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문화촌·아파트촌·쪽방촌…질시와 배제의 이름 “○○촌”

2016.08.29 21:58 입력 2016.08.29 22:01 수정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촌’의 사회문화사

<b>설움의 신한촌</b> 1900년대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성됐던 ‘신한촌(新韓村)’. 굶주림과 망국의 설움,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의 질시와 배척이 만든 고독한 촌락이었다.

설움의 신한촌 1900년대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성됐던 ‘신한촌(新韓村)’. 굶주림과 망국의 설움,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의 질시와 배척이 만든 고독한 촌락이었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 ‘별건곤’ 1929년 9월호는 ‘대경성의 특수촌’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경성’으로 불렸던 당시 ‘서울’에서 별스럽다고 할 만한 곳으로 문화촌, 빈민촌, 서양인촌, 중국인촌, 공업촌, 노동촌, 기생촌 등을 꼽은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사한 모양의 집들이 모여 있거나 살림살이가 엇비슷한 계층이 한 데 어울려 살았거나 혹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었던 곳을 그저 뭉뚱그려 부른 이름이었을 터이다.

사실 촌(村)이라는 말은 ‘도회의 상대어’로, 마을이나 부락 혹은 시골을 뜻했음은 이촌향도(離村向都)나 여촌야도(與村野都) 등의 말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촌’이라는 말로 울타리를 둘러 얼추 그 경계를 구분하였으니 본래의 뜻과 달리 모여 사는 이들의 출신지나 직업 혹은 계층이나 집의 모양새로 구분한 것이다. 집단 구성원들이 제 동리를 구별하기 위해 따로 불렀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다른 이들이 시선을 통해 판타지로, 혹은 질시와 배척을 위한 구별짓기 수단으로 별칭을 붙여준 것이다.

■대경성의 특수촌과 신한촌

그런 의미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은 겹겹의 배제가 만든 슬픈 공간이다. 19세기 말 3년 내리 계속된 조선 관북 지방의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농사짓던 이들로 하여금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토막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강제했고, 여기에 한일병합 뒤 망명한 지사들이 가담해 조선인 마을로 꾸린 항일기지였기 때문이다. 굶주림과 망국의 설움, 러시아와 일본의 제국주의가 빚은 삼중의 질시와 배척이 만든 고독한 촌락이 바로 ‘신한촌’인 것이다.

슬픈 기억을 새긴 ‘촌’은 또 있다. 올해로 100년째를 맞은 소록도 ‘한센인촌’이나 제주 ‘전략촌’을 떠올릴 수 있다. 미국의 의료선교로 시작된 한센인촌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공중위생과 치안을 명분으로 배척된 고독한 섬이다. 문명국을 자처한 일본에 한센인의 모습은 가당치 않다고 여긴 조선총독부가 이들을 분리, 집단 수용한 것이다. 강제노동과 불임시술 등 반인권적 조처가 행해졌고, 환자들 가운데 일부는 소록도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일제가 선전한 ‘이상적 낙원’을 거부하며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잊힌 섬, 소록도의 한센인촌을 그렸다. 제주 ‘전략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4·3항쟁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에 등장하는 전략촌은 평화의 섬 제주의 양민들을 입산 폭도들의 약탈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배척한 공간이다. 뭍에서 온 경찰들은 섬사람들을 몰아세웠고, 그들에게 허기진 배를 안고 ‘전략촌’을 만들도록 강제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소설에 그려진다. 슬픈 현대사의 잿빛 기억이다.

<b>배제의 한센인촌</b> 폐허로 남은 전남 고흥의 소록도 ‘한센인촌’. 올해로 100년째를 맞은 한센인촌은 일제강점기 공중위생과 치안을 명분으로 배척된 고독한 섬 소록도에 들어섰다.

배제의 한센인촌 폐허로 남은 전남 고흥의 소록도 ‘한센인촌’. 올해로 100년째를 맞은 한센인촌은 일제강점기 공중위생과 치안을 명분으로 배척된 고독한 섬 소록도에 들어섰다.

■문화촌과 해방촌 그리고 난민촌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인 1916년 독일 유학을 마친 일본인 오야마 이쿠오는 ‘군국적 문화국가주의-독일 국민생활의 일면’이라는 글을 통해 “문화는 국가의 목적이고, 힘은 그 수단”이라 하였다. 이는 일본과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촌’과 문화주택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교양’을 뜻하기도 했던 ‘문화’가 대체적으로 지배층 일본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탓에 조선인들에게 이들 단어와 함께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하였다.

‘별건곤’의 내용을 다시 보자. “문화촌이라면 소위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 문화생활이라면 송판을 붙여 놓았더라도 집은 신식 양옥으로 지어 놓고 피아노에 맞춰 흐르는 독창 소리가 아니면 유성기판의 재즈밴드 소리쯤은 들려야 하고, 지붕 위에는 라디오 안테나가 가로 걸쳐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루에 한 번씩은 값싼 것일망정 양요리 접시나 부셔야 왈 문화생활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한 칸 셋방에 한 그릇 콩나물죽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조선 사람이, 더구나 찌들고 쪼들리는 서울 사람이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 것이냐”고 했다. ‘문화촌’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문화촌’은 이상향이 되었다. 서울 불광동이나 우이동과 같은 교외 주택지에 새로 들어서는 집들은 소위 개량온돌과 함께 변소나 욕탕 등을 따로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판유리와 색깔 입힌 기와, 방수 페인트 등을 사용해 ‘문화촌’의 중요한 판단기준을 만들었다.

당연히 ‘문화촌’은 상품이 되었고, 아파트에는 ‘문화촌’과 함께 ‘문화생활을 누리는 곳’이라는 이름이 붙어 다녔다.

용산1가동 일부와 용산2가동이라는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촌’이 붙은 명칭으로 잘 알려진 곳이 있으니 바로 ‘해방촌’이다. 피란민촌을 줄여 부른 ‘난민촌’은 ‘해방촌’과 짝패를 이룬다. 6·25전쟁 중에 부산 아미동, 동대신동 일대의 피란민촌 풍경은 작가 김원일의 <두 동무>에 잘 묘사되어 있다. “45도가 넘는 산비탈에 층층의 계단을 만들어서 누더기 집을 마구잡이로 지어 놓은 대단위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해방촌 묘사로는 이범선의 <오발탄>을 꼽는다.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산비탈 골목에 레이션 곽을 뜯어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버린 뜨물로 미끄러운 길에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더뎅이 모양 깔린 곳”인 것이다. 분단과 전쟁, 탈향으로 인한 뿌리뽑힘이 만든 불길하고 불온한 공간, ‘삼팔따라지들의 집합지’라 부르는 질시와 배제, 실향의 공간이 그곳, 해방촌이다.

이 밖에도 한국 사회를 민낯으로 드러내는 ‘촌’은 차고도 넘친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생명을 잃은 분들의 아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성된 ‘미망인촌’이 있었는가 하면 전쟁에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몸을 다쳐 생계가 막연한 이들을 정치선전 도구로 활용한 ‘상이용사촌’이나 석탄 채굴의 효율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막장 인생의 집합지라 부르곤 했던 ‘탄광촌’도 있다.

물론 기자들의 복지사업으로 조성된 ‘기자촌’도 있었고, 1960년대 이후 외화벌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 ‘외인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관료나 제국대학 교수들을 위한 ‘관사촌’이나 ‘교수촌’ 역시 아직 남아 있으며, 6·25전쟁 이후 외국 원조자금과 물자로 급하게 지은 후생주택들이 모인 ‘재건주택촌’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청계천 ‘판자촌’도 마찬가지다.

<b>질시의 문화촌</b> 1960년대 서울 불광동에 조성됐던 후생주택 단지.   국가기록원 제공

질시의 문화촌 1960년대 서울 불광동에 조성됐던 후생주택 단지. 국가기록원 제공

■아파트 시대에 나온 우스갯말 ‘고자촌’

1978년 7월 조선일보는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아파트 16년사’라는 작은 제목을 단 이 기사는 복덕방과 복부인의 전성기가 왔다고 전하면서 여의도 목화아파트를 시작으로 프리미엄과 함께 청약이나 분양과 관련한 부조리가 새로운 용어로 등장했고, 급기야는 효자, 효부의 기준까지 달라지고 있다고 전했다. 아파트의 짧은 역사를 소개한 이 글에서는 맨션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까지는 아파트 열기가 거의 없어 부인들이 아파트를 빌려 ‘하숙촌’으로 사용했고,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을 아파트보다 훨씬 선호한 까닭에 대지가 넓은 서울 동빙고동이나 서빙고동 일대 단독주택지에 도둑이 끊이질 않아 이 일대가 ‘도둑촌’으로 불렸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1977년 3월부터 투기자금이 아파트 분양시장으로 몰리면서 아파트 품귀 현상이 벌어졌고 정부는 가족계획의 일환으로 불임시술과 아파트 분양을 연계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자 아파트단지를 우스갯말로 ‘고자촌’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점잖게 말해 프리미엄의 시대요, 아파트 시대라지만 옳게 표현하면 ‘돈이 전부인 세상’으로 변한 것에 다름 아니다. 질시와 배제의 공간이 어느덧 동경의 대상으로 변했음을 치졸한 방식으로 응대한 것이기도 하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등장한 것이 1971년이고, 소득세 가운데 인적 공제 범위를 세 자녀까지로 한정한 세법 개정이 이뤄진 때가 1974년이다.

그 뒤 본격적 궤도에 접어든 가족계획 정책으로 인해 두 자녀 이하의 불임시술자에게는 공공주택 분양에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시책이 채택되었던 시절의 풍경이다. 지금이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아파트촌에 가려진 ‘쪽방촌’과 ‘자취촌’

1970년대 중반 이후 ‘촌’은 ‘아파트촌’으로 수렴되었다. 경공업 정책에 따른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논밭 가진 이들은 갈수록 느는 게 빚뿐인 시절이 되고 보니 야반도주가 심심치 않았다. 조정래의 소설 <비탈진 음지>에 등장하는 복천영감 역시 그렇다. 그가 질긴 목숨 부지한다고 나선 서울에서의 첫 일이 칼갈이였는데 처음 맞닥뜨린 곳이 바로 ‘아파트촌’이었다. 살림집에 사람이 서면 머리 위에 걸리는 것은 대들보요, 눕는 경우 마주하는 것은 벽뿐이어야 하거늘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오줌이며 똥을 싸고, 그것도 모자라 그 아래서 밥을 먹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과연 지금은 어떤 ‘촌’을 꼽을 수 있을까. ‘아파트촌’을 만들기 위한 개발붐에 밀려 삶의 현장에서 멀어진 세입자들이나 동강난 가족을 그리워하며 하루 일당을 벌어 생활하는 사람들의 공간, ‘쪽방촌’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여기에 원룸과 고시원으로 빽빽한 ‘자취촌’도 보탤 수 있다.대학을 중심으로 뿌리처럼 뻗은 골목골목마다 원룸과 고시원이 맞붙어 있는 곳, 보통의 주택가와는 달리 늘 떠들썩한 그곳에는 ‘풀 옵션 신축’ 따위의 플래카드를 건 말끔한 원룸 건물이 매일 들어선다. 정지향의 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에서 그리고 있는 희망조차 가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일상 공간, ‘자취촌’이다.

성석제의 장편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지능이 모자라 아이들에게까지 반편이라는 놀림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염습과 산역, 똥구덩이를 파는 울력, 가축 도살 등 동리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인물 황만근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진 장면으로 시작된다. 군 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던 날 외에는 단 하루도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는 황만근의 부재는 곧 마을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불편으로 다가오고 마을은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다.

있으나마나한 존재지만 없어서는 안될 사람, 황만근은 마을에서 없어진 지 일주일 만에 뼈가 되어 마을로 돌아온다. 농가부채 탕감 촉구를 위한 전국 농민 총궐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두들 버스나 트럭·승용차를 타고 대회에 나가지만, 황만근은 이장의 지시 그대로 백리 길을 경운기를 끌고 갔다가 궐기대회에는 참가하지도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그만 경운기가 차에 부딪는 바람에 논바닥에 처박혀 동사한 것이다.

‘실종’과 ‘사망신고’ 모두 타인의 행위에 의해 비로소 성립되는 것처럼 ‘촌’ 역시 타인에 의해 집단으로 호명되는 격리와 배제의 다른 이름이다. 황만근이 그러하듯 세상은 누군가의 부재를 생각하며 잠시 불편해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김없이 일상을 지속한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모두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들이다. 이 말은 누구나 평등한 존재 이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계인권선언 제29조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모든 이가 자유롭고 완전한 인격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구별 짓고 가두어 격리시키지 말고 더불어 살자는 말이다.

■촌에 살다…일제강점기 서양식 외관 ‘문화주택’ 모인 ‘문화촌’ 탄생

문화주택이란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주택지에 건설된 서양식 외관의 주택을 말한다. 일본 건축학자인 니시야마에 따르면 1922년 도쿄 우에노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민간업체가 ‘서양식과 일본식이 공존하는 이중생활 타파’를 내걸고 14채의 실물주택을 전시하고, 이곳을 ‘문화촌’이라 불렀고 각각의 집을 ‘문화주택’이라 칭하면서 유래되었다.

1960년대 말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조성됐던 ‘문화촌’ 전경. 새로 건축한 신식주택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문화촌으로 불렸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0년대 말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조성됐던 ‘문화촌’ 전경. 새로 건축한 신식주택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문화촌으로 불렸다. 국가기록원 제공

거의 같은 시기에 각종 언론매체와 전시회 등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며 서양풍 생김새와 재료를 사용한 주택(문화주택)들이 들어선 곳을 뭉뚱그려 일컫는 말로 ‘문화촌’이라는 별칭이 굳어져 1960년대까지 시대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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