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 가슴에 ‘시골살이’ 불 지핀 그 언니들

2022.09.03 06:00 입력 2022.09.03 08:37 수정

귀농·귀촌 청년들의 디딤돌 되고 싶어 의기투합한 ‘시골언니’들 ···전국 8개 지역 언니들 총출동

“어서와 시골은 처음이지?” 전국 곳곳의 시골언니들이 청년여성들의 평화로운 시골살이 가이드를 위해 나섰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어서와 시골은 처음이지?” 전국 곳곳의 시골언니들이 청년여성들의 평화로운 시골살이 가이드를 위해 나섰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시골언니와 함께 8박9일을 지내며 평생 생각하지도 않았던 시골살이, 귀농·귀촌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졌으며… 상주에서 살아간다면 내가 이 마을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등 제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다시 도시에서의 일상생활로 돌아온 지금, 처음 도시에 온 사람처럼 도시가 버겁고 시골이 너무 그립습니다.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시골살이에 도전할 것입니다.”

지난 8월 경북 상주에서 열린 ‘시골언니와 함께하는 자급자족 시골라이프 체험’을 통해 시골언니와 살면서 지역과 교류하고 시골 생활의 기술을 배운 참가자의 후기다. ‘시골언니’는 대체 누구기에 도시인의 가슴에 시골살이의 불을 지폈을까.

상주의 시골언니는 2017년 이주한 백아름씨(27)와 이듬해 합류한 마민지씨(28)다. 시골언니들은 물론 농사도 짓는다. 하지만 시골살이라고 농사밖에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다. 마을사람들과 귀농·귀촌 청년들이 모여 만든 청년이그린협동조합 멤버인 두 사람은 달두개학교라는 폐교를 이용해 카페, 목공방, 도자기 공방, 곤충체험전시실, 도서관, 웹툰창작소, 마을 동아리방 등을 운영하고 있다. 백씨는 시골에서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확인하고 대학 친구인 마씨를 불렀다. 마민지씨는 “(청년들이) 시골에 내려오면 여성들이 좀 더 잘 버틴다”며 “농촌과 자연에 대한 생각이 좀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시골언니와 함께하는 자급자족 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상주 시골언니.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시골언니와 함께하는 자급자족 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상주 시골언니.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더 새롭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마씨)는 바람과 “귀농·귀촌하려는 청년들의 디딤돌 역할을 해보고 싶다”(백씨)는 소망을 가진 이들이 이번 여름 거국적으로 의기투합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정식사업명은 청년여성 농업농촌탐색교육사업이다. 농촌 정착에 관심 있는 젊은 청년여성을 위해 시골언니들이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운영기관인 농사펀드·브랜드쿡 컨소시엄의 김경미 팀장은 “농촌에 기반을 두지 않은 여성의 농촌 정착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하다 지역의 관계망 혹은 농촌의 삶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시골에 사는 여성들의 삶을 전면에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직관적인 이름 ‘시골언니 프로젝트’로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농촌에 대한 막연한 생각 사라져 ···도시가 삶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것 알게 돼

- 청년여성들의 참가 후기

농업을 전제로 한 귀촌을 촉진하는 방식의 정착 지원은 ‘농촌에서 살아보기’ 등의 형태로 확장됐으나 ‘청년여성’과 지역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프로그램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첫 시골언니 프로젝트 현장운영기관 선정에는 21개 단체가 지원해 1차 서면평가, 2차 현장실사, 3차 발표평가를 거쳐 최종 8개소 생태전환마을 내일협동조합(강원 강릉), (주)자연에서 찾은행복(충남 서천), 사단법인 10년후순창(전북 순창), 협동조합청풍(인천 강화), 고래실(충북 옥천), 덕산누리협동조합(충북 제천),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울산 울주), 청년이그린협동조합(경북 상주)이 선정됐다.

‘기후위기 시대, 지구와 나를 위한 퍼머컬처 학교’를 여는 강릉의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기후위기 시대, 지구와 나를 위한 퍼머컬처 학교’를 여는 강릉의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김 팀장은 “시골에서 멋지게 사는 언니들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현장운영기관 사업공모를 통해 생생한 시골언니들의 모습을 확인하니, 8개 기관만 선정하는 데 어려움과 아쉬움이 많았다”고 전했다. 시골에 사는 청년여성들의 삶을 고민하는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사업설명회 과정에서 개설한 오픈채팅방은 아직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각 지역 시골언니들이 청년여성들을 위해 꾸린 시골탐방 캠프 프로그램은 다양하고 알차다. 강릉은 ‘기후위기 시대, 지구와 나를 위한 퍼머컬처 학교’, 옥천은 ‘로컬 미디어를 통한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 방식을 익히는 옥천살이’, 제천은 ‘월악산 자락에서 열리는 5박6일의 농촌 캠프’를 내세웠다. ‘순창언니들과 함께하는 농촌생활 뽀개기’나 ‘유쾌하고 따뜻한 서천 언니들과 함께하는 시골’,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시골이 이렇게 다채로운 곳이라니’를 내세운 강화처럼 재미를 강조하기도 하고, 울주나 상주처럼 ‘아는 시골언니’를 만들어보자는 네트워킹 권유형도 있다.

실제 평가에서 주최 측이 가장 중요하게 검토한 점은 청년여성이 시골에서 만날 수 있는 시골언니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지역에 관계망을 구축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청년여성을 환대하는 시골언니의 존재 자체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프라 부족, 인적 네트워크의 부재, 가부장적 농촌문화 등 청년여성이 시골살이를 주저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농촌에서 2주, 나의 해방일지’라는 타이틀을 내건 울주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농촌에서 2주, 나의 해방일지’라는 타이틀을 내건 울주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김 팀장은 “실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지역의 가부장적인 문화와의 갈등인데, 이게 하루아침에 변화하기는 힘들지만, 꾸준히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먼저 정착한 시골언니들이었던 셈”이라고 말한다.

“시골언니들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지역사회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청년여성들이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그런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네트워크가 있다면, 시골에서의 삶에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정착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당신도, 시골에 아는 언니 한 명 만들 수 있어요.”

울주 소호마을의 시골언니 영순씨는 “(마을 공동체와의) 문화적 격차는 살면서 바꿔나가는 수밖에 없더라”라며 시골언니가 “완충지대”가 되어줄 거라고 말한다. 시골언니들은 시골살이의 각종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사는 법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줄 수도 있고, 친환경 농법에 대한 정보를 함께 나눌 수도 있다. 시골언니들의 면면을 보면 디자인이나 문화기획 쪽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얄팍하게만 접하던 시골살이를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렌즈가 되어줄 수도 있다. 김 팀장은 “제가 만난 시골언니들은 ‘기획자’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며 “자신의 삶을 기획하기 위해 시골살이를 선택한 만큼 굉장히 구체적으로 주변의 자원을 연결해서 유무형의 콘텐츠로 만들어내더라”고 전했다.

‘유쾌하고 따뜻한 서천 언니들과 함께하는 시골’을 내세운 서천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유쾌하고 따뜻한 서천 언니들과 함께하는 시골’을 내세운 서천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시골언니’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시골살이를 해온 ‘반토박이’부터 도시 생활을 하다가 귀향한 사례도 있지만, 다수가 도시에서 태어나 살다 시골로 들어온 젊은 이주민이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게재된 ‘당만시(당신이 꼭 만나야 할 시골언니)’ 인터뷰에 참여한 18명 중 14명이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했다. 도시 생활의 경험이 시골 정착을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

블루베리와 허브 농장을 운영하며 외국어 특기를 살려 방과후교사로도 활동하는 5년차 서천 농부언니 이수진씨는 도시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친환경 농업을 위한 정착지를 찾다 ‘1박2일’ 귀농 캠프를 통해 서천에 터를 잡았다. 귀농·귀촌 프로그램 참여 당시 항상 막내였다는 이씨는 “시골에 내려오려는 젊은 여성분들이 여러 시행착오 없이 조금이라도 순탄하게 정착하는 데 시골언니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월악산 자락에서 열리는 5박6일의 농촌 캠프’를 운영하는 제천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월악산 자락에서 열리는 5박6일의 농촌 캠프’를 운영하는 제천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탈서울·탈도시를 지향해온 도시 청년여성”이던 제천 시골언니 ‘짜미’ 최나현씨는 덕산 청년마을에서 운영하는 ‘충북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통해 제천행을 결심했다. “신체적인 안전은 물론이고 지역에 기반 없는 도시 청년이 다양한 감수성과 정체성을 지키며 지역과 관계 맺을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는 최씨는 “그래서 나를 이해하는 동료가 필요하고 문제를 함께 인지하고 해결할 공동체와 마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제천 시골언니들은 ‘안전하게 환대받는 공간’을 목표로 기후, 동물권, 젠더, 친환경 등 청년여성들의 관심사에 맞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로컬피플과의 교류,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비건 요리 워크숍이나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도 병행한다.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시골이 이렇게 다채로운 곳이라니’ 강화의 매력을 알리는 강화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시골이 이렇게 다채로운 곳이라니’ 강화의 매력을 알리는 강화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청년여성들의 요건은 각 현장운영기관에서 정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살이, 대안적인 삶, 귀농, 창업, 취업을 고민하는 사람부터 다양한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싶거나 마음의 쉼이 필요한 사람 등이다. 다만 청년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이니만큼 만 19~39세 이하 나이 제한은 있다.

“구체적인 기준 없이 선착순으로 선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각 현장 프로그램에 적합한 사람을 (현장운영기관에서) 직접 선발하는 과정을 통해 일회성의 참여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망으로 연결되길 바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사업은 끝나도 삶은 계속 이어지니까요.”

청년여성 총 250여명의 참여를 계획하고 있으며 8월 말 현재 51명이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아직 5개 기관에서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청년 친화적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익숙하지 않은 시골언니들이 많아서 모집에 어려움은 있지만, 슬랙이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 느슨한 연결망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시골에서 재밌게 지내는 이야기를 꾸준히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로 꾸리는 것이 향후 목표다.

옥천신문으로 잘 알려진 옥천은  ‘로컬 미디어를 통한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 방식을 익히는 옥천살이’를 내걸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옥천신문으로 잘 알려진 옥천은 ‘로컬 미디어를 통한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 방식을 익히는 옥천살이’를 내걸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김 팀장은 “주로 시골의 삶이 궁금하긴 한데, 연고가 없던 분들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진한 여운이 남아 향수병(!)에 시달리는 참가자 소감도 있었는데, 너무 알 것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 참가 후기 중 “농촌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사라지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곳인지 알게 되었다”는 문장이 있었다. 김 팀장은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통해 확실하게 해소될 수 있는 편견은 “시골에 일거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골이란 공간은 꿈을 꾸는 만큼 실현할 기회가 더 많이 열립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덕분에 사람이 귀하게 여겨지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할 수 있는 허들도 도시에 비해 더 낮거든요.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이미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시키는 시골언니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소개하고, 연결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갈 생각입니다. 도시에서의 삶이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도시와 농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도록.”

고추장을 연상시키는 빨간색으로 중무장한 유쾌한 순창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고추장을 연상시키는 빨간색으로 중무장한 유쾌한 순창 시골언니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제공

김 팀장은 요즘 유행하는 ‘촌캉스(시골로 가는 휴가)’ ‘논밭뷰 카페’ ‘오도이촌(일주일에 5일은 도시, 2일은 시골생활)’ 등을 언급하며 “라이프스타일이 다변화하는 시대에 도시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에게 시골은 색다른 공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며 “그 멀어진 거리만큼 농촌 지역에 대한 이해가 얕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시골언니들도 인터뷰 중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도시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치유해가는 과정을 담아낸 이 영화를 혹자는 ‘판타지’라고도 하지만, 시골언니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맛보기 정도는 경험해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당신도 아는 시골언니를 만들 수 있다고 부추긴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오는 11월까지 진행된다. 참여를 원하는 청년여성은 ‘시골언니프로젝트’(www.sigolunni.co.kr) 홈페이지와 지역살이 소개 플랫폼 ‘어마어마’(www.umum.co.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체류형 시골 캠프 기간은 5박에서 9박이며 3만~5만원 내외의 예약금 혹은 참여약속비가 있는데 그마저도 참가 시 반환하거나, 지역상품권으로 돌려준다. 역시 시골언니 인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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