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동물·환경 고민에서 시작된 채식주의 삶

2018.06.01 22:23 입력 2018.06.02 06:00 수정

그들은 왜 비건이 됐나

비건 베이커리 ‘숲속과자점’을 운영하는 이지혜씨가 갓 구운 비건브라우니를 오븐에서 꺼내고 있다. 이씨는 ‘식량주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이상훈 선임기자doolee@kyunghyang.com

비건 베이커리 ‘숲속과자점’을 운영하는 이지혜씨가 갓 구운 비건브라우니를 오븐에서 꺼내고 있다. 이씨는 ‘식량주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이상훈 선임기자doolee@kyunghyang.com

채식주의자로 사는 것은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소수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채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저마다 달랐다. 식량주권, 동물권, 환경에 대한 생각은 서로 조금씩 다르면서도 결국은 한곳에서 만났다. “환경 손실을 줄이면서 고통을 적게 산출하고 더 많은 음식을 생산하는 방법.” <동물 해방>으로 동물해방운동을 촉발시킨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채식에 대해 이같이 설명한다.

■ 식량주권 고민에서 시작된 비건베이킹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에 130만㏊의 땅을 99년간 임차했다.”

2008년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이지혜씨(32)는 눈을 뗄 수 없었다. 130만㏊는 대한민국 면적의 7.7%에 달한다. 대우로지스틱스는 빌린 땅에서 옥수수와 팜유를 재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해외농업개발사업에 나서면서 해외 토지를 임차하거나 구입하는 사업을 장려했다. 남의 나라 땅을 99년간 빌리다니, 충격이었다. 마다가스카르 국민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부패한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결국 정권이 교체됐고 사업은 무산됐다.

“마다가스카르에서 경작 가능한 땅의 3분의 1을 임차한다는 거예요. 또 한국 정부가 소를 키우는 데 필요한 옥수수 사료 등을 재배하기 위해 탄자니아에서 10만㏊에 달하는 농지를 조성할 계획이라는 기사도 봤어요. 식민주의, 빈곤, 생태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죠. 그때 생각했죠. 더 이상 고기를 먹을 수 없겠구나.”

비건페스티벌에서 판매된 비건 새우버거. 실제 새우를 사용하지 않고 식물성 재료로 만든 ‘새우’를 이용했다.

비건페스티벌에서 판매된 비건 새우버거. 실제 새우를 사용하지 않고 식물성 재료로 만든 ‘새우’를 이용했다.

이씨가 채식을 시작한 계기는 조금 특이하다. “출발은 랜드그랩(land grab), 즉 토지수탈 문제였어요. 저개발국의 대규모 경작지를 선진국의 정부나 대기업이 장기 무상임차를 하거나 매입해 자국으로 들여오기 위한 곡물, 사료 작물을 경작하는 거예요. 식량주권에서 시작된 관심이 생태나 환경, 농업 문제로 넓어지면서 비거니즘을 접하게 됐죠.”

이씨는 차근차근 고기를 끊었다. 처음엔 붉은 고기, 다음엔 가금류를 끊었다. 지금은 집에서는 비건식을 하지만, 밖에선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살고 있다.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통일로에 있는 북카페 레드북스에서 이씨를 만났다. 가게에 들어서자 이씨가 칠흑 같은 반죽을 섞고 있었다. 그는 비건 브라우니를 만들고 있었다. 국산 밀가루, 공정무역 마스코바도 설탕, 코코아가루, 버터 대신 현미유, 우유 대신 아몬드유가 들어갔다. 팥조림을 섞어 단맛을 더한 반죽을 이씨가 작은 오븐에 집어넣었다.

“채식을 시작했을 때 간식을 참는 게 힘들었어요. 예전엔 비건 과자류를 쉽게 구할 수 없었거든요. 비건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을 과자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죠.”

이씨는 비건 베이커리 ‘숲속과자점’을 운영하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가게를 열진 않았지만, 알음알음 주문을 받아 판매하고 있다. 비폭력운동과 환경운동을 하기도 했던 이씨는 케이크나 과자에 특별한 메시지를 담기도 한다. ‘해조아 핵싫어 탈핵 타르트’ ‘piece of PEACE 브라우니’를 만들기도 했다.

동물성 원료 없는 비건 베이커리

동물권 테마 음악 하는 ‘팻햄스터’

‘고기없는월요일’ 운동에도 참여

저마다의 고민이나 계기 달랐지만

육류 소비만 줄여도 문제 해결이란

같은 결론 도달해 삶의 방식 바꿔

우유와 버터, 계란을 넣지 않고 식물성 오일을 이용해 만든 다양한 비건 베이커리들이 비건페스티벌에서 선보였다.

우유와 버터, 계란을 넣지 않고 식물성 오일을 이용해 만든 다양한 비건 베이커리들이 비건페스티벌에서 선보였다.

숲속과자점의 운영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는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는 수입 밀가루를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0%가 안되고 밀은 더 낮아요. 밀가루 수입 과정에서 탄소발자국 문제도 발생하죠. 해외 대규모 경작지에서 헬리콥터로 농약을 살포하고 방부제를 쓰기 때문에 건강에도 안 좋아요.” 또 하나는 1회용품을 쓰지 않는 것이다. 장터 같은 곳에 나갈 때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거나 뻥튀기에 얹어 판매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오븐에서 풍겨왔다. 막 꺼낸 따끈한 브라우니엔 팥조림으로 만든 평화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이씨에게 채식을 해서 좋은 점을 물었다. “매번 살아가는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죠. 뭘 먹느냐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이고 많은 것을 포함하는 문제예요. 직접 요리를 해서 비건식을 할 수 있을 때, 내가 만든 음식을 친구들과 나눌 수 있을 때 행복하다고 느껴요.”

■ 왜 인간을 위해 동물을 착취하나요

떡 벌어진 어깨의 건장한 체격을 한 남성이 마치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인간이 고기·계란·우유·치즈를 먹는 이유는 네 가지다. 습관·전통·편리성·맛 때문이다.” ‘초식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남성은 동물보호운동가 게리 유로프스키다. 유로프스키가 미국 조지아 공대에서 한 강연 영상은 유튜브에서 408만회 이상 조회됐다. 그는 축산업에서 착취당하는 동물의 실태, 잔인한 도살 과정, 육식의 폐해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고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한 공장식 축산시설에서 이뤄지는 잔인한 학대를 보여주며 “눈에서 불쾌한 것이 왜 입에선 즐거울까”라고 반문한다. 이 영상은 김동규씨(31)를 비건으로 바꿔놓았다.

[커버스토리 - 비건이 사는 법]식량·동물·환경 고민에서 시작된 채식주의 삶

“강연을 보면서 내가 감정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꼈던 부분이 조목조목 짚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생각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로부터 6년째 김씨는 비건으로 살고 있다. ‘팻햄스터’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인 그는 동물권과 다양성을 테마로 하는 전자음악을 해오고 있다.

김씨는 “채식은 하나의 삶의 방식이고 신념인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근 채식 레스토랑이 늘면서 채식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체감될 정도는 아니다. 김씨는 “한발짝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비건을 배려하는 사회가 됐다고 느끼긴 힘들다”며 “한국에선 비건 제품을 만들지 않는 기업들이 해외에 가면 채식 라면과 같은 비건 제품을 판매한다. 한국에선 비건 제품에 대한 수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비건이 되고 나서 행복한 점이 뭔지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비건이 되고 나서 좋아진 게 하나도 없어요. 동물이 어떻게 착취당하는지를 잘 알게 되고, 동물을 착취한 제품의 소비를 더 줄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가령 ‘오랑우탄 서식지를 파괴하는 팜유를 쓴 채식 라면은 과연 비건 제품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 확대되는 거예요. 그래도 같은 신념을 갖고 활동하는 비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할 때가 좋아요.”

■ 지구온난화의 주범, 축산업

지난달 말 독일 베를린에서 ‘제도적인 육류 감축을 위한 회담’이 열렸다. 전 세계 70여개 채식·동물단체가 모인 회담에서는 육류 감축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회담의 주제는 ‘50 by 40’이었다. 2040년까지 육류 소비를 50% 줄이자는 목표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공장식 축산업에 기반한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지혜씨가 만든 비건브라우니의 원료가 된 현미유, 국산 밀가루, 코코아파우더, 공정무역 마스코바도 설탕(왼쪽부터).

이지혜씨가 만든 비건브라우니의 원료가 된 현미유, 국산 밀가루, 코코아파우더, 공정무역 마스코바도 설탕(왼쪽부터).

축산업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지적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유발 요인 가운데 가장 큰 원인으로 공장식 축산을 꼽고 있다. 유엔은 소 방목이라는 명목으로 아마존 우림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또 쇠고기 생산 과정에서 방출되는 온실가스 비중은 18%로 자동차 등 교통수단이 발생시키는 온실가스보다 많다고 분석했다. 낙농업이 발달한 덴마크와 뉴질랜드에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붉은 고기에 ‘방귀세’로 불리는 추가 세금을 물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고기없는월요일(Meat Free Monday)’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현주 대표는 “밀집된 동물들이 이산화탄소뿐 아니라 메탄, 아산화질소 등을 집중적으로 배출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15년째 채식을 해오고 있다.

‘고기없는월요일’은 비틀스의 전 멤버 폴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 대표는 “육류 소비를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소고기 소비를 10%만 줄여도 전 세계 13억 기아인구를 충분히 먹일 수 있는 곡물의 양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며 “기아와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육류 소비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채식엔 다양한 스펙트럼 존재…한국선 덩어리 고기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비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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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라고 모두 ‘풀’만 먹는 것은 아니다. 단계별로 채식을 실천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모든 동물성 식품을 배제한 것이 비건이라면, 해산물까지는 먹는 페스코, 유제품은 먹는 락토, 달걀은 먹는 오보, 닭고기는 먹는 폴로 베지테리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한국에 특화된 채식주의자가 있다. 이른바 ‘비덩’이다. 덩어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란 뜻으로, 육수가 들어간 음식이 많은 식문화 때문에 ‘건더기’를 뺀 국물 등을 먹는 경우를 말한다. 채식을 지향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의 한국 버전이다.

“한국에서 완벽하게 채식을 하려면 사회생활을 안 해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는 불가능하니까. 소고기 국물, 멸치 국물까지 피하긴 힘들죠. 과자나 빵 같은 데 우유가 안 들어간 것을 구하기도 힘들어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거죠.”

2000년부터 채식을 해온 이윤기 마산YMCA 사무총장(52)은 자신이 ‘비덩’이라고 했다. 건강과 환경에 대한 생각에서 채식을 시작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물성 식품을 안 먹기는 불가능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식사하면서 고기를 안 먹고 있으면 왜 안 먹느냐고 하죠.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그때부터 질문과 설득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한약 먹는다’고 대답하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아요. 한약을 먹으면 이해하면서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꺾으려고 하죠.”

이 사무총장은 ‘설득하려 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며 “장애인이나 이주민 차별, 성차별 등 다른 존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도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이 사무총장은 학교의 우유급식비가 급식비에 의무적으로 포함되는 데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경남도교육청을 상대로 운동을 벌인 끝에 우유급식은 선택제로 바뀌었다.

최근 서울에서 채식 레스토랑이나 메뉴가 증가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지방에선 오히려 채식 식당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 사무총장은 “5~6년 전 웰빙바람을 타고 채식 뷔페 등이 많이 생겼는데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며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1년 반 전부터 채식을 하고 있는 김효진씨(25)도 자신을 플렉시테리언이라고 소개한다. 회사에 면접을 보면서 “식당에 채식이 지원되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합격했다. 김씨는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아예 육류나 우유 등을 피하긴 힘들어 상황에 따라 채식을 한다”며 “혼자 있을 땐 비건식을 한다”고 말했다. 쌀국수 집에 가면 고기 덩어리를 뺀 국물만 먹는 식이다. “이제 고기 먹어도 되겠다”란 말을 듣기도 한다. 김씨는 “이건 먹으면서 이건 왜 안 먹냐고 물어보는 건 비거니즘을 너무 납작하게 보는 것 같다”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진이 빠진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월 유니버스’란 이름으로 유튜브에 비거니즘 관련 콘텐츠를 제작해 올리고 있다. 김씨는 “영상을 보고 한 명이라도 가죽 구두를 안 사거나, 한 끼라도 고기를 안 먹을까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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