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 진보와 보수를 넘어

2012.11.15 22:16 입력 2012.11.15 23:01 수정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송윤경·심혜리 기자

진보·보수 대화, 정부·시민사회 역할 분담… 다음은 남·북 인권 대화

한국의 북한 인권 담론과 운동은 한 단계 진화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시민사회엔 북한 인권에 관한 한 ‘보수의 틀’밖에 없었다. 지난 15년간 한국 내 북한 인권운동은 북한 정권을 고발하고 창피를 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특히 보수·우익 진영은 대체로 정권만 붕괴되면 인권문제가 풀린다는 북한 정권 타도론에 편향돼 있었다. 이 방법은 북한 인권문제를 공론화하는 덴 주효했다. 그러나 단선적이고 급진적인 이러한 방식은 실질적 인권 개선의 결과물을 낳지 못했다. 북한 정권은 남한 보수의 공세를 내부 단속 강화의 명분으로 삼았고, 이것은 인권 개선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인권문제가 정치적 선전을 통한 외부의 압박만으로 해결된 적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독재정권의 제거가 인권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라크 사례가 말해준다. 국내에서도 최근 북한 인권 ‘제3의 길’(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 ‘새로운 접근’(북한인권시민연합), ‘좌우대통합’(시대정신·사회민주주의연대) 등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의 북한 인권 담론과 운동이 실질적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향후 진보와 보수를 포괄하는 한국의 시민사회와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 간의 전략적인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북한 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2부 (5) 진보와 보수를 넘어

▲ 진보진영은 그동안의 냉담과 무관심 반성하고
현실적인 대안 제시로 인권운동 참여 선언해야

▲ 그리고 보수진영은 압박과 고립 방식 버리고
정치색 뺀 통합 접근으로 양 진영 대화채널 모색을

김수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 인권은 이미 우리가 수동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 국제 이슈화된 문제”라며 “이제 한국이 주도적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풀 것인가를 놓고 좌우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는 북한 인권 개선운동의 핵심 주체가 돼야 한다. 인권문제를 놓고 북한에 비정치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은 북한 당국이 상대적으로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진보 진영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운동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북한 인권이 남남갈등의 주요 소재가 되면서 보수의 북한 인권 활동은 범국민적 동의와 지지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고도로 정치화된 북한 인권문제를 순수한 인권의 영역으로 되돌리기 위해 우선적으로는 진보 진영이 그간의 냉담과 무관심을 반성하고 북한 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북한 인권의 지나친 정치 도구화를 종식할 수 있는 힘을 진보가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진보 진영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특별위원장을 지낸 최영애 ‘여성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 대표이사는 “진보는 북한 인권운동을 정통으로 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불식시킨 인물 사례다. 최 대표는 2년 전부터 한국 내 탈북 여성들의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탈북자를 돕다 보면 곧 함께 체제비판을 해 결국 북한 자극만 하게 될 것”이라는 진영 내 우려 섞인 시선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 내부 인권을 당장 개선하기 힘들다고 할 때 진보가 지금 북한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최 대표를 움직였다. 최 대표는 “한국 진보가 중국 내 탈북자 인권 개선, 국내 탈북자 정착지원 등 인권운동의 외연을 다양하게 넓힐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진보의 참여는 한국 시민사회 진영이 보수 편향이었던 기존 북한 인권운동의 틀을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 포용정책을 통해 현실적으로 북한 주민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나아가 북한 내 시민사회와 중산층을 양성해 인권문제를 해결하려던 진보의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수 진영은 일부 북한 인권운동이 비인권적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우려를 수용해야 한다.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는 “인권을 개선하는 방식이 강제적이거나 물리적인, 즉 반인권적인 방법에 의존할 경우 또 다른 형태의 인권침해를 초래한다”며 “효과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이를 거부해야 맞다”고 지적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사형제나 국가보안법 등 국내의 인권침해적인 요소들엔 침묵하면서 북한 인권에만 목소리 높이는 것은 선별주의적 접근”이라며 “인권운동을 표방하지만 정치운동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보수는 북한 주민의 먹고사는 권리(사회권)보다는 시민적·정치적 인권(자유권)을 우선시해왔다. 자유권 유린의 근본적 원인이 독재정권에 있다고 봤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보다는 북한 정권을 압박하는 데 치중했다. 그러나 압박과 고립은 당사국의 반발만 부른다.

북한 정권은 인권문제 유발의 당사자이자 해결 당사자다. 북한이 스스로 인권 개선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보다 통합적인 접근은 사회권과 자유권을 분리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진보)는 지난해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보수)와 공동으로 펴낸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합리적 접근>(사회통합위원회 발행)에서 “자유권을 주장하는 북한 민주화론과 생존권을 보장하는 북한 경제 성장론이 균형 있게 접근돼야 한다”며 “북한 경제의 회생과 발전을 통해 장기적으로 시민사회의 맹아가 형성되고, 인권의식이 증대되는 점진적, 단계적 과정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 진영 간의 대화 채널도 요구된다. 진보와 보수가 ‘북한인권회의’(가칭)와 같은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이 모임에서 공동의 목표와 역할 분담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대화 물꼬가 트이면 남북 인권 대화로 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다.

정부와 국회, 정당의 역할도 필요하다. 정부는 시민사회를 측면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주요 북한 인권단체들은 미국의 국립민주주의기금(NED)에서 돈을 받아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기형적 구조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로부터 매년 약 140만달러의 예산을 받아 북한을 지원하는 이 기금은 ‘북한 민주화와 인권증진’ 활동을 표방하고 있으나 북한 정권에는 적대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부가 북한 인권 관련 민간단체에 활동 경비를 보조하는 것을 의무화한 북한인권법을 진보진영이 마냥 외면만 할 일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경향신문이 설문조사를 했던 진보진영의 한 북한 인권 전문가는 “부작용이 우려되는 항목을 조정하고 북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되는 항목은 살리는 쪽으로 법안 자체를 수용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정치와 연계하지 않는 인도적 대북지원 매뉴얼도 요구된다. 현재 정부엔 “인도적 대북지원 등 북한 인권에 관한 매뉴얼이 없는 상태”(통일부)다. 이금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북지원 추진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인도주의 정신 구현보다는 남북관계 관리 및 개선이라는 정치적 목표에 더 치중해왔다”며 “실제 위기상황에 처한 주민들의 침해된 권리를 회복시켜주고자 하는 접근이 매우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보수 진영에서도 이미 인도적 지원에 동의하는 인사가 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캠프에서 북한인권특보를 맡은 박선영 전 의원은 “어린이용 백신과 초등학교 설립은 무조건적으로 해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도 “남북 간의 접촉면을 확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며 “개성공단 수익금 상당 부분이 체제 유지에 활용되기도 했겠지만 주민들의 생활 개선에 도움을 준 면도 분명히 있다”고 밝혔다.

북한 인권문제는 국제사회의 현안이기도 하다. 미국의 탈냉전 동북아 전략과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지금까지 북한이 핵 폐기의 진정성이 없는 한 대화하지 않고 제재로 일관했다. 북한 인권과 지원에 대해서도 원칙적이고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북한의 위성 발사에 대응해 영양지원(식량지원)을 중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은 미국에 인도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을 연계하지 말도록 요구해야 한다.

[북한 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2부 (5) 진보와 보수를 넘어

압박 위주의 미국식 방식보다 인도적 지원과 인권 개선을 동시에 추진하는 유럽의 병행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제안도 제기된다. 유럽은 북한과 양자 간 정치대화, 인권대화를 정례적으로 실시한 바 있다. 통일연구원은 ‘유럽연합의 대북 인권정책과 북한의 대응’이라는 보고서에서 “유럽식이 바람직한 이유는 대북 인권정책에서 양자 간, 다자 간 채널을 균형있게 활용하고 있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양자 간 대화를 통해 북한에 인권 개선을 설득하면서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대북인권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압력을 강화하는 식이다. 유럽연합은 공식적인 차원에서 북한의 체제와 지도자에 대한 붕괴, 교체 등을 위협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인권을 개선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와 함께 체제 전복을 전제로 하지 않는 헬싱키 프로세스의 단계적 적용과 북한의 시민사회 양성 및 민주화도 많은 전문가들이 시급한 해결 과제로 꼽았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북한의 변혁을 추동해야 하는 주체는 시민사회”라며 “10년 넘게 북 민주화 운동을 지원한 결과, 북 시민들이 전보다 외부세계에 관심을 많이 갖고 체제에 대한 불만이 늘었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