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축복기도가 죄인가”···‘성소수자 축복’ 징계받은 이동환 목사

2022.11.08 09:26

감리교단, 정직 2년…“사상으로 처벌하는 교회법, 국보법 같아”

“예수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친구…예수를 따라 살겠다”

퀴어문화축제에서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교단으로부터 정직 2년의 징계를 받았던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동환 목사가 지난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퀴어문화축제에서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교단으로부터 정직 2년의 징계를 받았던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동환 목사가 지난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주간경향]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다양하고 고유하게 지으셨음을 믿으며,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는 ‘무지갯빛’ 세상을 꿈꾼다.”

그는 스스로를 “담이 작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법정에 설 때도 벌벌 떨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러나 누구보다 ‘대담한’ 활동을 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동환 목사(41) 얘기다.

그는 2019년 8월 31일 인천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다. 본 무대에 올라 성의를 입고 성소수자 등 참가자들 앞에서 축복의식을 집례했다. 꽃잎을 뿌리며 축복기도를 올린 것이다. 교단은 이 목사가 ‘교리와 장정(교회법)’을 위반했다며 재판에 회부했다. 지난 10월 정직 2년의 중징계를 확정했다. 교회법은 마약 및 도박과 함께 ‘동성애를 찬성·동조하는 행위’를 정직·면직·출교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성소수자를 상대로 한 차별·혐오에 반대하며 축복한 행위를 ‘죄’라고 봤다.

이 사건은 이 목사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그는 “수면 아래 있는 한국 교회의 성소수자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끌고 와 편견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재판에 임했다”고 밝혔다. ‘이동환 개인의 불행한 일로만 끝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독교 내 성소수자 운동 단체인 ‘Q&A(큐앤에이)’를 설립했다.

‘동성애 찬성 목사’라는 낙인은 이 목사에게 극심한 압박과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자신을 향한 적대감에 맞서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 아울러 이 목사는 1800만원이 넘는 소송비용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교단 내에서 이 목사를 추가 고소하려는 움직임까지 감지되고 있다.

이 목사는 그럼에도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예수의 삶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목사를 지난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만났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예전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죄’라는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2013년 수원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어느 날 교인 한분이 커밍아웃을 했다. 등줄기에 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그렇다고 ‘이건 죄인데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이후 성경 구절, 교회 내 논의 내용, 해외 사례, 심리학·의학 등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론은 ‘내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쪽만을 봐왔다’였다. 조금씩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편견이 깨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해외 교회에선 성소수자를 인정한다. 성소수자 목회자나 주교도 있다. 성경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듯한 구절이 있는 건 맞다. 그런데 성경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게 굉장히 많다. 아주 옛날에 쓰여졌고 당시 상황에 따른 맥락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따른다면 돼지고기나 오징어를 먹어도 안 된다. 두개 직물을 섞은 옷을 입는 것도 금지한다. 심지어 큰형이 사망하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하는 내용도 있다. 한국 교회는 반동성애 구절을 가져와 현재에 대입하면서도 다른 구절은 그러지 않는다. 정직하지 못한 태도다. 과거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를 옹호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지 않나. 동성애 반대 또한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고 결론 날 것이다.”

-퀴어축제에서 축복의식을 한 배경은.

“축제 며칠 전에 ‘무지개예수(성소수자와 함께하는 모임)’에서 급히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아내가 받았다. 아내의 제안으로 참가하게 됐다.”

-고민은 안 됐나.

“고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동성애 찬성·동조를 처벌하는 교회법 시행 이후였다. 다만 법을 위반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봤다. 목사로서 축복이 필요한 곳에, 요청이 와서 축복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가야 하는 자리라고 판단했다.”

이 목사는 이후 경기연회 자격심사위원회와 심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자격심사위와 심사위는 사회로 치면 각각 경찰과 검찰에 해당한다. 심사위는 2020년 6월 이 목사를 경기연회 재판위원회(법원)에 회부했다. 재판위는 그해 10월 이 목사에게 정직 2년을 선고했다. 정직 중에서도 가장 높은 형량이다. 이 목사가 항소했으나 지난 10월 20일 총회 재판위원회는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판결문에는 “피고인의 내심 속에는 감리회의 전통과 교리에 도전한다는 인식과 의사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목도 나온다. 감리회 재판은 2심제다.

이동환 목사가 2019년 8월 31일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 등 참가자를 위한 축복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 쥬피터 제공

이동환 목사가 2019년 8월 31일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 등 참가자를 위한 축복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 쥬피터 제공

-심사위 조사 과정은 어땠나.

“자격심사위에서 목사 10명이 나를 쭉 둘러싸더니 사건 경위를 캐물었다. 혼나는 분위기였다. 어떤 분은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다시는 이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도 요구받았다. 그럴 수 없었다. 동성애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립이 안 된 것 같으니 리포트를 제출하라고도 했다. 이후 심사위원들은 ‘동성애는 죄냐, 아니냐’, ‘동성애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질문만 계속했다. 그때마다 ‘동성애는 누군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방법이고 성적 지향이다. 찬성하고 반대할 문제가 아니다’고 답했다.”

-재판에선 어떻게 대응했나.

“동성애 찬성·동조를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것인가. 축복식 내용은 ‘우리는 다 동등한 사람이다, 용기 내 살아가길 바란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디가 동성애 찬성이고 동조인지 기소한 사람들이 밝히라고 했다. 근본적으로 해당 조항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게 핵심이다. 실제 성소수자를 옹호했는지를 떠나 내 생각과 양심이 어떻게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사상을 이유로 처벌하는 국가보안법과 같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어떤 면에선 재판을 지켜본 성소수자들에게 미안했다. 재판 전략상 내 행위가 왜 동성애 찬성·동조가 아닌지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칫 ‘동성애는 죄라고 생각하지만 축복은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비춰질까봐… 무거운 마음이었다.”

-정직 2년을 예상했나.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실 재판결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각서 쓰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이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재판에서 내 형량을 깎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성소수자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와 논의를 통해 편견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보여주느냐의 싸움, 즉 운동의 일부분이었다. 누군가는 이 시점에서 잘못됐다는 걸 말해야 했다. 그럼에도 선고날이 다가오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변호인 등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책위원회의 논의에서도 정직 3~6개월 정도를 예상했다. 재판 과정에서 상대측 논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퀴어축제에 가서 축복의식을 했다, 그건 죄이다’ 정도 수준이다. 반면 우리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런데 2년을 받고 나니 감리교 재판은 요식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당초 면직이나 출교 처분까지 내리려 했다는 점이다.”

-2심 재판이 무려 2년 동안 진행됐다. 교회법에는 재판은 최대 2개월 반 안에 끝내야 한다고 나와 있다.

“1심에서 정직 2년을 선고받자마자 정직 효력이 발생했다. 이 징계가 끝난 뒤에야 2심 선고를 받는 기이한 상황에 놓였다. 공개재판이 원칙이다. 그런데 재판위가 비공개 재판을 시도했다. 나를 심사(기소)했던 분이 재판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제척사유가 되는 것이다. 기소권자인 심사위에서 아무도 재판에 참석하지 않거나 변호사만 나온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재판이 여러 번 연기됐다.”

-2심 재판이 끝나고 1000만원이 넘는 소송비용이 나왔는데.

“교회법은 처벌 선고를 받은 사람이 소송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1심 재판이 끝나고 700만원을 냈다. 항소를 위해 미리 700만원을 기탁했다. 2심이 끝나자 소송비용이 총 1137만원이라며 기탁금 700만원 외에 430여만원을 더 내라는 공문이 날아왔다. 재판위의 잘못으로 개최하지 못한 재판에서 소요된 비용까지 청구했다. 대책위 명의로 이의를 제기할 예정이다.”

-추가 기소 가능성 얘기도 나온다.

“나를 고소하려는 움직임이 교단 내에 있다. 축복식 외에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을 증거로 동성애를 찬성·동조했다고 주장하려는 것 같다. 고소를 위한 서명과 모금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감리교 내에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하는 분들도 있다.”

-사회 법원에 징계 무효 소송 등을 제기할 수는 없나.

“가능하긴 하다. 다만 위험 부담이 크다. 교회재판을 받은 뒤에 사회 법정에 제소했다가 패소하면 또 정직·면직·출교 등 중징계에 처하도록 교회법은 규정한다. 주변 변호사들 얘기를 들어봐도 사회 법원에서는 교리 같은 문제를 다루는 데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라고 하더라. 소송을 제기해도 패소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심사와 재판을 받으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일단 어떠한 적대감 앞에 서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나는 담이 작다. 심사나 재판을 받으러 들어갈 때도 벌벌 떨었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사람이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욕을 퍼붓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도 그랬다. 새벽에 전화해 ‘방언기도(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언어를 통한 기도)’를 하고 끊는 사람도 있었다.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컸다.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공황장애가 와서 지금도 약을 먹는다. 안면장애도 겪어 지금도 조금 불편하다. 심한 우울감 때문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반대입장을 밝힐 때 심리적 타격이 컸다. 이번 사건을 하나의 운동으로 이끌어가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힘들었다.”

-재판을 겪은 소회는.

“내가 속한 집단인 감리교를 굉장히 사랑한다. 그런데 감리교의 인식이 아주 심각하다는 점을 느꼈을 때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를 바꾸기 위한 운동을 쭉 해나갈 것이다. 재판을 지켜본 사람들, 특히 성소수자들에게 재판이 상처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했을 수도 있으나 한편으론 희망도 많이 봤다. 엄혹한 ‘동성애 혐오’ 광풍이 부는 상황에서도 많은 분이 이름을 내걸고 지지해줬다.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같이 이겨나갔으면 한다.”

-아내의 반응은 어땠나.

“가장 큰 힘이 됐다. 각서를 앞에 두고 각서를 안 쓰면 재판에 회부될 텐데 아내에게 괜찮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내는 ‘어차피 미래에는 교회법에서 성소수자 관련 조항이 사라지는 등 세상이 변할 것이기 때문에 역사 앞에 부끄럽게 남지 말라’고 말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동성애 찬성·동조 처벌 조항을 국가보안법에 비유했는데.

“감리회는 2015년 법을 개정하면서 이 조항을 추가했다.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소수자 차별법을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앞으로 목사가 되려는 학생들이 성소수자를 위한 축복기도를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 내가 재판에 넘겨졌을 때 동료 목회자들이 성명을 낸 적이 있다. ‘축복기도를 한 목사를 징계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름을 올린 목사들이 성명에서 이름을 빼라는 요구를 받거나, 지방에서는 장로들이 성명에 이름이 있는 목사는 동성애 지지자니까 재판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해 재판 직전까지 갔다고 들었다. 과거 ‘빨갱이 사냥’과 같은 양상 아닌가. 이 조항을 바꾸기 위한 운동도 펼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동환 목사가 설립한 성소수자 운동 단체 ‘Q&A’의 로고

이동환 목사가 설립한 성소수자 운동 단체 ‘Q&A’의 로고

이 목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소수자 관련 운동을 하는 ‘Q&A(큐앤에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한국 교회를 향한 퀴어한 질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는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은 이동환 개인의 일이 아니라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 앞으로 목회를 할 사람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혐오나 차별이 너무 심각하다. 나의 불행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계속 이어져서는 안 된다.”

-Q&A는 어떤 활동을 하나.

“한국 교회 안에서 소수자 인권을 말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성소수자 당사자를 위한 활동, 한국 교회의 인식 개선을 위한 활동 등 두가지 방향이다. 가장 주요한 활동은 한 달에 한 번 성소수자들과 함께하는 예배다. 성소수자 교인을 위한 무료 상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성소수자들의 영화, 글쓰기 모임도 개최한다. 이를 통해 속 얘기를 나누며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목회자를 대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 등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초 인식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성소수자 대상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제의 세미나도 연다.”

이 목사는 2013년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의 투쟁현장을 찾은 이후 동양시멘트, 파인텍, 콜트콜텍, 삼성 해고노동자의 고공농성 등 각종 노동현장에서 기도회를 개최해왔다.

-지금도 노동현장에 가는지.

“재판을 거치면서 운동의 자리가 달라지다 보니 이전처럼 주도해서 가지는 못한다. 30대에 10년 동안 노동현장에서 한 활동들은 예수의 삶을 따른다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억울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됐다. 나도 노동현장에서 예수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현장이 바뀌었을 뿐, 내가 믿는 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 계획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판에 휘말렸다. 그 과정에서 내 선택으로 이 길을 가게 됐다. 단체까지 만들었다. 앞으로 성소수자와 더불어 목회하고 활동하는 목사로 살아갈 것 같다. 부담스러운 점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나는 큰일, 대단한 인권운동을 한 게 아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았지만 실은 그저 축복기도만 올렸을 뿐이다. 교회 안에서 이런 활동을 해온 분들이 이미 있었다. 그 뒤를 이을 뿐이다. 목사로서 가야 할 자리에 간 것이고, 해야 할 일을 한 게 전부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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