을 확인했다.

전 지구 단위에서 빙하호가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얼마만큼의 물이 빙하호에 담겼는지 등이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빙하호는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아이슬란드, 러시아, 캐나다, 네팔 등 빙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늘어나고 있다. 이유는 역시 기후변화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스테판 해리슨 영국 엑서터대 교수는 일간 가디언을 통해 “우리의 연구는 지구표면이 기후변화에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지 보여준다”며 “빙하호 붕괴로 지난 세기에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팔카코차 빙하호에서 파이프로 물을 빼내 수위를 안정화하는 모습. 빙하호 수면으로 눈사태가 덮치거나 큰 빙하가 빠져도 방벽을 훼손할 만큼의 대형 파도가 생기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페루 국립빙하생태계연구소 제공

팔카코차 빙하호에서 파이프로 물을 빼내 수위를 안정화하는 모습. 빙하호 수면으로 눈사태가 덮치거나 큰 빙하가 빠져도 방벽을 훼손할 만큼의 대형 파도가 생기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페루 국립빙하생태계연구소 제공

■ “호숫물을 빼라” 총력

그런데 이런 빙하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갈증을 해결하는 원천이다. 아시아와 남미의 일부 주민들에겐 빙하호가 상수도 시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식으로 신선한 물을 얻는 건 ‘아랫돌 빼 윗돌 괴는 격’이라고 보고 있다. 빙하가 지속적으로 생성되지 않는 상황에서 빙하가 녹은 물을 별다른 관리 없이 흘려보내고 일부만 이용하는 방식은 미래에 물 부족을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빙하호에는 호숫물을 적절히 배수해 소규모 댐에 가두고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하는 시설이 부족하다.

빙하호의 물을 적당한 수준으로 빼내 수자원화하는 시설은 빙하호 붕괴 같은 대재앙을 막는 일과도 직결된다. 미국 지구물리학회(AGU)에 따르면 페루에서는 1941년 팔카코차 빙하호가 붕괴되며 큰 피해를 본 뒤 빙하호 주변에 흙으로 만든 높이 8m짜리 인공 방벽을 쌓는 동시에 호수 내부에서 물을 빼내는 파이프를 설치했다. 1970년에는 지진으로 방벽이 훼손되자 재공사를 하면서 지름 122㎝짜리 대형 강철 배수관을 추가 설치했다. 이 같은 노력은 성과로 나타났다. 2003년 팔카코차로 초대형 빙하가 쏟아져 들어와 거대한 파도가 발생했지만 빙하호는 붕괴되지 않고 버텼다. 1941년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참사의 재현을 막은 것이다.

상황이 다급한데 구축해 놓은 배수로가 부족하다면 긴급 공사를 벌이기도 한다. 2016년 네팔 정부는 히말라야산맥의 해발 5000m에 위치한 ‘임자 빙하호’의 물을 빼내는 공사를 6개월 동안 벌여 수심 150m에 달하던 호수 수위를 3.5m 낮췄다. 공사에 나선 노동자와 군인 140여명이 거친 날씨와 고산병을 이겨내며 산 아래 주민 5만여명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 우려되는 빙하호의 ‘폭발적 증가’

하지만 빙하호의 형성 속도가 이 같은 인간의 대응 속도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빙하호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빙하 같은 얼음은 지상에 도달하는 햇볕을 되쏘는 일종의 반사판이다. 하지만 빙하가 녹아 물이 되면 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녹은 빙하 때문에 더 많은 햇볕이 지상에 흡수되고, 이로 인해 대기가 달궈지면서 더 많은 빙하호가 형성되는 악순환이 생길 것이란 얘기다.

김백민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는 “한번 빙하호가 증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지난 30년 동안 1.5배 늘었다면 향후 30년 동안에는 10배 이상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빙하에 인접한 전 세계 도시에서 상시적인 대형 물난리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현실화하고 있어 각국 정부의 재난관리에도 비상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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