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산불 이재민의 일상 회복이 더딜수록 ‘기후 적응력’ 낮은 사회

2023.06.25 21:29

① 한국 사회 잘 적응하고 있나

[1.5도 너머 기후위기적응을 말하다] 수해·산불 이재민의 일상 회복이 더딜수록 ‘기후 적응력’ 낮은 사회

<b>아직 되찾지 못한 안락함</b>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4리 주민 김옥기씨(88)가 지난달 29일 자신의 집에서 아직 복구하지 못한 방에 앉아 있다. 문재원 기자

아직 되찾지 못한 안락함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4리 주민 김옥기씨(88)가 지난달 29일 자신의 집에서 아직 복구하지 못한 방에 앉아 있다. 문재원 기자

포항과 울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이주대책 없고 집엔 곰팡이
태풍 힌남노 상처 남은 주민
“또 태풍 오면 알거지 전락”
산불로 컨테이너 사는 주민
“땅 주인이 쫓아낼까 걱정”
재난 후 고통 취약층이 커
일상 회복 시스템 마련 중요

기후 재난을 대비하는 것만큼이나 재난 이후 사회의 ‘회복’도 중요하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기후변화 적응의 3가지 축 중 하나로 ‘회복력의 강화’를 꼽는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도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기후변화 적응의 주요 요소로 꼽았다. 올해 11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서 개막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실무진 협상에서도 적응 목표 설정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기후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탄력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지난해 3월 초대형 산불로 피해를 본 울진, 같은 해 9월 태풍 힌남노가 수많은 이재민을 만든 포항의 오늘은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다.

■ 돌아가지 못한 ‘수해 이전 삶’

지난달 29일,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리에는 전날부터 최대 94.5㎜에 달하는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창문을 ‘타닥타닥’ 때릴 때마다 주민들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로 제내리 일대는 집 안 2m까지 물이 찼다. 주민들은 다락방으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제내리 옆 칠성천은 이틀간 내린 비에 금세 불었다. 제내리는 하천 제방보다 수m 낮은 곳에 자리잡아 ‘상습침수지역’이다. 물이 제방을 넘으면 마을은 꼼짝없이 잠긴다. 이미 4차례나 수해를 겪었다.

제내리에서 40여년을 이웃하며 살아온 동갑내기 정화자씨(80)와 한차섭씨(80)는 이날 그치지 않는 비를 보며 밤을 새웠다. 한씨가 말했다. “물난리 나고, 본정신 돌아온 지가 이제 몇 개월 안 돼. 비가 오면 걱정이 돼서 누워 있다가도 바깥에 나가보고, 자다가 일어나서도 나가본다.”

정씨가 지난해 물난리를 겪은 집안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은 새 것이었다. 물에 잠긴 뒤 다 새로 샀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곰팡내가 더 많이 났다. 장판을 들추니 새까만 곰팡이 띠가 나타났다. 정씨는 한 달 기름값만 70만원을 쓰며 보일러를 두 달 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유원호씨(67)는 지난 5월28일 밤, 집을 비우고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갔다. 각종 전자제품의 전기 코드는 다 뽑아뒀다. 유씨는 “집사람이 하도 불안해해서, 고층 아파트에 사는 동서 집으로 갔다 왔습니다. 거기까지는 물이 안 찰 거 아입니까”라고 말했다.

수해의 기억은 불편함도 잊게 만든다. 제내리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김모씨의 방은 벽 한쪽이 휑하다. 수해 전에는 붙박이장으로 가려져 있던 벽이다. “방에 아무것도 없니더. 다 떠내려가고 농(장롱)도 안 샀니더. 또 떠내려가면 우야노.”

제내리 주민들이 수해를 겪은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 아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도 동네가 침수됐다. 저수지 둑이 터졌고 집집마다 거실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지난해 힌남노는 매미를 뛰어넘었다. 방 안까지, 삶을 위협할 정도로 물이 찬 것은 처음이었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과거 빈도’를 기준으로 대책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이동근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재난 대책은 ‘과거’의 기상 조건을 바탕으로 만든다”며 “(전 지구 평균기온이) 1.1도 오른 것이 지금인데 1.5도 이상 올랐을 때의 ‘극값’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난 대책과 아예 다른 ‘적응’ 차원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민들은 지난해 11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책위는 “제내리가 상습피해지역임에도 행정당국과 시·도,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의원들은 그때만 적당히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주장한다. 대책위 서명운동에 주민 2000여명 중 924명이 참여했고, 이를 지난 1월 포항시에 전달했다. 대책위는 제방을 높이라거나 빗물펌프장 기능을 강화하라는 단순한 요구만 하지 않았다. 포항시에 아예 ‘이주 대책’을 요구했다. 김해식 대송면 이주 비상대책위원장은 “더 큰 태풍이 오고 침수되면 주민들은 알거지가 될 수밖에 없고, 인명 피해도 염려된다”고 말했다.

포항시는 우선 ‘토건 대책’만 세웠다. 형산강 하도 정비, 항사댐 건설, 차수벽 설치, 빗물펌프장 기능 개선 등이다. 이 대책만으로는 주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주 대책이 포함된 ‘안전도시 조성 제도 개선 및 도시진단 용역’은 이달 입찰 공고를 냈고, 2024년 8월 완료된다. 포항시 관계자는 “힌남노 같은 태풍이 와도 하천에서 물이 범람하지 않는다면 이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심도터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난다면 1조가 넘는 예산이 필요할 수 있는 만큼 중앙정부에 예산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 일대에 산불 이재민이 살고 있는 컨테이너 집 6곳이 모여 있다. 컨테이너 뒤편으로 산불 피해지의 모습이 보인다. 강한들 기자

지난달 26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 일대에 산불 이재민이 살고 있는 컨테이너 집 6곳이 모여 있다. 컨테이너 뒤편으로 산불 피해지의 모습이 보인다. 강한들 기자

■ 불안 꺼지지 않는 ‘산불 이후 삶’

회복탄력성에도 ‘취약계층’이 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회복탄력성이 크다. 그래서 재난 이후 취약계층을 우선 지원하는 것이 ‘기후 적응’의 대원칙이다.

지난달 26일 찾아간 경북 울진군 북면, 죽변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곳곳에 자리잡은 ‘컨테이너집’ 무리였다. 가로 3m, 세로 9m. 8평 남짓한 공간에 지난해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한 가구씩 산다. 지금 똑같은 컨테이너집에 살 듯이 산불 이전엔 다 똑같은 가구였지만 산불 이후에는 집주인과 세입자로 갈라졌다. 산불이 이들을 갈라놓을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도시의 세입자와 시골의 세입자는 다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폐가’가 되니, ‘집 관리’ 차원에서 저렴한 가격에 세를 놓는 집주인이 많다. 계약서를 제대로 쓰지 않는 사례도 흔하다.

강현철씨(59)도 비슷했다. 내 돈으로 집을 직접 고쳐가며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산불은 ‘흔적도 없이’ 집을 태웠다. 강씨는 산불이 나고 나서야 ‘내가 세입자였구나’를 체감했다. 집주인은 정부지원금·국민성금을 받아놓고도 강씨가 살던 집을 다시 짓지 않기로 했다. 강씨는 집과 붙어있던 밭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강씨는 “다른 지역에서는 돈을 줘서라도 주민을 들이려 하는데, 울진은 세입자 이재민들에게 지역을 떠나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산불 지원금은 세입자와 집주인에게 차등 지급됐다. 세입자 이재민은 정부지원금, 국민성금을 합쳐서 최대 5000만원 정도를 받았다. 집주인 이재민은 ‘최소’ 9000만원을 받았다. 집이 모두 탔으면 ‘비상시 거주’한 경우에는 9000만원, 집에 집주인 또는 세입자가 상시 거주한 경우에는 집 면적에 따라 9000만~1억8000만원이다. 세입자가 살던 집의 주택 소유자는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다. 세입자들은 ‘폐가’ 수준의 지원도 받지 못해 부당하다고 여긴다. 특히 국민성금 지원액에서 금액차가 컸다. 세입자 이재민은 4225만원을 받은 반면, 25평 이상 집을 가진 주택 소유자들은 최대 1억4200만원을 받았다.

산불 이재민 사이에서 ‘세입자’는 낙인이 됐다. 최형호 울진 산불피해 세입자 이재민 대책위 부위원장은 “세입자라는 단어 하나 붙여서 인간 취급도 못 받는 것 때문에 산불 났던 것보다 마음속에 더 큰 불이 났다”고 말했다.

세입자 이재민들은 내년이 더 막막하다. 이재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컨테이너집의 계약 기간은 앞으로 1년 정도 남았다. 울진군 소유가 아니라 울진군이 임대한 사유지에 놓인 컨테너이집들이 특히 위태롭다. 세입자들은 땅 주인이 땅을 비워달라고 요구할까 두렵다. 살던 곳에 다시 집을 짓고 살고 싶지만 집주인이나 땅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자체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는 회복하긴 커녕 균열만 생겼다. 지난 5월25일 회의에서 울진군은 직접 들어온 성금을 세입자, 자가 소유자, 소상공인 등 다양한 주체가 자발적으로 나누라고 했다. 주시현 울진 산불피해 세입자 이재민 대책위 위원장은 “사실상 갈등을 방치한 셈”이라고 말했다.

정휘철 한국환경연구원 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기후변화는 식량, 에너지 등 모든 사회 문제로 전파되며, 취약계층은 특히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적응의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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